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습작단편

목 (2)

by *열무김치 2023. 7. 23.

확신에 찬 공 박사의 말을 듣자 신 교수는 그가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코흘리개 친구로 십 수년을 함께 뒹굴다가 긴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만난 고향 친구가 거부가 되어 있다든지 고관대작으로 변신하여 갑자기 마주쳤을 때,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분명 옛날 친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봐, 얼굴 표정이 왜 그래?"
신 교수가 유리컵에 물을 따라서 급하게 마셨다.
"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봐."
마땅찮은 표정을 한 공 박사가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아직 학계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지. 자네에게 처음 말하는 거야."
"허, 이 사람 내가 뭐라고. 난 이 분야에 문외한이 아닌가.
그런 내가 들을 귀가 있어야 이해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아, 그런 건 상관없고, 그냥 듣기만 하면 되네. 자네가 이해를 할 필요까지 없지."
무시하는 듯한 말에 신 교수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자신에게 연구 결과를 처음 밝힌다는 공 박사의 말에 일 면의 고마움을 느꼈다.
"자네가 문과 출신이지만  물리학 쪽에 아주 젬병은 아니니까 내용을 비틀어 말하면 좀 쉽겠군."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줄여서 말하게나."
공 박사가 작은 흑판을 끌고 나왔다.
"그냥 말로 하는 거보다 이게 더 나을 거야."
서성거리던 신 교수가 앉자 공 박사가 전자펜을 꺼내 들었다.
"자네 혹시 지적설계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그 얘기는 종파에서 꽤 오래전부터 나온 얘기지.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얘기 아닌가?"
"꼭 그렇지 만은 않지.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세를 불리고 있다고 봐야지."
"그런데 , 그 얘기는 왜?"
한동안 입을 다문 공 박사가 가운을 벗고 신 교수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나 우리의 몸이 전기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일맥상통한다는 건 이쪽 분야의 사람들에겐 아주 시시한 이야기지만 현대 문명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학계의 부르주아들이 이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돈 되는 일이 아니니 자기들만의 고유 영역쯤으로 개무시한다는 거지."
신 교수가 휴~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아니 무슨 얘긴데 그렇게 서론이 길어?"
"자, 어린애처럼 보채지 말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 보게."
신 교수가 입맛을 다시자 공 박사가 성경책을 꺼내왔다.
"자네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관해 몇 번이나 들어 보았나?"
" 연구 결과를 말한다고 붙들어 앉혀 놓더니 갑자기 무슨 종교 얘기야?"
"자네가 오랜 간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웬 정색은.."
신 교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공 박사가 사탕을 불쑥 내밀었다.
"입안이 쓸 때는 박하사탕이 갑이지. 두 어 개 까서 넣어 보라고. 기분이 훨씬 좋아진다니까."
"이 사람, 아주 날 가지고 노네. 그래 천지창조 얘기는 왜 하는데?"
공 박사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신세대들이 질문하는 천지창조나 지구 나이에 관해 뭐라고 대답할까.
절대 신께서 엿새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다고 하니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6일은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구절을 핑계로 6,000년이라고 우길까?
아니면 다른 비밀이라도 있을까? 좌우간 신학자 들나 성경을 경전으로 받드는 종교인들이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할 수가 없어. 왜 그럴까?
한 마디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수박 겉만 핥아대는 무지 때문이야.
나는 연구를 위해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이 인간의 의지나 두뇌로 쓰인 책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네;"
신 교수가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자네가 그런 면이 있었어? 이거, 놀라운 일이야.
그 말을 듣고 나니 흥미가 생기는군. 계속해 봐."
"문명이 발달할수록 창세기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니까 시비를 걸어야 먹고사는 전문가라는 놈들이 그냥 있을 리 없지.
사실은 문명과 동떨어진, 말하자면 동굴 여기저기에 나 뒹굴던 구전이나 문서 조각들을 모아다가 그럴듯하게 이어 붙인 신화 조각이라고 떠들어 대는 거야."
신 교수가 풋~하고 웃었다.
"구미가 당기는 논리인데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거 아닌가? 심각한 척은 다 하더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 얘기가 자네 연구와 상관이 있나?"
의자에 앉았던 공 박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짐승이 우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자네가 알아듣기 쉬우라고 지금 최선을 다해 말하는 걸 못 느끼나?"
수시로 변하는 공 박사의 태도에 신 교수는 공포감을 느꼈지만 연구 논문과 하등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천지창조 얘기에 묘한 충동이 일었다.

***********************************************************

 

학창 시절 공 박사는 늘 혼자였다.
그의 성격이 내성적이라는 걸 후에 알았지만 지나치리만큼 교우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 무표정하게 앉아있거나 혼자 다녔고 말을 걸어도 여간해서 응대하지 않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의 아버지 이력이었다.
그의 부친이 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학교 측에 거액의 기부금을 수 차례 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그의 집안이 투영되면서 외톨이로 지내는 그의 사생활과 상관없이 그는 교내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금권의 힘은 생각보다 크고 놀라웠다.
교정을 지나는 그를 바라보는 학우들의 시선은 전과 달리 완전히 변해 있었다.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쯤으로 여기던 시선이 문구멍을 뚫고 신혼방을 훔쳐보는 관음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친구들은 언쟁을 벌였다.
"야, 저 친구 혹시 뒷 배가 든든한 전형적인 에이징 솔로 (aging solo)로 가는 표본 아니냐?"
"허, 그렇게 따지면 지금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하고?
입장만 다를 뿐이지 너나 나나 금수저 집구석이 아니어서 미래가 없다는 건 똑같지 않냐."
"그건 아니지, 내 물리적인 행동반경이 서기 2300년대 표준 이상이라고 여기거든."
"그게 무슨 개 뼈다귀 같은 소리야."
"그러니까, 공 친구 저 녀석이 자기 말고는 세상이 모두 시시한 거야.
자기 외에는 주변인들이 백정이나 카스트의 불가촉천민쯤으로 느껴져서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 거지."
"하긴, 그 아비 놈이 떴다 하면 뿔테 안경에 조신한 척하는 학장 놈들도 같은 과지."
"뭐, 그렇다고 해도 뒷배가 든든한 저 녀석에게 대들 친구도 없고 , F학점을 맞는다고 해도 교수나 학교 측 의 꼬락서니를 보면 참.."
"따지고 보면 우리가 더 한심한 족속들이지. 험담이 까고 있으니.
그런데, 너는 저 친구와 좀 가깝지 않냐?"
"그러면 뭐 하냐. 그 똘뱅이가 눈에 힘주고 째려보는 데.. 에이, 참 더러워서."

교정에 낙엽이 지고 있었다.
졸업이 멀지 않았지만 나는 심한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러 군데 지원서를 넣고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신통한 답변은 없었고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입대 일자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하는 부모님은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해서 동생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문과 졸업생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취업을 위해 뛰면서 알게 되었다.
평소 데면데면 지내다 가까워진 미대에 다니는 지우는 군대에 다녀와서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오빠 정도의 스펙이면 알아봐 주는 곳이 있을 거야. 게다가 훈남이잖아."
지우는 헤어질 때마다 주머니에 파란 지폐를 찔러 넣으며 볼 에다 입맞춤을 했다.
몇 번 거절을 했지만 이곳저곳을 알아봐야 할 주머니 사정이 바닥인 나로서는 뾰족한 방법도 없어서 못 이기는 체 받아썼지만 가슴은 새 가슴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늦가을 비가 추적거리는 휴일에 지우를 불러냈다.
"오우~ 오빠가 어쩐 일이야. 오늘같이 가을비 내리는 날에 만나니까 아주 센티한데."
환하게 미소 짓는 지우를 보자 입안이 까끌거리고 입술이 말랐다.
"왜? 무슨 좋은 일 있어? 오빠가 이렇게 불러 내는 일 거의 없었잖아.
오~ 드디어 취직했구나. 맞지?"
대답 대신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자 지우가 슬며시 팔짱을 끼었다.
"아이,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어?"
"지금까지 너도 봤지만 좋은 일이 있기는 했어? 매일이 이모양이잖아."
"왜 자학을 해. 오빠가 어때서. 오빠, 그러지 말고 아빠에게 부탁을 해 볼까?"
지우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실눈을 뜨고 웃었다.
"나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어디 갈 데가 없어서..."
"난 오빠만 좋다면 그런 거 신경 안 써."
"어쨌든 그런 얘기 다시는 하지 마."
지우는 그 후에도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건넸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나는
결국 어느 곳에도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입대를 하고 말았다.

 

3편으로..

 

 

'습작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화골의 전설 2  (4) 2024.02.16
봉화골의 전설 1  (1) 2024.02.15
고양이 무덤 (2)  (4) 2023.07.05
고양이 무덤  (0) 2020.02.11
목 *  (0) 2018.05.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