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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단편

순정이 *

by *열무김치 2017. 11. 29.

 

 

 

 

 

그녀는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숙일 때 마다 풍만한 그녀의 둔부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치렁치렁한 그녀의 머리가 허리로 흘러내리자 감나무 뒤에서 그녀를 훔쳐보던 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가지에 물을 퍼 담아 여기저기 뿌리며 장난질을 하던 그녀가 무심코 기석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기석은 기절할 듯이 놀라며 나무 뒤로 주저앉았다.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두 손으로 문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기석은 이대로 죽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죽을 수만 있다면.

감나무를 잡고 일어서자 현기증이 일었다.

감나무 잎 사이로 얼굴을 묻고 천천히 쓰다듬듯 눈을 뜨자 그녀의 모습이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나비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우물가에 핀 코스모스를 따서 머리에 꽂고 있었다.

이리저리 원을 그리며 돌던 그녀가 활짝 웃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은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기석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고 연신 중얼거렸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키자 손바닥이 이내 축축해지고 정수리에 땀방울이 솟았다.

감나무가지를 꺾어 손등을 찌르면서 기석은 계속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허리를 잡고 하늘을 향해 동그라미를 그리던 그녀가 물동이를 이고 토담 옆으로 난 샛길로 나섰다.

하늘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일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던 기석은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깍지처럼 손톱으로 감나무를 긁어내렸지만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 주먹을 쥐고 깊게 숨을 들여 마시자 오줌을 눈 아이처럼 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녀가 멀어져간 토담 길 너머로 쪽빛 하늘이 달려들더니 이내 긴 한숨을 토하며 등 뒤로 달아났다.

따라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기석은 단 한 발도 내딛을 수 없었다.

나지막한 뒷동산이며 아른거리는 먼발치 초가지붕들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으로 보였다.

 

"이놈아, 도지를 줄끼면 이따구로 농사를 지꾸서 반짝이나 되것냐?

겨울게 굼게 뒤질라고 ?"

사립문을 들어서기 바쁘게 부지깽이를 치켜든 순남이 악을 써댔다.

"대꾸 그러네. 그따구 걱정 치아유."

"니깐  놈이 무슨 재주로, 도깨비 방맹이라도 뚜들기?"

기석은 더 이상 대꾸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올 농사는 글러서 타작마당은 보나마나였다.

순남이 꿍쳐두었던 곶감나부랭이까지  얼러댄 까닭에 오랍뜨리 엿 마지기를 얻은 건 그나마 천행이었다.

올 같은 가뭄에 지렁이 같은 고래실 뙈기논이 그런대로 고개를 숙여서 원수같은 천수답에게 앙갚음을 해 준 건 대복이었다.

뒷짐을 짚고 헛기침을 해대는 그녀의 부친 노영감이 고래실논을 보고 입맛을 다신 걸로 보아 내년에도 땅마지께나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이들자 기석은 자다가도 웃었다.

입동 전에 도지를 받쳐야 했으므로 기석은 작년 겨울에 짜 두었던 가마니를 꺼내 이왕이면 고래실에서 타작해 바짝 말린 벼를 퍼 담았다.

쭉정이로 날라 가고 반실이 든 벼를 다시 풍무질을 하자 싸락싸락한 벼알이 반에 반으로 줄어 기석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이놈아, 올 겨울게도 강내이밥을 마카 쳐 묵어야 해동 될끄다. 맹구르 고짝이여."

갈바람처럼 들리는 순남의 잔소리가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우마차에 볏섬을 싣고 그녀의 집으로 가야한다.

기석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깟 볏섬이야 거간꾼이라 뒷전이고 그녀만 보면 될 일이었다.

"아니, 뭐이가 좋다고 고렇게 입을 오지기 벌리냐. 평상 나무 땅뙈기나 부치먹는거이 좋어?"

"꼬만 좀 하요.  고런 게 있으이."

"고따구가 순정이 지지바 아니여?  야야, 엔칸에 때리 치와라. 고따구 지지바는 구루마로 실쿠와도 암 씰데도 없다.

니깐 놈이 치다봐야 대낭구여."

"치와요 좀. "

기석이 꽥 하고 소리를 지르자 순남이 토끼눈을 뜨더니 마당으로 구정물 휘하니 내 쏟았다.

"베라먹을 놈의 지지바가 엠한 아 잡지."

 

제법 묵직한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곰방대를 문 노영감이 잡아먹을 듯이 기석을 내려다보았다.

"왔는가?"

기석이 허리를 숙이자 카랑카랑한 순정에미 목소리가 묵직한 공기를 갈랐다.

"작년처럼 허당으로 부치오진 않았을거구만."

"두 탕이나 부칬으니  섭당 거지반 너 댓 말은 나올낍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긋고"

기석이 우마차에서 볏 가마를 내리자 노영감네 머슴을 사는 천득이 쫓아 나왔다.

"뒤깐 마당에 베까리를 해 놨구먼. 그리로 들여서 부으라두만."

"니 놈이 하지 그걸 내가 마카?"

"기롬, 내가 하라구?"

희멀겋게 눈을 치켜뜬 천득이 혀를 낼름하더니 허리춤을 잡고 뒷깐으로 들어갔다.

저 놈을 야심한 밤에 요절을 한 번 내리라.

볏 가마를 지고 봉당을 지나야 했으므로 기석은 아랫도리를 단단이 걷어야 했다.

걸을때 마다 널브러지는 낡은 광목 잠방이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비척거리며 두어 가마를 나르자 이내 숨이 부쳤다.

"저기..이거 한 사발 마시고 하세요."

가냘픈 목소리에 얼굴을 들자 순정이 그녀가 물 사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 기석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예 예.."

물 사발을 받아 들었지만 떨리는 손 때문에 물 사발을 입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천천히 드세요. 오늘 좀 덥네요."

그녀가 정지로 들어가자 기석은 기겁을 하고 물을 마셨다.

"쩌기, 기둘려요."

"예?"

정지깐으로 들어가던 순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왔다.

봄바람에 허리를 늘어뜨린 버들 같은 그녀의 귀밑머리가 중천을 가른 햇볕에 반짝이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기석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떨구었다.

그저 멀찍이 바라보던 그녀의 목덜미가 아니었다.

가으내 땄던 목화 따위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시시한 순정의 얼굴이 가슴 가득하게 밀려들자 기석은 목이 꽉 조여든다고 생각했다.

어느해 봄, 지독하게 앓았던 고뿔을 겨우 떨치고 간신히 일어나 내다보던 복사꽃 가득안고 무심하게 서있던 초가지붕

그녀의 얼굴에서 연하디 연한 복사꽃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계속해서 손을 비볐지만 손바닥에 난 땀이 마르지 않았다.

기석이 붉은 얼굴로 허둥대자 순정이 빙그레 웃었다.

"말씀하세요"

"글게...요거이 저 빗섶에 다 들그면 되는 건지.."

그녀가  뒷짐을 짚은 채로 구름처럼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라고 하시던데.."

기석은 아까부터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연신 바르고 있었다.

봄바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입술이 타는 걸까

그녀가 정지로 들어가자 파랗던 하늘이 노르스름하게 보였다.

오수에 졸던 나른한 봄 날

사랑칸 쪽문으로 바라보았던 키질 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그렇게 보였었다.

송화 가루 분분히 세상이 노랗게 보이던  그 봄 날.

그녀가 사라진 정지깐이 왜 그렇게 보이는 걸까.

볏 가마를 털면서도 기석의 눈은 정지깐을 놓치지 않았다.

" 마카해야 댓가마 베를 죙일 터는 거여?"

천득이 돌배 한 덩이를 기석에게 건네며 히죽거렸다.

"니 놈이나 처먹어."

"고따구로 나부대지 말고. 순정이, 쟈 치다보능 거 내 얼추 알아봤지.

니 꼬라지가 매련 없는기 그땀신거 동네 아들도 다 아능긴데 꿈 깨라. 엔칸해야지."

그녀 얘기에 기석이 잽싸게 천득의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천득의 째지는 목소리가 뒤란을 채웠다.

"야, 부랄 두 쪼기 전 밑천 잉거 마실 똥개도 알어.  올그지 못헐 낭구여."

기석은 천득의 목을 힘껏 졸랐다.

"요따구로 안 될라믄 주뎅이 꼬매."

헥헥거리던 천득이 숨찬 소리를 내 질렀다.

"야 야, 글게도 니가 추스버 보이나 보제. 물을 다 떠주능거 보이."

"갱소리 지꺼리지 말구 끼가라."

"및 년을 요짝 집구석에서 문때도 찬물 한 바가치 안 주더이 닌 달게 보였나부다.

내 보니까니 내년에도 고래실논은 따났다."

기석은 얼른 천득의 목덜미를 놓았다.

왠지 그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박눈에 동네가 그림처럼 내려앉았지만 좀처럼 그녀는 마실을 나오지 않았다.

까치가 깍깍 거리면 기석은 얼른 동구 밖을 내다보았다.

안 그래도 달덩이 같은 흰 얼굴이 더욱 하얘졌으리라.

치렁치렁하던 윤기 나는 머리칼은 또 어떻고.

휘어질듯 꺾이던 그녀의 허리를 떠올리자 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눈 쌓인 적막강산에  동그마니 서있을 그녀를 계속하여 불러내다가 기석은 들판으로 나섰다.

눈사람이 되어보리라.

소리 없이 퍼붓던 눈이 잠시 그치자 이내 칼바람이 불었다.

눅눅하게 달라붙은 솜바지에서 허연 김이 올랐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태 전 날품을 팔던 산판을 했던 곳에 이르자 비스듬한 산비탈 아래로 눈이 족히 몇 자는 쌓여 있었다.

쌓인 눈 복판으로 발을 내딛자 이내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눈밭으로 몸을 맡기자 솜이불같이 푹신한 느낌이 들었다.

허공으로 허연 입김을 내뿜던 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솟아나는 눈물을 훔치다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순정아...

그러나 그 뿐이었다.

점점이 흩날리는 눈송이가 기석의 내지르는 소리를 집어삼키더니 얼마 못 가서 다시 함박눈으로 변해 내렸다.

눈속에 파묻힌 기석의 작달막한 체구는 먹이를 찾아 헤메는 오소리 같았다.

 

동네복판 밥술깨나 먹는다는 고 영감은 자신의 집이 말밥굽 집이어서 유달리 봄이 빨리 든다고 허풍을 쳤다.

동네가 이만큼이라도 사는 건 다 자신의 집에서 운기가 뻗어 마을을 감싸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낱 미물이나 꽃나무도 그걸 알아서 일찌기 꽃을 피우는데  뱁새 같은 동네 식충이들이 봉황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했다.

땅뙈기라도 얻어 부쳐야 하는 한심한 처지로서는 대거리를 할 까닭이 없어서 훈장질을 서슴지 않는 고영감에게 웬만하면 모두들 비켜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당 복판에 있는 산수유나무가 동네 여뉘 집보다 꽃망울을 빨리 떠트려서 허풍쟁이 고영감이 얄미워도 일찌기 마당안에 드는 봄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돈 냥깨나 만지다보니 스스로 마을유지가 된다한 들 시비를 걸 사람이 없는지라 고영감은 마을일이 나설때 마다 아예 시어미노릇을 했다.

"내사 참, 디러워서.."

노 영감과 고 영감은 툭하면 시비가 붙었다.

동네 복판에 있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를 잘라내고 길을 터야 마을이 산다는 고 영감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길앞을 가로막는 노 영감 때문에 동네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노 영감네 땅을 부쳐먹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고 영감 쪽수들이 늘 당했다.

기석이 작년 도지를 그럭저럭 받쳤던지 노 영감은 고래실논은 물론이고 남향으로 나있는 밤나무둥치 밭을 내 주었다.

천득은 그게 다 자신이 노 영감에게 아부를 떤 덕분이라고 했다.

어찌됐던 기석은 천득이 고마웠다.

올 가을엔 저 곰 단지 같은 놈에게 설익은 감이라도 한 보따리 안기리라.

 

산골 개울이 물을 내리고 참꽃이 피어나자  논갈이 밭갈이가 시작되었다.

밤나무둥치 제법 쓸 만한 밭을 얻었으므로 기석은 모처럼 신소리를 칠 수 있었다.

"올게는 일 한 번 내 볼끼요."

순남은 신바람이 나있는 기석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글게야 니도 장개를 깔그만. 순정이 갸는 치다도 보지 마라."

그녀 얘기를 듣는 순간 기석은 온 몸이 뻣뻣해졌다.

일그러지는 기석의 표정을 본 순남은 얼른 사립문을 나섰다.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탓인지 손바닥만한 외양간에서 겨울을 넘긴 암소는 엉덩이가 바짝 야위어 있었다.

밤나무둥치 밭은 갈 수 있을까 싶어서 천득에게 부탁을 해볼까 싶었지만 콩 말이나 멕여야 할 판이라서 그도 쉽지않았다.

이틀 할 거 사나흘 하면 되지 싶었다.

바소구리에 보구래를 지고 나서자 눈만 왕방울만한 암소가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다.

제 놈도  게거품을 물게 될 걸 알리라.

코뚜레를 잡아끌고서야 마당을 나섰지만 해는 이미 반나절로 와 있었다.

쉬엄쉬엄 소를 몰아 밤나무둥치에 이르자 산골 물 흘러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먹하기만 한 골짜기에 분홍빛이 듬성듬성 보였다.

고 영감네 마당 안에 이미 산수유가 핀지 오래라 보지 않아도 짐작으로 참꽃이 보였지만 분홍빛을 보자 기석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가을 거두미를 끝낸 김장밭에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갓이 푸르둥둥하게 보였다.

꺼칠한 암소 목덜미에 멍에를 지우고  가슴걸이를 하자 미처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암소가 뒷발질을 해댔다.

겨우내 구정물 여물에 길이 났을 테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같다고 생각했다.

쟁기를 채우고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자 제법 보드라운 바람이 불었다.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어뿜다가 바라본 밭둑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얼른 담배 불을 끄고 눈을 비비자 분명 나물을 캐는 여인이 들어왔다.

주뼛 머리칼이 돋는 걸로 보아 어쩌면 순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석은 부리나케 그쪽으로 내달았다.

여인이 있는 곳 근처 바위틈에 숨어 눈동냥을 하던 기석에게 보인 건 길게 땋은 여인의 머리였다.

순정이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자 기석은 등날이 바짝 달았다.

그녀일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입이 말랐다.

기석이 훔쳐보는지도 모르고 여인은 흥얼거리며 나물을 캐고 있었다.

나물바구니를 들고 일어서는 여인은 순정이었다.

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어머, 어떻게?"

순정이 놀라자 기석은 도적질을 하다 들킨사람처럼 허둥댔다.

순정이 놀라 나물바구니를 떨어트리자 몇 줌 캔 나생이가 쏟아졌다.

기석이 기겁을 하고 나생이를 주워담아서  얼른 순정의 손에 들려주었다.

"지송해유. 놀래킬라고 한 건 아닌데.."

"놀랬어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밭 갈러 왔그만요."

"아, 그러셨구나."

기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무슨 말이던 해야겠다고 되뇌었지만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카 좀 캐 드릴까유?"

순정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작은 땀방울이 송글한 순정의 이마에 실오라기 같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흙 묻은 그녀의 하얀 손과 팔목이 양지바른 언덕의 바람결 같았다.

얼마만이던가.

멀리서 훔쳐보던 그녀가 바로 자신 앞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에 기석은 하얀 현기증이 일었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계속 중얼거렸지만 그렇게 그리던 순정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기석이 계속 우물대자 순정이 호미를 건넸다.

"쫌 만 캐 주세요.아직 땅이 언데가 있어요."

미풍같은 순정의 말에 기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꿈결에 들리는 목소리였다.

호미를 받아든 기석이 돌아앉아 여기저기 땅을 팠다.

" 천천히 하세요. 저 쪽이 더 많던데.."

순정이 밭 너머로 가자 기석은 흙투성이가 된 잠뱅이자락을 둘둘 말아 넙적다리까지 올리고 부리나케 그녀를 따라갔다.

"요 건 씀바귀구먼유. 요 건 꽃다지라는 거고.."

기석이 캐주는 나물을 받아 든 순정이 코에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나물 이름을 잘 아시네요. 꽃다지는 작은 꽃이 폈어요. 이뻐요."

순정이 기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작년 늦가을에 저의집에 오셨잖아요. 아버지가 역정을 내시던데  아버지가 그런 분은 아니예요.

속 마음은 참 따스한 분인데.."

"야, 알구만유. 밤나무둥치 전지도 그래서 주셨구유."

기석이 나물을 캐던 호미로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순정은 그러는 기석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밭 갈러 오셨잖아요.이제 그만 캐 주셔도 되어요. 꽤 많은걸요."

안절부절하던 기석이 캐모은 나물을 순정의 손에 쥐여주다가 자신도 모르게 순정의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기석의 행동에 순정은 잠시 주춤하다가 슬그머니 손목을 빼고서 얼른 일어났다.

"지송해유. 나물을 드린다는게."

"괜찮아요. 그만 가 볼께요. 나물 캐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더 캘 수 있는데.."

"아니예요. 이만하면 됐어요. 덕분에 많이 캤어요."

순정이 고개를 숙이자 기석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순정이 밭둑으로 따라 서서히 멀어져가자 기석은 아예 땅에 주저앉아  작은 점으로 변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다 보았다.

또다시 하늘이 노랗게, 그리고 붉게 다가왔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밭을 갈러 온 암소가 웡웡거리며 울때까지도 기석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기석이 그 자석 단다이 좀 붙잡어 매구마."

"몬 말씀이요?"

"와 남으집 처녀를 불러내능긴데."

"우리 아가요?"

"송챙이가 솔이파리를 쳐묵어야지 뭘 넘실대는거여."

"그런 아가 아인데 뭘 잘못 아셨는기라요."

"기럼 내가 지끔 언 쉥아지 똥싸는 소리하나?  한 번만 거 찍쩝대믄 꾹물도 없는 줄 알그라."

노영감집으로 불려간 기석 아범은 코가 넙죽하도록 혼쭐이 났다.

그나마 얻어부치던 논빼미가 명년이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기세였다.

코가 석자나 빠진 기석아범이 집으로 내달아 헛간에 있던 봉양꼬쟁이를 들고 고함을 쳐 기석을 부르자 이미 소식을 듣고있던 기석이

뒷산으로 냅다 줄행랑을 쳤다.

그 성질머리로 보아 다들리면 요절이 날 판이었다.

"아니, 우째 그러능긴데요."

"이 놈이 미슨 낯짝으로 그 베라먹을 집구석 딸래미한테 침을 발기나."

"뭐이? 고게 아니여.  우리아가 아이고 그 지지바가 달게붙는거제. 똑떼기 알고 지꺼리시요."

 

 

 

 

이어서..

531

 

 

 

끝입니까?
기석이 참 딱하네요.
처자 이름은 순정이어서 이름만 봐도 좋은 여인 같은데............
어쨌든 요즘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 순정이, 기석이 이야기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싶어 하며 읽었습니다.
너무 길거 같아서 나누어 쓰려고 합니다.
하찮은 글이지만 좋은 마음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무언가를 한다는 게 우선 좋은일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어떠한 것도 두려워말고 가슴이 원하면 하세요
오늘은 왠지 더욱 용기와힘이 나네요
친구님의 따스한 댓글에 말입니다
관심과격려의 댓글이 친구님과의
우정의 디딤돌이 항상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겨울의 을시년스런 날씨에
건강하시며 댓글로서 자주 만나기를 또 바랍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묵호 출신인 소설가 심상대 씨의 글에서처럼
강원도 사투리가 글 속에 잘 녹아있습니다.
지금은 순정이 사라진 시대라 따스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의 저 처자는 누구입니까? [비밀댓글]
사실 심상대씨의 소설을 그리 많이 읽진 못했습니다.
제가 강원도에서 오래 살았지만 강원도 사투리는 좀 복합적입니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과 영서지역이 많은 차이가 나지요.
듣기에 따라선 참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말투에서 착함과 순박함이 드러납니다.

사진의 처자는 이야기의 느낌을 살리기위해 옮겨왔습니다.
정말 멋진 순애보 글 잘읽였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겨울에 공감이 가는 고향의 추억같내요
이야기의 끝은 순애보라기엔...
뒷부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이 사투리는 강원도 사투리 인가요?
몇번씩 반복해서 읽어야 이해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노오래질 정도로 좋아하는 감정을 저는 느낀적이 있었던가?
하며 읽었네요.ㅋ 결국 기석이와 순정이는 사랑이 이루어 질까요??
에공..
심한 강원도 사투리는 제주도 말 못지않게 알아듣기 힘들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금방 알아듣고 듣기에 따라 다정다감합니다.

기석과 순정의 이야기는 이어서 쓰고있습니다.
하늘이 노래지도록 좋아하는 감정...신이 내린 축복이 아닐까요.
분례, 점례, 점순, 순정... 리얼리즘 소설에 등장하는 몇 이름들이 떠오릅니다.
기석이는 저희회사 선배 이름과도 같아 혹시? 했습니다. 속초가 고향이거든요. ^^
기석에게 마음이 이입되어서 그만 저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어서 쓰신다니 순정씨하고는 잘 될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글이 더 이어졌어도 조마조마하게 읽었을 듯 싶고요.
사랑의 감정은 부풀어오른 풍선처럼 터질 것 같은데 속은 아무것도 없는 맹탕이라
자신의 신세 한탄만 한 세월을 살아온 젊음에 대해 부디 성처를 주지는 말아야 할텐데...
후속글이 기대됩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드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드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 뿐이래요
겉으로는~음음음음음~모르는척 했드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드래요
시집간 날 첫 날 밤에 한 없이 울었드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음음음음음~안 그런척 했드래요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드래요
장가간 날 첫~엇 날 밤에 달 보고 울었드래요

갑돌이 마음은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음음음음음~고까짓것 했드래요
고까짓것 했드래요.....

이 노래 가사가 뒤 따를 후편 인양 떠오릅니다 ㅎㅎ
멋진 소설 정신 줄 놓고 앉아 다 읽고 가네요 ~~~~~~~~~~~

덕분에 갑돌이와 갑순이는 ~~~~~~~~~~~~~~~~흥얼흥얼 ~~~~~오늘 저녁이 되어도
안그런척 했더래요 ~~~~~~~~~~~~ ㅎㅎ 하고 있을 것 같은 예감 강해요 ㅎㅎ
질펀한 사투리가 10대 시절 읽던 농촌계몽소설 기분이 납니다.
여자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제 10대 시절도 떠오르고요.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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