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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단편24

벌말이 윤가는 그 방법 말고는 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 마지기나 있던 걸 다 털어 올리고 광에 숨겨 두었던 종자까지 모조리 섰다판에 패대기를 친 마당이었다. 동네 건달패들이 허가 놈 사랑채에 죽치고 앉아 오줌보를 지리자 윤가 눈치를 받은 달식이 재빨리 허가 놈 외양간에 매인 어이새끼를 몰고 여우재로 줄행랑을 쳤다. 허가 놈 어이새끼래야 애시당초 달식의 외양간에 매였던터라 소경 제 닭 잡아먹기였다. 허가 놈 여편네가 보기는 했으나 여간 덜 떨어지지 않아서 암까마귀 숫까마귀 보는거라고 여겼다. 문경장으로 달음질을 친 달식이 뭉칫돈을 들고 허가 놈 사랑채로 들여 닥치자 윤가는 엎어져 자고 있었다. "우예 된거여?" "개평 신세지. 동태눈깔 보면 몰러?" 달식이 윤가옆에 슬그머니 앉자 허가놈이 채근을 했다. "콧.. 2016. 2. 25.
어디선가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이내 끼익 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노인은 기차를 타고갈 때 나는 그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을음을 뒤집어 쓴 벽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미 깨었던지라 아까부터 무심하게 돌아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윗목에 신문으로 덮어 두었던 국수그릇을 당겨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자 이내 한기가 몰려왔다. 어제저녁 입안이 깔깔하여 몇 술 뜨지 못하고 밤참거리로 가져온 국수는 반 그릇이 한 그릇으로 불어 있었다. 아무래도 간장을 좀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 방바닥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 노인이 국수 그릇을 들고 발바닥을 끌며 부엌으로 나갔다. 난방이 되지않는 부엌은 며칠간 날씨가 지정거린 탓인지 음습한 냉기가 감돌았다. 대강의.. 2015. 11. 26.
반쯤 탄 연탄이 검붉은 빛으로 밭가에 널브러지고 이내 거의 다 닳아버린 연탄집게가 방망이질로 타 다남은 연탄을 두들겨댄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풍경을 멀그러미 바라다보는 시선들이 또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는 표정이다. 어제 먹다남은 새우젓에 물 한 컵 데우면 족할 아침상은 일그러진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무표정하게 앉아있다. 낡은 비료푸대로 얼기설기 떠받쳐놓은 손바닥만 한 천막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오자 영감은 덤덤하니 일어나 쪽문을 닫는다. 고등어를 굽는 비릿한 냄새가 들어오면 급할 것도 없다. 소금덩이나 진배없는 쩐 새우젓 냄새보다는 나으니까. 삐끔 이 문을 열고 고개만 젖혀도 쪽방 문으로 내다보는 심심한 시선들이 같은 방향이거나 반대방향으로 도리질을 몇 번 하고 나면 그만이다. 고등.. 2015. 10. 23.
돌아오지 않는 봄 *동자꽃 횡성을 지나자 곧바로 비포장이었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어물짐보따리들이 실리는걸로 보아 오늘이 횡성 장이었다. 사가는건지 팔다가 못 팔고 가는건지 강아지가 낑낑 대더니 장탉이 몇마리 푸드덕댔다. "그거, 버스에 탱구면 안된다고 했잖유. 아, 이양반들 말 드럽게 안들어쳐먹네." "얼마 안가면 내릴낀데 좀 싣고 갑시다." "이게 사람타는 버스지 우마차요? 마카 내려유." 왁자지껄한 소리로 소란이 일었지만 처옥은 아까부터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발령을 받고 이곳에 올때만해도 설마 했었다. "거기도 사람사는데야. 아뭇소리 말고 몇 년 견디면 다 요령이 생긴다." 교감을 끝으로 학교를 떠난 아버지는 망설이는 처옥의 등을 떠밀었다. 시골 국민학교로 첫 부임을 하던 날, 횡성을 올때까지만 해도 .. 2015. 3. 18.
門間房 영월댁은 휴지통에 커다란 휴지뭉치가 자주 나오자 아들 정호를 닥달했다. 혼기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백수였다. 타작 마당에 집북더미 같은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조금만 다가서도 꼬릿한 냄새가 풍겼다. "이놈아, 웬 휴지는 그렇게 많이 써. 뭘 하기에 뭉텅이로 써재키는거냐구." 정호는 자다 깬 얼굴로 멀그레미 영월댁을 쳐다 보았다. "나 아니예요. 그놈이지." 아들이 귀찮다는 듯 돌아 누우며 매가리 없이 말하자 영월댁은 마루를 쓸던 빗자루로 정호 등짝을 냅다 후렸다. "아파. 내가 어린애야?" "그놈이 니놈이지, 어느 놈이라는거여?" 정호가 발가락으로 바깥을 가르켰다. "해가 중천이여. 봄이다 봄.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좀 쓸어." 마루를 훔치던 영월댁이 속풀이라도 하듯 구정물을 휘하니 마당으로 내어 쏟았다. "저.. 2015. 3. 5.
안개 비탈밭을 갈기 위해선 별수 없었다. 쑤셔 박힐 것만 같은 비탈밭은 반나절이면 될일을 종일 매달려도 시원치 않았다. 겨우내 놀고먹었는데도 생 볏짚만 주어서인지 쇠 잔등 뒷태가 암팡지지 못해서 보구레 를 끌고갈까 싶었지만 이웃 송가네 놈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그랬다. 듬성 듬성 낙엽송을 심어놓긴 했지만 워낙 땅심이 좋은곳이라 콩이나 팥 을 부치미 하고 처삼촌 벌초하 듯 한 두번 북 만 주어도 가을거두미가 제법이어서 여전히 미련이 남은터였다. 쇠먹이도 그랬다. 바깥 갯가풀은 동네놈들이 워낙에 극성이어서 게으른 놈은 차지를 못했다. 납작골은 콩 팥도 그렇거니와 워낙에 쇠꼴이 보기 좋았다. "이자는 낭구를 심었으이 그만 부치거라." 잔소리를 그만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앞마당을 나서는 노친.. 2015. 2. 28.
남풍은 두 번 불지 않는다. 희뿌연 하늘에 그믐달이 멋 적게 하늘을 가르자 봉식은 재빨리 지게를 지고 봉당을 나섰다. 저녁내 들이킨 밀주가 안 그래도 거북한 속을 뒤집었지만 상관할 처지가 아니었다. 싸락눈이 점점이 눈썹을 간지럽히더니 이내 웅크릴 만큼 쏟아졌다. "저녁에 강가 놈만 오지 않았어도." 미처 익지도 않은 밀주를 마누라 몰래 퍼 온 강가 놈과 야반에 걸쳐 모두 퍼 마신 게 속에서 부아를 질렀다. 낮은 강냉이 섶이 오다가다 보이는 좁은 밭길을 짐작으로 걸어 나갔다. 검은 구름 사이로 들락거리는 있으나 마나 한 달빛이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급하게 신고 나오느라 신발이 바뀌었는지 아까부터 뒤꿈치가 저렸지만 동이 트기 전에 장 서방에게 강냉이 말이나 져다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가빴다. "어디였더라? 그래 , 키가 큰 강.. 2014. 10. 19.
첫사랑 1975년 4월초순무렵. 나무를 심기 위해서 아버지와 나는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강원도 산골짝마다 화전민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목상(木商)을 하셨기 때문에 일을 하시면서 여기저기 버려진 화전이나 쓸모없는 벌거숭이 야산을 사들였다. 사들였다기 보다는 받지 못한 벌목 대금이나 공사비용으로 대신 받은게 더 많았다. 그때는 전답을 우선으로 알고 산은 당장의 소득이 없었기에 땅값은 형편이 없어서 평당 10원에서 많아야 100원 정도였다. 요즘이야 산의 가치가 좋아 투자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산은 화목이나 채취하고 산나물이나 뜯는 정도로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국가에서도 치산녹화 사업을 벌리던터라 나무를 심게 되면 묘목이나 비료등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고 경제.. 2012.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