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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령을 넘다가 고단한 삶 푸념을 뱉다가 홀연히 오른 고산의 훈수 내 위엄이 그대 발 아래 있노니 *태백 야화 어둠이 없었다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빛 여명이 짜준 양탄자에 올라 영원으로 숨어드는 우리는 야화 2023. 8. 10.
7월로 길을 걷다가 길을 걷다가 우연을 핑계로 너를 만나고 싶다 필연은 신작로에 구르는 자갈처럼 발길에 채이고 비바람에 쓸려 가다 마침내 맑은 시냇가에 안겨 동그라미가 되는 것 길을 걷다가 너를 만나면 통속한 잡지의 모델이 되어 목젖이 보이도록 껄껄 웃고 싶다. 얼굴 해바라기 초등학교 자율학습시간 자, 제 얼굴 표정 보이죠 해님이 애무를 하면 부끄러워 말고 살포시 고개를 들고 허리를 살짝 숙이는 거예요 노란 스카프 목에 두르고 지나는 바람 꼬드겨 해님이 콕 찍게 보일락 말락 내 치맛자락 흔드는 거예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밤새 웃는 연습을 하고 윤슬 흐르는 냇가에 섰습니다 나는 이미 정분이 나서 그리움 삭일 가슴이 없습니다 불타는 여름 그대 떠나면 난 죽고 말테요 건들매 나서기 전 뜨겁게 안아 마음껏 내 입술 훔.. 2023. 7. 27.
목 (2) 확신에 찬 공 박사의 말을 듣자 신 교수는 그가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코흘리개 친구로 십 수년을 함께 뒹굴다가 긴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만난 고향 친구가 거부가 되어 있다든지 고관대작으로 변신하여 갑자기 마주쳤을 때,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분명 옛날 친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봐, 얼굴 표정이 왜 그래?" 신 교수가 유리컵에 물을 따라서 급하게 마셨다. "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봐." 마땅찮은 표정을 한 공 박사가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아직 학계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지. 자네에게 처음 말하는 거야." "허, 이 사람 내가 뭐라고. 난 이 분야에 문외한이 아닌가. 그런 내가 들을 귀가 있어야 이해를.. 2023. 7. 23.
7월에 만나는 노을 동지섣달 꽃 본듯 긴 장마 끝에 만나는 노을 오랜 연인과 재회하는 순간이다 불타는 사랑이 몰래 훔치고 짝사랑이 송두리째 앗아간 노을 그 사랑이 계면쩍지 않게 무안하도록 타올라야 할 저녁 삶의 핑계에 덤탱이를 씌워 몰각했는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잊었던 이름 선명하게 떠올라 아ᆢ 내게도 습기가 남았구나 경계를 넘는 용암이 쇠락한 담벼락에 긋는 갈짓자가 아닌 바를정자 끝은 곧 시작이라고 누가 황혼이라 할까 붉게 물들 가슴만 있다면. 2023. 7. 19.
내고향 그곳엔 사랑의 유효기간 사랑 그 막차가 도착했을 때 땅거미가 음침한 놈이라는 걸 알았다 리트머스지에 잉크가 스미듯 슬금슬금 옷깃을 파고들어 마침내 심장을 도륙하는 어둠 머리 위에 태양이 빛나는 날 저 낮뜨거움이 지겹게 오래 가리라 그대의 긴 머리에 앉은 뜨거운 입맞춤으로 가려진 무색 무취의 계절 시간은 미처 옆구리를 찌르지 못했다 사랑의 이간질 사방 천지에 깔린 삶의 못들이 무시로 찔러 괴성을 지르다 입 막고 귀 막고 눈 가린 무단의 시간이 느닷없이 압류 통보를 해오다 멀게만 보였던 고지 마음을 두고 발이 먼저 닿아버린 그곳에 영원할 것 같았던 푸른날들이 남루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고향 그곳엔 소꿉동무들이 뛰어가던 어스름 동구밖 그날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여름 수 많은 날 끝에도 너는 여전하구나 먼 길을 돌.. 2023. 7. 14.
고양이 무덤 (2) 원고를 그만 보내라고 전화를 받은 건 일주일 뒤였다. "남은 게 많은데 갑자기 왜 그럽니까?" "그건 제가 모르는 일이구요. 전 시키는 대로 전할 뿐입니다." "한 번 찾아간다고 하세요." "좋을 대로 하시지요." 물을 제대로 주지 않은 탓인지 창가에 둔 손바닥 만한 선인장 화분이 누렇게 말라있었다. 마시다 만 컵의 물을 부어주긴 했지만 이미 글러 보였다. 쓰다가 만 원고를 서랍에 쑤셔 넣고 일어나자 현기증이 일었다. 그래. 그때가 4월이었지 수 연간 지붕을 해 얹지 않아서 지붕 색깔이 희끄무레한 앞집 봉선이네 집 울안에 유독 눈부시게 핀 살구 꽃을 넋 놓고 바라보던 봄 머리가 하얗게 저려오는 현기증은 그 느낌이었다. "아빠, 왜 그렇게 서 있어?" 선잠을 깨우듯 딸 경숙이 팔을 흔들었다. "왜, 무슨 .. 2023. 7. 5.
아름다운 이별 아름다운 이별 굴레 자유를 잉태한 자궁 속 유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유랑하는 빛 마침내 화려한 이별로 나오다 잊히지 않으려 이별을 선택한 붙박이 삶 점에서 점으로 흑암을 날아 선으로 가다 톡 사랑이 터진 자리로 빛으로 꾸어다 쓴 외면해야 할 빚 잔치 슬픔이 건넨 이름다운 이별 절정의 오르가즘 2023. 7. 1.
감자 익을 무렵 한해의 허리로 오른다. 노루 꼬리 같은 봄을 한숨 몇 번으로 보내고 나면 턱에 닿을 듯이 여름이 들이 다친다. 옷장을 뒤져 반팔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서면 이미 가버린 반년이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아차 싶은 것이다. 그렇구나, 한 해의 절반이 흘렀구나. 계절이 변하고 주변이 변하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인데도 마음은 거부권을 들고 공연한 트집이다. 이봐요, 무슨 세월 타령? 아직 반년이 남았는데. 세월이란 놈 자기 갈길 바빠서 쳐다보지도 않아. 그래봤자 두달 감자는 눈치가 빨라서 여름 장마가 오기 전에 신접살림을 끝내야 한다는 걸 안다. 오랜 세월 경험으로 습득한 데이터를 유전자에 기록한 것이다. 저 무뚝뚝한 감자가 태양의 앱을 깔고 수 천 번 업.. 2023. 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