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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단편

남풍은 두 번 불지 않는다 2

by *열무김치 2024. 3. 13.

* 소설의 槪要 

(해방 후 1940년 후반부터 70년 전반까지  우리나라는 경제적 빈곤국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하게 살았다.

전국의 산골에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들이 즐비했고  척박한 삶의 그늘이 만들어낸 도박과 아편은 소작농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보리고개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겪어야  했던 춘궁기( 春窮期 ) 는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는 것이 국가의 과제가 되는 동기가 된다.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지만 불과 7~80년 전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난의 음지에서 풍요로운 작금에 이르기까지  당시를 살아간  凡人 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한 편의 풍경화로 그려보려고 했다.

 

   

* 1편의 줄거리  

 

((1950년대 후반, 소작농으로 남의 땅이나 부쳐먹으며 식구들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봉식은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딱한 처지다

마을의 대 지주인 성부자 영감에게 잘 보이지 못한 탓으로 그동안 얻어 부치던 땅뙈기 마저 빼앗긴 봉식은 딸 언년을 넘보는 성영감의 탐욕에 분을 삭이다가  무능한 봉식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딸 언년이 스스로 성영감의 후처로 들어가자 그 덕으로 괜찮은 땅뙈기를 얻어 그럭저럭 연명을 하지만 끈질긴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책하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봉식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봉식의 처도  성영감의 노리개가 된 딸의 처지를 비관해 병을 얻어 눕게되고  언년에게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한다.

언년을 후처로 맞아들인 성영감이 언년에게 집칸을 내어주고 언년 사이에 아들까지 얻었지만  언년은 성영감 처의 모진 구박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머슴 수삼이 언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고 바쁜 농번기를 틈타 언년에게 몰래 마련한  패물을 쥐어주며 도망을 가라고 한다.

수삼이 쥐어준 패물을 들고 도망을 친 언년이 타관 함바집에서 날일을 하며 지내다  공사판 인부인 태석의 눈에 들어 살림을 차리고 딸 은교를 낳지만 의처증에 술로 세월을 보내던 태석이 광산 매몰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학교 소풍을 갔던 은교마저 사고로 잃게 된다.

객지에서 얻은 인연을 모두 잃어버린 언년은 낙담하지만 두고 온  아들 학기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을 차려 재기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을 객지로 보내준 수삼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수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언년은 버리고 간 아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삼을 앞세워 살았던 마을에 찾아가지만 멀리서 바라본 아들이 불구의 몸이 된 것을 알게 되는데...))

 

 

 

 

 

새자뜰에 큰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아침해가 뜨기도 전에 수삼이 들이닥쳤다.

"새벽 댓바람부터 웬일이세요?"

"새벽이고 뭐이고 언년이 자네가 그 땅을 샀다는 소문이 맞남?"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수삼을 본척만척 언년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불나게 쫓아온 수삼이 언년의 팔을 낚아챘다.

"아이, 왜 이래요."
"내 말은 개 방구로 듣는 거여? 그 소문이 맞냐니께."

"아니에요. 그런 거. 누가 그래요?"

"동네가 다 아는데  나를 개 등신으로 아남. 귓구녕을  뻔때로 달고 다니는 거 아니잖여."

언년이 씻다가 만 그릇을 큰 소리가 나도록 내 던졌다.

"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도 오늘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리고 낼 모래면 오십 줄인데 말 좀 가려서 하세요."

" 버강지에 불도 안 땠는데 굴뚝에 연기 나는거 봤구?"

"그만한 땅을 샀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제 사는 형편을 아시잖아요. 모두 헛소문이지."

" 자네 나한테 일카면 안 되지. 돈 좀 벌었다고 이젠 나 같은 놈 뵈키지도 않치?"

언년이 휑하니 주방을 나가자 허공에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수삼이 설거지통을 걷어찼다.

"하, 저년 뻔때 좀 보소.  눈 하나 껌뻑하지 않네."

 

식당에 점심 손님들이 줄줄이 들이 닥치고 종업원들이  진땀을 흘리며 돌아다녔지만 아까부터 식탁에 죽치고 앉은 수삼은 담배 한 갑을 거지반 연기로 날리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그만 피우라고 손을 내 저었지만 수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식당 안에 담배연기가 가득 차 밥을 먹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연년은 멀찍이 바라만 볼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새자뜰 근처 공사판에서 근 한 달째 날품을 파는 잡부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들이닥쳤다.

기름때와 흙이 범벅이 된 사람에 며칠간 세수도 하지 않은 듯한 사람들이 들어와 식당 안이 왁자지껄 해지자 밥을 먹던 사람들이 얼른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

"아주마이, 여기 주문받아. 매상 올려줄라고 일부러 왔다니까."

언년이 얼른 쫓아가 반가운 표정을 하자 일행 중 몇 사람이 농을 건넸다.

"아이고, 쥔 아주머니가 미인이라서 자꾸 오고 싶다니까. 얼굴이 이쁘니 밥맛도 꿀맛이야. 안 그래?"

"옳거니, 이 동네에 사장님 같은 미인이 어디 있어. 애인 삼고 싶어 죽겠다니까.  오케이?"

언년이 눈웃음으로 농을 받아넘기고 주문을 받자 그중 한 사람이 쫓아와 연년의 이마에 만 원권 한 장을 척 붙여주었다.

"이건 사장님이 미인이라서 뽀나스~"

잡부들이 박수를 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왜들 그러세요. 이런 건 안 주셔도 되고요. 저의 식당을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언년이 지폐를 식탁에 내놓자 언년의 이마에 돈을 부쳐주던 사람이 별안간 다가와  언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고 사장님, 그럼 이쁜 사장님 한 번 안아본 값으로 치면 되겠네. 오늘 내 원 풀었소. 사장님 꼭 한 번 안아보고 싶었다니까."

당황한 언년이 몸을 빼려고 밀었지만 인부는 허리를 더욱 세게 조이고 언년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그때였다.

킬킬대던 인부들 복판으로 커다란 주전자가 날아들었다.

"이런 똥깐 같은 놈들이 어디서 개수작이여."

수삼이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인부들 복판으로 뛰어든 수삼은 난로에서 뜨겁게 데워진 주전자에 든 물을 인부들에게 마구 뿌려댔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인부들이 혼비백산 흩어지자 바닥을 닦던 대걸레 자루를 부러뜨려 움켜쥔 수삼이  언년을 안은 인부에게 미친 듯이 휘둘렀다.

"이 잡놈의 새끼. 너 오늘 저승구경 한 번 해뿌라"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대걸레 자루에 사정없이 얻어맞은 인부가 식당 구석으로 나동그라 지고 식당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망을 치던 인부들 중 일부가 수삼에게 달려들었지만 이성을 잃은 수삼이  마구 휘두르는 걸래자루에  머리통과 다리를 맞고 식당 여기저기에 쓰러졌다.

눈이 뒤집힌 수삼이 작대기를  팽개치고 주방으로 들어가 긴 쇠국자를 들고 나와 언년을 안고 입을 맞추던 인부에게 다가가  퍽퍽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수삼이 휘두른  국자에 맞아  몸 여기 저기에 피를 흘린 인부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이 벌어진 광경에 놀란 종업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식당 밖으로 도망을 치자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벌벌 떨던 언년이 미친 듯이 나대는 수삼에게 달려들었다.

"미쳤어요? 왜 이래요. 그만, 그만 진정을 해요. 아저씨, 내 말 들어요. 제발요."

싸움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밖으로 도망을 갔던 인부들과 공사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언년이 쫓아가 양팔을 벌리고 막아섰지만  이내 인부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식당 안으로 질질 끌려들어 왔다.

머리채를 잡힌 언년을 보자 짐승이 우는듯한 소리를 내지르던 수삼이 난로 옆에 있던 연탄집게를 집어 들었다.

언년이 그러면 안 된다고 악을 썼지만 뾰족한 연탄집게를 집어든 수삼은 산돼지처럼 앞으로 내 달았다.

순식간이었다.

벼락같이 내지른 연탄집게에 등짝을 찔린  인부가 괴성을 지르며 엉금엉금 기다가 그대로 쓰러지자 당황한 인부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큰 사고가 나겠다고 생각한 언년이 수삼에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요. 이러지 말아요. 정신 차리라고요. 이러다 우리 모두 죽어요. 같이 죽을거예요? "

언년이 수삼의 바지를 부여잡고 울음을 떠트렸다.

언년의 울부짖는 모습을 본 수삼이 그제야 연탄집게를 내려놓았다.

언년이 잠시 숨을 고른 수삼을 식탁에 앉히고 냉수 한 사발을 건넸다. 

"진정하세요. 제발, 제발... 천천히 천천히.."

수삼이 깊은 숨을 내뱉자 언년은 재빨리 식당문을 걸어 닫았다.

급한불은 껐지만 폭행을 당한 인부들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수삼이 팽개친 윗도리를 걸치고  담배를 피워 물자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는지 인부들이  걸어 닫은 출입문을 부수고 쏜쌀같이 들이닥쳤다.

인부들 숫자가 처음보다 많아 보였다.

인부들 중 몇 사람의 손에는 커다란 쇠작대기가 들려져 있었다.

미처 윗옷을 걸치지 못한 수삼이 언년을 몸 뒤로 숨기고 식탁에 놓인 쟁반을 집어 들었지만 인부들은 아까와 달리 수삼을 빙 둘러싸고 연장으로 위협하며  거리를 좁협다.

몇 차례 쟁반을 휘둘렀지만 연탄집게를 들고 설칠 때와 달리  수삼은 이내 인부들에게  둘러싸였다.

덩치가 크고 힘이 장사인 수삼이었지만 수가 많은 인부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 대는 인부들에게 몇 번 맞섰지만 이내 그들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기회를 잡은 인부들이 떼로 달려들어 수삼을 닥치는 대로 짓밟았다.

언년이 달려들어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분노에 찬 인부들은 수삼이 반 죽음이 되도록 발길질을 해댔다.

집단 폭행에 축 늘어진 수삼에게  가래침을 뱉어댄 인부들이 식당을 나갔지만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중 일부는 치료비를 내어 놓으라며 식당의 기물을 부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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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뼈 골절에 팔 골절, 장 파열에 뇌진탕 증세가 보입니다. 여기 말고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언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비록 남의 집 머슴으로 살긴 했지만 순진하고 여린 수삼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얼굴이 부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수삼은 그 와중에도 언년의 손을 잡았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내가 알아서 할 건데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고요. 날 보고 죽으라는 거예요?"

연년이 흐느끼며 몸서리를 치자 곁에 서있던 식당 종업원들이 수삼의 침대를 밀고 나갔다.

늦은 밤 서울 큰 병원에 도착한 언년이 수삼을 응급실에 눕히고 간이의자에 몸을  기대자 온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았다.

 

그동안 제법 장사가 잘 되었고 예전과 달리 몸 상태도 좋아 한시름 놓고 있었다

수삼이 닦달한 새자뜰 땅을 사들인 지 두 해가 넘은지라 안 그래도 수삼에게 언질을 줄 참이었다.

그래도 험한 시절에 객지에 나가 살아갈 밑천을 쥐어준 사람이라  한시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지만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은 수삼이 예전 같지 않은 눈치라  수삼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엉뚱한 사단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처음엔 아들 학기가 있는 곳에 터전을 잡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연년은 하루하루,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되뇌고 있었다.

새자뜰 2000평 땅을 사들이자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소문이 났다.

그 지독한 여편네가 동네 사내놈들의 주머니를 훑어다 마을의 노른자 땅을 움켜쥐었다는 소문에다 얼굴이 반반한 연년에게 홀랑 넘어간 지주가 땅을 헐값에  넘겼다는 소문까지, 한동안 새자뜰 땅은  마을을 넘어 이웃마을까지 사랑방 술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땅에 눈독을 들이 사람이 한 둘이 아닌 데다 시간이 갈수록 땅값이 올라 소문은 시기와 질투가 아닌 부러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땅 근처로 제법 큰 강줄기가 흐르고 있어 새자뜰 땅은 단 이년을 넘기기 바쁘게 큰 공장을 짓겠다는 사람이 살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땅을 팔 생각이 없는 언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몇 차례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찾아와 흥정을 붙였지만  땅을 팔 마음이 없으니 다시는 오지 말라고 못을 박은터였다.  

언년의 억센 고집 때문이었는지 땅 가격을 세배로 쳐 주겠다는 흥정이 들어왔다.

하지만 아들 학기를 위해 땅을 마련한 연년은 땅 가격이 문제가 아니어서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여자 보기보다 고집이 쇠심줄이네. 장사치라 그런가 머리가 비상한 여자구먼. 장부야 장부."

땅 흥정을 붙이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 저었다.

" 산 가격 몇 배로 쳐 준다는데 팔지 그래. 그거 놔뒀다가 뭐시에 쓸라고. 땅도 임자가 나설 때 쥔을 알아봐야지.

그만 팔더라고. 지금 팔면 그깟 더러운 식당 걷어 치워도 팔자가 핀다니까."

복덕방 영감이 툭하면 찾아와 염장을 질렀다.

" 돈 벌어준 식당이 뭐가 더러워요. 팔지 않겠다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언년이 손사래를 치자 다시 비아냥이 쏟아졌다.

"원, 다른 사람들은 두 배만 쳐 줘도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 땅에다 금덩어리라도 묻어 놨나. 별스런 여편네군."

"허긴 그 좋은 땅을 금방 넘긴 걸 보이 홍규 그놈이 혼을 뺏깄지. 저 여자 몸뚱이를 보라고. 탱탱한 엉대이짝에  홍규 그놈이 뻑하고 가뿌릴 만 허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보다 더 고약한 말들이 들려오자 언년은 귀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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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병원에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중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수술을 하고 적어도 몇 개월은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년이 온몸에 깁스를 한 수삼을  중환자실에 입원을 시키고 식당으로 돌아오자 수삼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놈이 도대체 누구야?  우리가 뭘 어쨌다고 끓는 물을 뿌리고 연탄집게로 찌르고 , 그  개 같은 놈을 고발해 뿌리든가 묵사발을 만들든가 해야지."

언년이 대꾸를 하지 않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인부들이 식당 안으로 쫓아 들어왔다.

영업을 해야 한다고 나가라고 하자 인부들이 식당 바닥에 드러누웠다.

"부상을 당해서 일도 못하고 치료비도 없으니 니년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 "

연년이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켜고 팔을 걷어붙였다.

"맘대로 해 보세요. 당신들이 집단으로 폭행을 해서 그 양반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 누웠으니까  날 잡아먹든 고소를 하든 좋을 대로 하세요."

"그 양반?  미련 곰퉁이 같은 기둥서방 말이야?  싸움을 걸어온 건 그 개놈이지 우리가 아니야. 해결 안 해주면 우리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테니까 삶아 먹든 볶아먹든 맘대로 해 보라고."."

인부들이 식당바닥에 드러눕자 밥을 먹으로 들어오던 손님들이 그 광경을 보고 보고 얼른 나갔다.

" 사장님 어떻게 해 봐요. 저렇게 떼거리로 누워 있으니 무서워요."

바닥에 주저앉아 연거푸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인부들 몇이 다시 식당 기물들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할 거야. 불이라도 질러? 우리 모두 저승사자 불러 볼까?"

언년이 종업원들을 밖으로 내 보내고 인부들에게 다가서자 인부들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좋게 말할 때 해결해 주더라고. 우리도 일을 해야 먹고 살 거 아니야. 이 드런년아."

"무슨 해결이요?  고소를 하든 맘대로 하라니까요. 쌍방폭행이니 잘 됐네. 난 식당문 닫을 테니까 여기서 밤이 새도록 앉아 있든 지서에 고발을 하든 좋을 대로 하셔. 식당 기물을 부수면 기물 파손죄로 나도 고발을 할 거니까 때려 부수든 가지고 가든 그것도 맘대로 하시고."

언년이 주섬주섬 가방을 싸서 식당을 나와 문을 걸어 닫았다.

" 야, 저 년 완전 쌩 날강도네. 무신 저딴 년이 있어."

언년이 골목으로 들어서자  식당 안에서 무얼 부수는지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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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기간 입원을 했던 수삼이 퇴원을 하고 식당으로 돌아오는 날 언년은  식당문을 닫았다.

깡마른 모습으로 돌아온 수삼은 언년을 보자 눈물을 흘렸다.

"자네 보기가 꼴시럽구먼. 빈대도 낯짝이 있다카든 데.."

"회복이 되어 왔으니 다행이에요.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려요."

식당 안을 둘러보던 수삼이 언년의 손을 잡았다.

"가만 생각해 보이 아직 혈기가 남았구먼. 나 땜시 많이 까묵었지?"

"이제 살았나 보네요.  앞으로 몸 간수 잘하시고 이제부터는 말하는 거 좀 이쁘게 고쳐요."

"그게 단박에 되남. 타고난 게 그런 걸 우에라고."

언년이 내온 사골국을 훌훌 마시던 수삼이 재차 물었다.

"수작질하던 그 개놈들은 우떻게 됐남?"

몇 차례를 물어도 언년의 대답이 없자 수삼이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식사를 하다 말고 어디를 가요?"

"자네가 말을 하지 않으이 내사 알코봐야지."

언년이 수삼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원만하게 다 해결을 했으니까 걱정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 그 개만도 못한 뙈놈들에게 뭘 어떻게 해 준거여. 해결은 내가 받아야지. 이 개놈들을 다시 손을 봐 뿌리야지."

언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삼을 노려 보았다.

"다시 한번 일을 벌이면  다시는 아저씨를 보지 않을 거니까 날 보지 않으려거든 맘대로 하세요."

시슬이 퍼런 언년의 얼굴을 본 수삼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초록이던 미루나무잎이 진녹색으로 보이는 걸로 보아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해 곤욕을 치르던 식당을 접고 읍내 제법 규모가 큰  요릿집을 낸 언년은 이미 중년을 넘기고 있었다.

온갖 허드레일을 거들어 준 수삼을 어떡할 수 없어 곁에 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워낙 배움이 짧고 자란 환경이 미천한 수삼은 연년에게 늘 걱정거리였다.

인부들과 맞서 죽기 살기로 싸움판을 벌인 수삼을 본 언년은 자신을 향한 수삼의 마음이 깊다는 걸 알았지만 쉬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간 수삼을  떨쳐내려고 갖은 꾀를 다 내어 보았지만 미련하고 우직한 수삼은 언년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 학기가 있는 곳에 땅을 사주고 학기를 보살펴 주라고 간청도 했지만 허사였다.

수삼은 수시로  언년의 몸을 요구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언년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밤중에 몰래 연년의 방으로 들어와  저항하는 언년의 몸을 더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단호한 얼굴로 수삼을 내 쳤지만 그때 뿐, 수삼은 언년을  예전 봉수의 딸이 아닌 여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년이 후처자리를 박차고 고향을 뜰 때부터 수삼의 그윽한 눈길을 알아챘지만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법 긴 세월이 흐르고 나이도 먹을만치 먹었는데 언년을 향한  수삼의 마음은 달라진 게 없었다.

더구나 요릿집에 들어와 추근대는 남정네들이 있을라치면 작은 소동이 일곤 했다.

때로는 그게 고맙기도 했지만 형편상 필요한 융통성마저 내쳐서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곤 했다.

"내가 알아서 하니까 제발 나서지 말아요.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오지를 않잖아요.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요?"

"까짓 망하면 그만두면 되지. 그 더러운 놈들 꼴을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수삼의 과민한 행동에 요릿집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요릿집을 접고 수삼이 모르는 곳으로 떠날까를 궁리했지만 맨 몸뚱이로 집을 떠나올 때 객지생활 밑천을 마련해 준 옛날의 수삼을 떠올리면  다시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처음의 인연이 질기고 모질다는 생각에 언년은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그해 가을

늦은 영업을 마치고 언년이 수삼을 불러들였다.

늦은 밤시간에 언년이 부르자 수삼은 얼굴이 희색이 되어 들어왔다.

"어쩐 일이여. 자시에 낼 다 부르고."

언년이 차린 술상을 본 수삼이  눈이 희번덕해졌다.

"오래 살고 볼 거구만. 자네가  술상이라니. 어쨌든 간 좋구먼."

언년이 술잔에 술을 따르자 성에 차지 않았는지 수삼은 아예 주전자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뭔 일이여? 누가 또 개수작질 이여?"

한참 동안 수삼을 바라보던 언년이 살며시 일어나 저고리 끈을 풀었다.

언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술을 들이켜던 수삼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

"왜 일카나?"

수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천천히 속치마까지 벗은 언년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수삼에게 다가앉았다.

벌거벗은 언년의 몸을 본 수삼의 달아오른 얼굴이 마치 검불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한 가지만 약속을 해줄 수 있어요?"

"뭐.. 뭘 말인가?"

아까와 달리 수삼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 약속한다고 말해요. 꼭 약속한다고.."

나신이 된 언년이 수삼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자 수삼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 무신 약속인지 몰캐도 자네가 허라고 하니 글카지. 얙속하고 말구."

"아저씨가 제 몸을 그렇게 원하니까 오늘 밤 같이 자요. 그리고 내일 내 아들 학기가 있는 곳으로 떠난다고 약속해요."

" 무신 소리여. 내가 자네 아들한테 뭣 땜시 가능감.  그따구 소리 할라구 약속을 하라는 거야?"

대답 대신 언년이 천천히 일어나 풍만한 젖가슴을 수삼의 얼굴에 비비자 수삼이  모기소리 만하게 중얼거렸다.

"그려, 그려..그래야지."

끙끙 앓는 소리를 하던 수삼의 얼굴에  언년이  풍성한 아랫도리를 내밀자 수삼이 괴성을 내질렀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날 쌂아 먹을라고 작정을 했는가.  아이고.. 아이고."

두 손으로 언년의 커다란 엉덩이를 움켜쥐고 음부에 얼굴을 문지르던 수삼이 오줌을 눈 아이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작을 해대는 수삼이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언년이 수삼을 일으킨 뒤 살며시 몸을 눕혔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수삼은 미처 바지도 내리지 못한 채 언년의 몸뚱이에 올라 요동을 쳐댔다.

지난번 싸움판을 벌리던  이성을 잃은 그 모습이었다.

"아저씨,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잠깐이었다

언년의 붉은 입술과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며 방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수삼은 이내 축 늘어졌다.

************************************************************

언년과의 약속대로 수삼이 아들 학기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한 날 언년은 제법 큰돈이 들어있는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우선 이 돈으로 집  한 칸 마련하고 있어요.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집 만 있으면 뭘 먹고살라고?."

언년이 수삼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자 수삼이 얼른 꼬리를 내렸다.

"알았으이. 내사 뭔 힘이 있는감. 시키는 대로 혀야지."

예전의 수삼이 아니었다.

비록 무지한 산골사람이었지만 본시 마음이 여리고 순한 사람이라 그래도 말귀는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언년을 위해서라면 섶을 지고 불에도 뛰어들 사람이었다,

마지못해 몸을 허락한 언년이었지만 언년의 정성을 알았는지 그날 밤 이후로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언년의 말을 따랐다.

어쩌다 언년이 살풋하게 웃으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비비 꼬며 눈이 게슴츠레 해지곤 했다.

수삼이 학기가 있는 곳으로 떠나자 언년은 근방의 터를 금값으로 사들여 요릿집을 확장했다.

그동안 땅을 팔라고 수없이 매달리던 사람들에게 새자뜰 땅을 내놓고 흥정을 붙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큰돈이 들어왔다. 

땅을 쌌던 그해 가격에 다섯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 땅을 욕심내던 사람이 그곳에 규모가 큰 공장을 지었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그 땅을 산 사람은 금싸라기 땅이 넝쿨째로 굴러들어 왔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발 바람을 타고 언년의 땅뿐 아니라 근처의 땅들도 몇 곱절로 가격이 치솟고 있었다.

 돈을 불리는 방법을 몰랐던 언년에게 땅은 큰 위안이었다.

그것은 무슨 욕심이 있어서가 아닌 남의 전지나 부쳐서 간신히 목숨이나 부지했던 모진 시절의 부모와 죽기까지 당했던 괴로움 때문이었다.

땅을 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땅에 대한 사무친 원한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후처로 들어가 성 착취를 당했던 성 영감에게 복수를 하는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지만 햇간이를 버리고 온 죗값에 절름발이가 된 아들 학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길은 땅을 마련해 돌아가야 한다 원수 같은 생각뿐이었다.

그 고집은 죽음과 같아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용기도 희망도 없다고 여겼다.

어떻게든 땅을 사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언년의 고집은 개발 바람을 타고 검불에 불붙듯이 타올랐다.

미련한 수삼에게 몸을 허락한 것도 아들 학기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다

한 번 몸을 허락하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리라 내심 걱정했지만 수삼은 영판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을 이용해 먹고 있다는 생각에 언년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반년 가까이 공사를 한 끝에 제법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고 큰 돌 간판을 붙이고 나니 읍내에서 가장 큰 요릿집이 생겼다고 소문이 났다.

한양에서 제법 한다는 요리사를 불러 주방에 들이고 언년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주변에 쓸만한 음식점이 없는 데다 읍내 근처에 큰 석탄 광산이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떼로 모여들었다.

그해 말미에 식당옆에 챙을 달아 가건물을 짓고 중국요리를 하는 작은 가게를 또 하나 내자  장사는 일사천리였다.

근처 음식점에서 집을 무허가 지었다고 신고를 하는 바람에  관에서 조사를 나왔지만 걸판진 요리상에  주머니에 찔러 넣은 두둑한 돈 봉투에 콧등이 시큰해진 읍사무소 공무원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내뺐다.

이웃들은 물론 읍내 경찰서 직원들과 똥방귀깨나 뀐다는 읍내 유지들을  불러 모아  밤새 장구타령이 돌아가고 촌 동네에서 구경도 못한 인삼 보따리들이 따라붙자 언년은 어느새 읍내 유지가 되어 있었다.

"하이고, 보통 여장부가 아니구먼. 여자가 배짱이 보통이 아니야. 저만하니 저렇게 큰 요릿집을 하지."

이듬해 봄 읍내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 언년은 요리집 직원들을 대동하고 큰 술판을 벌렸다.

체육대회를 찾은 읍내 관공서 직원들과 선수들 그리고 촌부들에게 현장에서 뽑은 자장면과 얼큰한 짬뽕에 푸짐한 고기를 내어 놓자 난리가 났다.

때가 때인지라 걸판지게 먹는 거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짙게 화장을 하고 화사한 옷을 걸친 육덕진 언년이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나르자 동내 노인들의 입이 바소구리만 하게 벌어졌다.

"아이고야, 저 여사장 몸매가 아주 환장하게 만드는구먼. 저 여자가 나이가 몇인가? 허허, 하늘이 낸 사람이여."

체육대회 말미에 장구를 맨 허여 멀끔한 여인들이 운동장에 들어와 한바탕 돌아가며 혼을 빼놓자 처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아니, 저 많은 여자들이 어디서 왔는가? 요릿집 사장이 동네 사람들을 아주 홀리는구먼."

읍내엔 군수 이름은 몰라도 언년을 모르면 갑첩이라고 했다.

읍내에서 80리나 떨어진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비포장 신작로가 전부인 그곳에서 요릿집을 찾으려면 족히 한 나절은 걸려야 했다.

 

요리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언년은 요리집을 복덕방에 매물로 내어 놓았다.

"아니, 장사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로 일사천린데  왜 내놓는 건가?"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언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빨리 팔아 달라고 했다.

"저 여자가 갑자기 저러는 걸 보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게 분명 해? 그렇잖아 ,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술렁거렸지만 누구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고 달랬다.

잠깐사이 복덕방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몇 차례 오가기 바쁘게 매매가 이루어졌다.

서울에 산다는 제법 귀티가 나는 여인은 언년이 부르는 대로 한 푼도 깎지 않고 그 즉시 현금을 치렀다.

복덕방 영감은 입이 귀에 걸려서 횡설수설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울 여인에게 몇 번  귀띔을 했지만 자신도 오랜 간 영업을 해서 이 바닥을 훤히 꿴다고 했다.

잘 됐구나 싶었지만 언년은 왠지 깨름찍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거액을 받고 요릿집을 넘기긴 했지만 그 여인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할지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더구나 한 푼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돈을 치르는 그 여인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삼이 헐레벌떡 쫓아왔다.

그동안 수차례 큰돈을 보내 학기가 사는 동네 땅을 사들인 터라 수삼은 몸이 달아있었다.

" 잘 되는데 뭐땜씨 집을 판다는 거여?"

언년이 눈을 부라렸다.

"그냥 모른 척해요. 내가 생각이 다 있으니."

"내를 학기가 있는 곳으로 쫓가낸 게 이따구로 할라고 한 거여?"

" 땅 많이 사 드렸잖아요. 내가 도지를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자네가 없는데 그 땅이 무신 소용이고."

수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 이왕 기다린 거 저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요."

"다 늙어 빠지면 땅이 무슨 필요가 있남. 자네도 늙어 빠질 테구."

전과 달리 수삼은 쓸쓸한 표정이었다.

저 사람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구나 싶어 언년은 자신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먼산을 올려다보았다.

수삼은 약간 슬픈 표정으로 언년의 몸을 은근하게 바라다보았다.

오십 중반을 넘긴 몸이었지만 워낙 후덕한 탓에 언년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매를 하고 있었다.

요릿집을 하는 동안 언년을 향한 남정네들의 끈질긴 구애가 끝이 없었다.

음식도 음식이었지만 언년의 몸뚱이를 바라보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남자들이 많았던 탓으로 그때마다 매상이 춤을 추었다.

돈냥이나 굴리고 방귀깨나 뀐다는 영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은근히 속치마에 돈을 넣어주며 언년의 허벅지라도 주무르려고 안간힘을 써댔지만 그때마다 언년이 영감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요리를 하는 바람에 영감들은 더욱 몸이 달았다.

그중 서울에서 유학을 하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퇴직한 송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은 다른 노인들과 달리 고단수였다.

절치부심 언년이었지만 고무줄처럼 당겼다 놓았다를 기가 막히게 해 대는 송 노인이 비루하게 살아온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생각에  깜빡 넘어가 그만 하룻밤을 허락하고 말았다.

비록 장사치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몸을 허락했지만 송 노인은 이미 생물학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허부덕 대며 괴상한 신음을 토하던 송노인은 언년의 몸을 몇 차례 더듬으며 끙끙대다가 거품을 물고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비록 고령의 노인이었지만 평소의 언행으로 보아 나름의 강단이 있을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송 노인은 한 마디로 탈보 허당이었다.

언년은 평생 처음 남녀 간의 이짓이 비참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모진 세상 굳은 심지로 당차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한 사람의 여자였구나 싶었다.

조용하게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송 노인이 이제부터 언년이 자기 여자니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둥 입을 함부로 놀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이고 벼슬이라고 여겼는지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언년을 불러내 노골적으로 입을 놀렸다.

참다못한 언년이 송노인을 불러 넌지시 타일렀다.

"학식이 높은 어르신이 저 같은 사람을 그렇게 다루시면 어르신 품격이 낮아집니다. 제가 여전히 존경하는 마음이니 저를 어여삐 보아주세요."

그 정도 말하면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았지만  송 노인은 자신의 이력과 달리 형편이 없는 사람이었다.

"술이나 팔고 몸뚱이를 마구 놀리는 년이 나한테 그따위 훈계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보지? 자고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거지. 격에 어울리지 않는 그따위 아가리 놀리지 말고 오늘밤 잠자리나 들어. 알아 먹었지?"

언년은 몸을 버린 것보다 몸과 마음을 허락한 한 여인을 그 정도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노인이 한심하고 불쌍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한결같진 않아서 그 사람이 지닌 학식과  품성을 단 시간에 사막의 모래알처럼 흩어놓는 망령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사달이 났다.

송노인의 처가 소문을 듣고 요릿집으로 득달같이 쫓아와 언년의 머리채를 잡고 갖은 욕지거리를 퍼붓더니 마침내 구정물까지  쏟아부었다.

종업원들이 나서서 뜯어말리는 바람에 끝이 났지만 송노인의 처는 동네가 떠나가라 악다구니를 쳐 댔다. 

도도하리만치 떠들던 송노인은 그 광경을 보고 꽁지가 빠지게 내뺐다.

이제 이 짓도 그만 두리라.

요릿집을 팔겠다고 내놓은 건 그 한순간이었다.

**************************************************************

학기가 혼기가 지나 마흔 줄에 가까워오고 있었다.

언년이 몰래 마련해 준 땅에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학기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수시로 수삼을 불러 닦달을 한 연유도 있었지만 동네에 자신의 처지가 들통아 날까  불안했는지 일절 입을 다무는 바람에 십 년이 가깝도록 언년과의 약속이 지켜지고 있었다.

수삼은 언년이 시키는 대로 학기가 매년 받치는 도지를 모아 통장을 만들었다.

그간 십여 년이 흘렀으니 통장에 쌓인 돈이 제법이어서 땅 마지깨나 마련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어서 이대로라면 몸이 성치 못한 학기의 앞날은 보나 마나였다.

평생 농사나 짓다가 생을 마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연년은 가슴이 탔다.

언년이 평소 눈여겨 둔 여자가 있었다.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심지가 곧고 얼굴도 그만하면 보아줄만 하고 무엇보다 몸이 후덕해 언년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였다.

내심 학기의 짝으로 맺어 주고 싶었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욕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터라 속으로만 애를 태우고 있었다.

요릿집을 할 때부터 데리고 있었으니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모자란 학기를 도와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욕심이 커졌지만 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한 것은 미안함 때문이었다.

한 여인을 자신의 욕구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자격지심과  불우했던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망설여졌다.

새로운 사업을 궁리하고 있던 언년이 어느 날 그녀를 불러 들였다.

혼기를 놓치기는 했지만 영순은 그래도 처녀의 몸이라  한창 피어나는 봄꽃 못지 않았다.

"어쩐 일이세요. 저를 다 부르시고."

"응, 그냥 같이 차 한 잔 나누고 싶어서."

"저야 고맙지요. 그동안 사장님이 잘 대해 주셨는데."

"혼기가 넘었는데 어떻게 시집은 가야지?"

"사장님이 제 형편을  잘 아시면서.. 시집은 저 혼자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영순이처럼 괜찮은 사람이  부모가 없다고 시집을 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영순이 살며시 웃었다.

"말씀은 참 고마운데 저 같은 사람을 누가 데려가겠어요?"

언년이 은근하게 영순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보내 줄까?"

영순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말요? 그냥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저는 더 이상 욕심이 없어요. 살림을 차릴만한  돈도 없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지 않아, 영순이 너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얼굴 예쁘지, 몸 좋지, 무엇보다 마음씨가 곱잖아."

"제가 오늘 비행기를 타네요. 갑자기 그러시니 어지러워요. 평소 사장님 같지 않아서 겁이 나는데요."

발갛게 달아오른 영순의 얼굴이 복사꽃 같았다.

언년은 그윽한 시선으로 영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고운 얼굴을 닮은 손자를 안아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손자를 데리고 산보를 나가리라.

고운 옷에 갖은 장난감  바리바리 들여서 손자 얼굴에 한시도 웃음이 떠나가지 않게 하리라.

며느리 손톱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고,  봄에는 꽃놀이 가고, 여름 한 철  시냇가에서 목간이나 하다가 보내고 , 가을에 온갖 열매를 선물하리라.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까?

이만큼 살았으면 모진 세월도 내편을 좀 들어주리라.

저 복스런 영순을 내게 선물로 보내리라.

더럽게 벌었어도 영순에게 정승같이 쓰면 되리라.

하지만...

내가 이런 욕심을 부리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성영감에게 후처로 들어가 빌어 먹었듯 저 꽃 같은 아이를 내 욕심의 재물로 생각하다니.

언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얼굴빛이 좋지 않아요."

영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언년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저기, 평소에 네가 꽃가게를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지?"

"그냥, 욕심이지요.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아니야. 영순이가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좀 있을 테고 내가 보태주면 안 될까?"

"에이, 사장님 저 놀리지 마세요."

영순이 도톰한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이라니까. 내가 어디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갑작스러운 말에 영순이  언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 그만 가 볼게요. 차 잘 마시고 오늘 제게 해 주신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기분이 좋아요."

언년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살피던 영순이 얼른 일어났다.

"꽃집을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영순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가자 언년은  남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서늘해졌다.

*********************************************************

 

동네 좀 괜찮다는 땅을 모두 사들인 사람이 읍내에서 요릿집을 했던 여사장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누가 그따구 말을 지껄여쌌나. 지들이 봤어? 어딴 놈이 그런 아가리를 벌리고 다니는 거여."

"동네에서 땅만 나왔다 하면 땅 값부르는 대로 싹쓸이를 하는 거 다 아는데 뭘 못 봤다고 그래."

"그 땅 농꾼은 낸데 내만큼 아는 놈 있간?  지대로 알지도 못하구 나발 불고 댕기다 걸리면 국물도 없지."

수삼이 두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허, 수삼이 자네 참 이상하네. 땅 칠십마지가 넘는 걸 자네가 마카 쥐고 흔드는데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당연하지 않나?"

"어짰든 그따우 씰데없는 아가리짓 말더라고."

성영감집에서 머슴살이를 같이 했던 영태는 어느 날부터 지주노릇을 하는 수삼이 눈꼴셨다.

자신의 처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뭇짐이나 해다 팔아먹던 수삼이 어느 날부터 동네방네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꼴이 참으로 요상하다 여기던 참이었다.

더구나 동네에서 괜찮다고 알려진 땅 열댓 마지기를  절름발이 학기가 부치고 있는 데다 학기가 내놓는 도지가 소출의 반에 반도 안 돼서 모두들 불만이 많았다.

"그렇잖여. 수삼이 자네가 누구한테 붙어서 글카는지 몰라두 학기 저 빙신한테 받는 도지가  우리가 내는 거랑 차이가 너무 많찮어."

"쬐끔 받든 말든 그건 내 맴이지  왜들 지랄이여. 고렇게  배가 아프면 때려치워. 목마른 놈이 땅 파는 거지 무신."

"수삼이 자네 너무 그러는 거 아녀. 절름발이 학기가 몰래 낳은 아들이라도 되나. 그 빙신을 왜 싸고도는데."

발끈한 수삼이 영태 멱살을 거머쥐었다.

"이제 봉께 네놈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구먼. 묵은 정 보그로  요번은 참는데 까불지 말어. 그러다 나한테 지대로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가뿌린다."

수삼이 아랫도리를 탁탁 털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얼굴이 벌개진 영태가 냅다 침을 뱉으며 수삼이 피워 문 담배를 낚아챘다.

"이놈아, 니나 나나 도찐개찐인데 어디서 얻어 처먹는지는 몰라두 나대지 말어.  객사하지 말구."

담배를 빼앗긴 수삼이 양팔을 허리에 얹고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야, 무식한 놈아, 니 여자 팔자 두레박 팔자라는 말 들어는 봤냐?"

수삼의 담배를 빼앗아 피워 문 영태는 멍하니 앞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임마, 내가마 지금 두레박 팔자가 됐다고. 옛날 성영감 밑에서 빌어 먹던 그지가 아니란 말이지.

하긴 빗자루 질이나 해먹든 놈이 내 말을  알아처묵기는 하겠냐."
수삼이 길가 돌멩이를  냅다 걷어차고 나가자 부아가 치민 영태가 소리를 질렀다.

" 에이, 더러운 놈의 세상. 비나 콱 쏟아져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허리가 한 줌밖에 안 되는 검둥이가 영태에게 달려들며 꼬리를 쳤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영태의 발길질에  냅다 얻어걸린 검둥이가 쇠가 갈리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대문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내 팔자가 똥개만도 못해? 저 더러운 놈 꼴 보기 싫어 이 동네를 뜨덩가 해야지."

 

3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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