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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단편24

야반도주 * 봄날 꽃잎이 지지 않았다면 사랑도 그리움도 지겨웠으리라 산골 다랑논 열 마지기래야 열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하늘바라기 천수답은 용하디 용한 봄비 덕으로 용케 모내기를 한다 해도 활착을 해서 가지치기를 하기란 놀부네 마누라에게 밥사발 얻어걸리기보다 더 어려웠다. .. 2018. 5. 2.
만덕이 갑작스러운 전화에다 만나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했을 때만 해도 반가운 마음만 앞섰다. 살다 보니 이럴 때도 있구나 싶었고 이제 적잖은 세월도 흘렀으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것은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요즘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정작 비밀이 보장되어야 할 은행이나 기업 보험사 등에서 개인의 신상정보가 한 겨울 눈 날리듯 온 사방에 뿌려지는 세상이니. 서둘러 일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나가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허구한 날 유니폼만 입으니 평소의 옷차림에 감각이 떨어진 탓인지 어떤 걸 입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왜 옷차림에 신경을 써요?" "왜,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요?" "그런 게 아니라.. 2017. 12. 4.
순정이 * 그녀는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숙일 때 마다 풍만한 그녀의 둔부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치렁치렁한 그녀의 머리가 허리로 흘러내리자 감나무 뒤에서 그녀를 훔쳐보던 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가지에 물을 퍼 담아 여기저기 뿌리며 장난질을 하던 그녀가 무심코 기석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기석은 기절할 듯이 놀라며 나무 뒤로 주저앉았다.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두 손으로 문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기석은 이대로 죽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죽을 수만 있다면. 감나무를 잡고 일어서자 현기증이 일었다. 감나무 잎 사이로 얼굴을 묻고 천천히 쓰다듬듯 눈을 뜨자 그녀의 모습이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나비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우물가에 핀 코스모스를 따서 머리에 꽂고 있었다. 이리저리.. 2017. 11. 29.
파란초등학교 3 간단한 술자리가 끝나고 구들방에 누웠다. "오랜만에 오신거지요?" "그렇게 됐군. 여기를 떠난 지 벌써 40년이라는 걸 오늘 오면서 알았지." 삼락이 이불을 더 내려왔다. "그런데 말이야. 제법 긴 세월인데 길게 느껴지지 않아. 여기 누우니까 엊그제 같아." "선생님께 수업을 받았으니까 저 역시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그런데 자네는 왜 여기를 떠나지 못 하나?" "그냥요. 다른데 가도 달라질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눌러 앉았지요." "하긴 , 자네가 남아있으니 내가 오는 거지 . 한편 고마운 일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만 쉬시지요." 삼락이 전등을 내리고 공 선생 옆에 눕자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희미하게 불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동안 교직에 계셨는.. 2016. 12. 26.
파란초등학교 2 서울로 수없이 다니던 후미진 산골 신작로는 어느새 포장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수업을 끝내고 기다리던 주말이 왔지만 덜컹거리는 자갈길에 버스를 타고 가기가 겁이 나서 집에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삼락을 따라 개울가에 보쌈을 놓으러 갔는데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놋그릇에 엄지손가락만한 퉁가리들이 그득하게 들어있었다. 여차하면 쏘아대는 퉁가리에 면역이 되었을 무렵 공 선생은 퉁가리 회 맛에 이력이 나 있었다. "중이 고기맛을 들이면 절간에 빈대도 남아나지 않는다는데 어쩌려 구 그러신데요?" "뭘 어째, 자네가 끝까지 책임지면 되지." 공 선생은 주말에 서울로 올라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못 마시던 술도 제법 늘어서 퉁가리나 꺽지 회를 먹는 날이면 비워내는 소주병이 제법 되어서 어느 날 삼.. 2016. 12. 19.
파란 초등학교1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참을 만했던 음산한 하늘은 기어이 흰 가루를 쏟아냈다. 공 선생은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만 내려준다면 한 시간쯤 뒤에는 분명 다른 세상이 되리라. 찻잔 마주한 백설 분분한 풍경과 또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은 물론 자신의 복잡한 심정도 잠깐이나마 감출 수 있겠지. "에이, 갑자기 웬 눈이야.귀찮게 시리." 시장바구니를 주방에 내던진 아내가 부리나케 이층으로 올라갔다. 한때 여린 꽃잎 같은 감정으로 어떻게 거친 세상을 살아갈까를 염려하던 여자였다. 세월은 그녀를 장부로 만들었고 초로의 자신은 그때 느꼈던 여린 꽃잎으로 변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 "여보, 이 옷 어때요?" 아내는 무슨 짐승가죽인지는 몰.. 2016. 12. 19.
晩秋****방앗간 집 딸들 *출처: daum 통기타와 청바지, 거기에 보태 나팔바지가 인기를 끌던 70년대 동네 복판에 떡 방앗간이 있었다. 떡은 물론이고 들기름 참기름을 짜고 곡식도 갈아주는, 요즘으로 본다면 동네 유일한 생활 서비스센터였다. 지금이야 전기모터로 모든 일을 해결하지만 당시엔 발동기가 기계를 돌리는 심장 역할을 했다. 1 행정 발동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아서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그런데 이 떡 방앗간은 동네 총각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떡 방앗간을 운영하는 주인이 20대 앳된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방앗간을 운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방앗간을 운영하던 아가씨의 부친이 큰 병을 얻어 몸져눕자 어깨너머로 바라보던 두 딸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 2016. 11. 22.
공순이 수호는 날건달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이라곤 공사판 날일이 전부였다. 한창바람 때는 목돈을 제법 쥐었으나 주색잡기가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손에 잡히기 바쁘게 타작마당 검불같이 날아갔다. 늦가을이 되면 일감도 줄어드는지라 느는 게 담배와 술이라 공사판 함바집 밥값도 그러려니와 구멍가게 외상값 채근도 성가실 지경이었다. "아, 원제 줄 거야? 젊은 사람이 미신 놈의 셈이 그리도 질긴 거야?" 아니나 다를까 수호 면상을 보기 바쁘게 구멍가게 장 씨가 입을 내밀었다. "내 참 드러워서. 안 떼먹을 거니까 걱정일랑 붙들어 매쇼." "보더라고, 고것이 지난봄에 처마신 술값이여. 뭘 알기나 하고 씨부리는 거야?" 장 씨가 삿대질을 하자 수호는 가래침을 냅다 뱉고는 휘하니 달아났다. 이미 가을이 깊은지라 고층 아파트에.. 2016.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