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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단편24

남풍은 두 번 불지 않는다 2 * 소설의 槪要 (해방 후 1940년 후반부터 70년 전반까지 우리나라는 경제적 빈곤국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하게 살았다. 전국의 산골에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들이 즐비했고 척박한 삶의 그늘이 만들어낸 도박과 아편은 소작농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보리고개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겪어야 했던 춘궁기( 春窮期 ) 는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는 것이 국가의 과제가 되는 동기가 된다.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지만 불과 7~80년 전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난의 음지에서 풍요로운 작금에 이르기까지 당시를 살아간 凡人 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한 편의 풍경화로 그려보려고 했다. * 1편의 줄거리.. 2024. 3. 13.
봉화골의 전설 2 "여러분, 봉수 댁인가 뭐시긴가 여우 같은 년이 동네 남정네들을 아주 바보 등신을 만들고 있는데 그냥 있을 거 에요?" "맞아요. 남정네들이 아주 설설 긴다는데 무슨 수를 써야지 이러다간 동네 모두 비리게 됐어요." "달식이 그 등신도 그 모냥으로 당했다지, 큰소리 치던 완수가 한 방에 당한 걸 보면 고년이 보통 년이 아닌 건 확실하니 대책을 세워야 해요." "무슨 대책?" "그년을 내 쫓던지, 안 그러면 우리가 가서 요절을 내 뿌리던가 해야지 이러다간 동네 남정네들 마카 등신 되겠소." 모두들 웅성거리자 도시서 시집온 서울 댁이 나섰다. "어머, 모두들 이상하시네요. 그 여자가 동네에 무슨 해꼬지를 한 거도 아니고 엄연히 남친이 있는 몸인데 동네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몰려가서 일을 벌린 거잖아요. 그러면.. 2024. 2. 16.
봉화골의 전설 1 "이보게 자네 그 여자 본 적이 있나?“ "누구?" "저기 봉선화 골 산 밑에 사는 여자 말이지 ." "아..그 여자. 나도 멀찍이 몇 번 보기는 했지." 달식은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땅 꺼지겠네. 대낮에 웬 한숨이야." 달식이 담배를 꺼내 물자 현석이 성냥을 그어 그의 입에 대었다. "난 말이야. 언제부터 인지 야밤에 그 여자가 산다는 산 밑을 자꾸 보는 습성이 생겼어." 달식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웅얼거리자 현석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만 그런 게 아니야. 이 마을에 사는 사내 놈 치고 그렇지 않은 놈 몇 이나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누가 봐도 홀랑 반할 절세미인이 왜 이런 산골짝에 와서 사는지 귀신이 곡 할 일 아닌가?" "그렇긴 해. 더구나 봉수 그 놈이 어디 그 여.. 2024. 2. 15.
목 (2) 확신에 찬 공 박사의 말을 듣자 신 교수는 그가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코흘리개 친구로 십 수년을 함께 뒹굴다가 긴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만난 고향 친구가 거부가 되어 있다든지 고관대작으로 변신하여 갑자기 마주쳤을 때,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분명 옛날 친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봐, 얼굴 표정이 왜 그래?" 신 교수가 유리컵에 물을 따라서 급하게 마셨다. "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봐." 마땅찮은 표정을 한 공 박사가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아직 학계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지. 자네에게 처음 말하는 거야." "허, 이 사람 내가 뭐라고. 난 이 분야에 문외한이 아닌가. 그런 내가 들을 귀가 있어야 이해를.. 2023. 7. 23.
고양이 무덤 (2) 원고를 그만 보내라고 전화를 받은 건 일주일 뒤였다. "남은 게 많은데 갑자기 왜 그럽니까?" "그건 제가 모르는 일이구요. 전 시키는 대로 전할 뿐입니다." "한 번 찾아간다고 하세요." "좋을 대로 하시지요." 물을 제대로 주지 않은 탓인지 창가에 둔 손바닥 만한 선인장 화분이 누렇게 말라있었다. 마시다 만 컵의 물을 부어주긴 했지만 이미 글러 보였다. 쓰다가 만 원고를 서랍에 쑤셔 넣고 일어나자 현기증이 일었다. 그래. 그때가 4월이었지 수 연간 지붕을 해 얹지 않아서 지붕 색깔이 희끄무레한 앞집 봉선이네 집 울안에 유독 눈부시게 핀 살구 꽃을 넋 놓고 바라보던 봄 머리가 하얗게 저려오는 현기증은 그 느낌이었다. "아빠, 왜 그렇게 서 있어?" 선잠을 깨우듯 딸 경숙이 팔을 흔들었다. "왜, 무슨 .. 2023. 7. 5.
고양이 무덤 안개비가 내리는 것은 아침에 먹은 약 때문이었다. 한 봉만 먹었을 때는 좀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지럼을 이기려고 또 한 봉을 먹자 얼마 안 있어 안개비가 내렸다. 약을 먹기 전의 내가 정상이었을까? 의사와 약사는 정상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약을 주었을 것이니 약 먹은 뒤의 내가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개비가 내리고 그 안개비는 한참 동안 내렸다. 나는 그 안개비를 맞으며 고양이를 묻으러 갔다. 함께 있은 지 오래라 이 녀석도 살만큼 살아서 인지 죽을 때도 미련이 없어 보였다. 자아성찰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죽어가는 고양이 얼굴을 본 뒤였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정신현상학을 쓴 헤겔은 죽으면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오래전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가 쓴 철학서 못지않게 그의 표정.. 2020. 2. 11.
목 * "자네, 구약성서에 나오는 무드셀라라는 사람이 969세까지 살다가 죽은 걸 믿나?" "얼빠진 놈들이 지거리는 개수작이지. 그렇게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거야 모르지. 살아보지 않았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 일세" "허, 이사람 유전자 연구를 너무 하더니 사람이 변했구먼." 공 박사는 현미경을 책상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신 교수를 묘한 시선으로 넘겨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창 너머 플라타너스 잎들이 앞뒤로 모양을 바꾸며 부산을 떨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았다. "오래 사는 게 모두의 꿈 아닌가. 자네도 속으론 원하잖아." "그렇기는 한데, 적당해야겠지." "그 적당이라는 게 무섭다고 하더군. 후대들이 눈치를 주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거지." 공 박사가 사무실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천.. 2018. 5. 27.
고독 * 바다 같다는 호를 내닫는 유람선은 처음과 달리 그냥 밋밋한 느낌만 들었다.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천천히 갑판으로 나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내닫는 유람선의 맞바람을 맞고 있었다. 수면으로 스미는 저녁햇살 탓이었을까 갑판 모퉁이에서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는 여인이 모습이 그림처럼 들어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걸 느꼈지만 그는 재빨리 연달아 셔터를 눌렀다. 파인더에 들어온 여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계속 쓸어 올리고 있었다. "이봐, 당신 뭐야?"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이 그의 어깨를 나꿔챘다. "당신 카메라 좀 봅시다." "아니,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당황한 모습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이내 욕설이 날아왔다. .. 2018.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