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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331

봄 이야기 2 봄, 그리고 밥맛 없는 날 여태 기다린 봄 잔설 녹아내린 골짜기로 흐르다 털면 먼지만 나는 겨울 주머니에 찾아들다 보내고 맞는 봄 입성도 변한다고 손바닥 같은 심사 한 나절 변덕에 촉촉한 봄비 동냥이 겸연쩍다 가슴에 숨겨둔 겨울 옹아리들이 살구꽃 복사꽃으로 쏟아지면 고루한 삶이 튀어나와 불을 지르다 귀를 간지럽히는 바람아 꽃은 그때로 피고 내도 어제로 흐르는데 너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건지 갚은 건지 않은 건지 흐릿한 외상값처럼 다소곳한 입맛이 공연하게 트집을 잡는 봄 날 미처 얼굴도 내밀지 못한 달래를 캐다가 분풀이를 하다 백옥 피부에 조선간장 반 숟갈 들기름 한 숟갈 밀 밭 혼미한 정사를 치르듯 섣부르게 비벼 눈 치켜뜨고 하품 인양 퍼 먹다 멀어져 그리우면 밀었다 당겼다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 2024. 3. 11.
봄 이야기 1 그 봄날의 벤치 이름 모를 곳을 지나다 양지가 내미는 손짓에 다가 앉은 벤치 뭇 나그네가 남기고 간 낯선 온기가 여기 당신이 앉을 차례라고 인연은 얼음 밑을 훑고 지나는 여울 내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위해 겨우내 그렇게 흘렀더니 표정 없는 벤치도 그랬다 봄이 꾸어온 몇 줌 볕이 살그머니 깔아 놓은 온기에 앉아 빈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긴 한숨으로 들여 마신 하늘 먼 그날을 지나와 이곳에 닿아 스쳐간 사람처럼 해를 더하는 내귀에 닿으라고 가녀린 봄에게 시비를 걸다가 무심히 덮는 눈커플 아지랑이가 턱을 괸 그 봄 날의 벤치에 일곱 살 아이가 앉아 졸고 있었다. 딸기 뜰 윤창환 연인의 입술이 붉어야 할 까닭이다 떨리는 입맞춤이 달콤해야 할 까닭이다 실팍한 엉덩이와 가녀린 허리를 보듬고 안아야 할 까닭이다 .. 2024. 2. 14.
담벼락 담벼락 아무도 오지 않았어 십 오 년 전인가 멀쩡한 울타리를 허물고 불럭을 쌓더라 싸리나무 울타리 여름이면 나팔꽃이 바락바락 기어올라 해맑게 웃고 가을 그 녀석이 데려온 고추잠자리도 꼴 값을 떨었지 초승달이 빼꼼이 걸린 섣달 고뿔이 주저리 주저리 매달려 아련한 봄 꿈을 꾸었는데 못되 먹은 영감탱이 해거리 담장이 귀찮다고 쫓아낸 나무 울타리 덕지덕지 바른 시멘트 담벼락보다 먼저 가버렸어 지난해 늦가을 앞집 등 굽은 할마씨가 해 먹은 호박죽일 거야 윤사월 담장 밑에 뾰족이 올라온 그 녀석을 파내 버리려다 그래 너도 살겠다고 나왔지 에라, 인심 썼다 여름 내 곡간 골방쥐처럼 들락거리다가 지난달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니, 눈알 번쩍하는 거 횡재수 같은 거 평생 한 번은 있다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머리.. 2024. 1. 7.
눈사람 눈사람 정 이월 혹한 눈물을 뭉쳐 보름달 빚고 사 나흘도 가지 못할 미소를 새기다 북서풍 속내 둥글게 감싸 안으면 나직히 손 내미는 머나먼 나라 안녕 동구밖을 내 닫던 소년이 달려와 하얀 마음 파란 나라로 뛰어가고 아지랑이 들녘 나물 캐던 소녀가 단발머리 무명 치마로 살포시 안기다. 2024. 1. 5.
찔레 기쁨 슬픔 미움 그리움을 꾸지람 한 번 없이 잠재우는 방법 쓸쓸한 들판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 찔레 가을이 달아 놓은 빨간 등불 겨울 초병으로 뽑혀 근무 중 한설 서러워 떠는 애 오면 몇 개 따서 손에 쥐어 주고 굴뚝새 파고 들거든 몇 알만 꾸어 줘 빨간 입술을 지우면 안 돼 언덕 넘어 나풀나풀 봄 그 애가 깨금발로 흘금흘금 훔쳐보고 있더라. 2024. 1. 4.
새해 소망 새해 소망 새해가 밝았어요 할머니 복 많이 받으세요 글쎄 나 같은 사람이 많이 받을 복이 있을랑가 몰것네 짠지에 밥술이나 지대루 삼키면 좋겠구 저기 뭐시냐 볕이나 잘 들어서 찬물에 주물러 넌 같잖은 빨래나 잘 말르면 좋컷어 2024. 1. 3.
호박 호박 논두렁 호박이라더니 오호라 속내는 요염했구나 꼭꼭 숨겨둔 저 바람끼를 어찌 참았누 누런 통치마에 울퉁불퉁 장딴지 더니 저년 속이 열 사내 훔치고도 남겠어 춘삼월 봄바람아 가슴마다 불을 지른 게 너만이 아니었구나 샛노랗게 흘기는 초승달 눈매에 환장하겠네 뚝배기보다 장맛이야 게슴츠레 실눈을 뜬 섣달 바람이 못 본 척 흘금거리는 청아한 하늘가에 호박이 쓴 가을 연서가 아득하다. 2023. 11. 30.
홀로 남는 다는 것 부드럽던 바람마저 등보인 언덕 청옥 눈물이 흐르는 하늘가에 싸늘한 고독이 매달렸다 여름내 못 받은 품삯 홍엽에 새겼더니 도적같이 와버린 설야(雪野) 계절 끝은 그러려니 섣달 정월 삭풍이 나를 후리고 얼음장 초승달이 멋대로 기울어 미풍으로 간지리던 꽃잎 날리던 날의 맹서 눈으로 숨은 가지마다 침묵한다 춘삼월이 저당한 들판에 알맹이 내어준 잔챙이 가을이 당황스레 서성이는 밤 손등으로 훔치다가 눈꽃으로 피고 마는 고독한 눈물 그렇게 겨울은 홀로 남아 봄에게 받아낼 혈서를 쓴다. 2023.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