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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583

달동네의 봄 사람 발길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도심 후미진 달동네에 봄이 피었다. 미풍 불어 잿빛에 숨었던 가지가 살구꽃 앵두꽃으로 화장을 하자 사람 마음이 손바닥 뒤집 듯 바뀐다. 겨우내 회색빛으로 가라앉았던 고만고만한 집들이 듬성듬성 피어난 살구꽃 앵두꽃으로 제법 보암직하게 변했다. "원, 사람 팔자가 저래면 월매나 좋아." 양지쪽에 앉아 꽃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나를 보고 앉았다가 가라고 한다. "그 짝도 이젠 할방구티가 나는구먼" "예?" "뭘 그렇게 놀래? 예전 같으면 고래장 깜인데." "아이고, 제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 음료수 한 병을 따드리자 이내 함박웃음이다. "웃으라고 한 거지, 윤 씨 아직은 쓸 만 해." "이젠 완연한 봄이네요." "그러게. 고놈의 코시긴가 뭔가 때문에 겨우내 곰처럼 박혀있다가 이.. 2022. 4. 7.
봄, 그리고 재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2년 여 바이러스가 쓴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사는 게 괜찮은 삶일까를 스스로의 무대 위에 올려놓고 실험하는 시간을 보냈다. 지나고 보니 결국 평범하고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사투를 벌인 셈이다. 모진 겨울이 가면 훈풍이 불듯, 특별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흐름에 대한 권태가 행복의 원천이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봄이다. 어찌 됐던 또다시 봄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게 찾아온 봄이 시치미를 딱 뗀다. 사노라면 분명 또 변덕이 나오겠지만 우리가 버선발로 뛰어 나가 얼싸 안아야 할 봄이다. 봄날엔 혼자여도 눈물이 날 만큼 시리고 푸르다. 첫 발자욱 이쁜준서 2022.03.03 23:24 신고 수정/삭제 답글 저도 걷기 가는 길에 금호강 물 위에.. 2022. 3. 3.
임인년 새해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2021년은 수많은 애환을 남기고 가버렸습니다. 서쪽으로 진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다시 떠 오릅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다시 이 땅에서 호흡하고 남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라건대 2년간 우리를 괴롭힌 눈치 없는 바이러스가 좀 비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름의 사명이 있었다고 긍정하는 것으로 물러나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새해가 밝았습니다. 인류가 정한 시간의 흐름을 연말과 새해라고 명명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니 1월 1일의 해는 남다른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떠올라야 합니다. 새해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와 가족, 그리고 그리운 이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 2022. 1. 1.
한해의 끝 12월이다. 삶이 있는 한 각각의 생명은 유전자를 품고 시작과 끝을 쉼 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한 개체의 생물학적인 연속성이 끊어지게 되면 마침내 유일의 存在는 시간 세계의 마침표를 찍는다. 각자의 시작은 있었지만 끝은 알 수 없는 시대 작금 인류가 치르고 있는 홍역이 넌지시 눈짓을 한다. 결국 빙점을 찍을 길이 있다고. 시간 단축을 위해 샛길로 빠지는 고개를 넘다가 차를 세우고 멍하니 앉아 넘어야 할 산길을 바라보다. 살아 있으니 저 길을 또 가야 한다. 이쁜준서 2021.12.11 01:45 신고 수정/삭제 답글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간들 환자가 1일 환자가 1만명이 넘게 되면 사회는 여기서 저기서 구멍이 뚫린 것이고, 지금은 마트도 가고, 재래시장도 가고, 하지만 마트도.. 2021. 12. 11.
가을 이야기23...약속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정리할 시간이다. 다음을 위한 마침은 시작보다 더 아름답다. 가을색이 화려한 이유도 자연이 베푼 다음을 위한 마지막 만찬인 까닭이 아닐까. 2년 여 코로나를 겪으면서 인류가 치른 수업료가 막대하다. 보다 크고, 보다 풍족한 것을 얻기 위해 앞으로만 내달린 지구인들에게 바이러스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비록 큰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평범함이 위대함보다 크다는 걸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대지의 잠이 끝나고 다음의 봄이 우리에게 어떤 표정으로 다가올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한바탕 홍역을 치른 우리들에게 남은 숙제다. 앞마당 감나무에 매달린 작은 여름 곳간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겨울맞이에 나섰다.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는 설렘을 옷과 표정으로 꾸미는 건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냉정하.. 2021. 11. 24.
가을 이야기 20...마지막 처녀 * " 걔가 아마 40이 넘었을 걸?" "마흔넷이라네요." "안 갈 줄 알았는데 용케 신랑감을 구했네" "구하긴 뭘, 신랑감이 횡재를 한 거지." "강 건너 소 키우는 사람이라고 합디다." "아이고야, 그 집 소가 한 100마리는 될걸?" "나 같으면 안 가고 말지. 그 집구석에 가봐야 평생 일이나 하다가 죽을 텐데 지금까지 버티다가 왜 그 고생길로 가나?" "듣기로는 색시한테는 일절 일 시키지 않는다고 다짐을 받았다네요." "그 말을 믿수? 차라리 순분이네 똥개를 믿지." "갸 집구석도 그렇지 뭐. 처녀 몸으로 친환경 농사한다고 지금까지 고생만 잔뜩 했잖어. 그래도 모셔간다고 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가는 게 이득이여. 오십 넘어 봐. 그냥 허당이지." "진짜 처녀인지 아닌지는 몰라두 명색이 처녀라구 .. 2021. 11. 6.
가을 이야기15..晩秋 민가와 떨어진 집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했다. 언덕을 한참이나 올라야 해서 별스런 양반이구나 싶었다. 된서리가 내린 산허리의 아침은 이미 겨울이었다. 눈 오기 전에 꺾다가 만 콩대를 꺾어야 하니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했다. 아내는 그만 가자고 눈짓을 보냈지만 그냥 오기가 그래서 같이 콩을 꺾었다. 마당엔 타작을 한 누런 콩이 낡은 멍석에 널려있었다. "저거 말이지. 눈 오면 두부를 할 생각이네. 기별하면 그때 같이 오게나." "맷돌 두부 좋지요. 그런데 눈 내리는 날 여기 올라 올 자신이 없어요."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도무지 인기척이라고 없는 산 중턱의 외딴집은 늦가을 탓인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엔 뭘 할 건가요?" "다 알면서 뭘 물어. 두부 해서 장독에 담가 두고.. 2021. 10. 28.
가을 이야기 13..아빠 기다리기 좋아요4 공유하기 통계 게시글 관리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파란편지 2021.10.27 08:13 신고 수정/삭제 답글 참 좋겠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무섭고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그 시간이 편안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 열무김치 2021.10.27 17:32 수정/삭제 아직 의사표현이 서툰 손녀가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할배가 셔터를 눌렀습니다. 비닮은수채화 2021.10.27 08:25 신고 수정/삭제 답글 그저 저 천사같은 아이를 보며 댓글 달려다가 파란편지님의 댓글보니 저와 같은 동색의 외로움을 봅니다 조금은 파란편지님을 알것도 같습니다 [비밀댓글] ┗ 열무김치 2021.10.27 17:34 수정/삭제 우리들이 초등학교를 다닌 때 .. 2021.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