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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애증의 화장실

by *열무김치 2023. 8. 20.



처가엔 세 명의 사위가 있다.
내가 맏사위 대장이고 아래로 나보다 세 살 위인 동서가 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서열 상 내가 형님이니 동서 입장에서는 속으로 껄쩍지근 하겠지만 깍듯하게 형님으로 부른다.
내가 나이가 아래이니 편하게 대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라고 본인이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처가에 모임이 있어 만나거나 외부에서 만나게 되면 형님, 형님 부르니 처음엔 닭살이 돋았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곧 익숙해졌고 맏사위 대접을 받으니 싫어 할 까닭이 없었다.
막내 사위는 나이가 한참 아래지만 오리지날 서울 본토배기에다 소위 말하는 야탸족, 오렌지족으로 성장한 사람이라 촌수니 서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몇 번 지켜보다가 너무 함부로 하는 것 같아서 모임이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가족들을 대할 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막내사위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어느 해 가을
장모님이 평창 산골 마을에 당신 홀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처남 내외와 살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 오랜 갈등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장모님 문제로 눈물 짓는 아내를 생각하면 맏사위인 내가 모셔오면 좋았겠지만 당시 고령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안 있어 사위 세 명이 장모님이 이사를 한 허름한 농가에 모였다.
천천히 집을 돌아보니 오랜 간 방치를 한 탓인지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나는 수리를 할 곳들을 대충 그림으로 그리고 메모를 해서 동서들과 처남을 불러 모아 의논을 했다.
"보다시피 고령의 노인이 이대로 살 수가 없을 것 같네.수리를 할 곳이 너무 많아."
동서가 맞장구를 쳤다.
"형님이 견적을 좀 내 보세요."
"견적이나 마나 대충 보아도 천 만원은 들어야 집 꼴이 될 거 같은데...."
"그렇게나 많이요?"
"그것도 우리 세 명이 일을 해서 인건비를 아낀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거지."
막내 사위가 입을 내 밀었다.
"까이꺼 얼마 안 드네. 저는 일 못해요. 대신 돈으로 내어 놓을게요."
"하이고야, 김치국물부터 마시네. 그래 얼마를 내어 놓을 건데?"
"형님이 달라는 대로 줄 테니 전 여기서 빠질게요."
"이런 싸가지.."
욕이 나왔지만 꾹꾹 참았다.
처남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입을 내밀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뭐가 못마땅해요?"
"이런 집에 뭐하러 그리 큰 돈을 들이나. 그냥 대충 살면 되지."
"아니, 뭘 대충 살아요. 귀신이 나올 것 같은데. 막내 동서는 빠진다고 했으니 한 500만원 내 놓고 형님도 몇 백 내세요. 나도 낼 테니까."
돈을 내어 놓으라니 모두들 입맛을 다시며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돈 마련할 시간이 필요 할 테니 연말에 공사를 하도록 하고 늦어도 11월말 까지 내 계좌로 입금하시오."
역시 돈은 받으면 내 돈이고 내어 놓으라는 말에 얼굴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걸 보면 아주머니 떡도 싸야 사먹는다는 말에는 수많은 경험이 농축된 진리의 말씀이다.

그해 말
나와 바로 아래 동서와 처남이 집 수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손을 대니 생각보다 고칠 곳이 많았다.
가루 더 들이고 물 더 들인다는 속담처럼 이거 저거 손을 대다 보니 예상했던 기간이 늘어나고 보수 비용도 늘어났다.
각자 내기로 했던 비용에 더해 돈을 더 내어 놓으라고 하자 모두들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일을 마쳐야 했으므로 별 도리가 없었다.
사실 장모님을 모셔야 할 처남이 책임이 가장 크니까 많이 내어 놓으라고 강권을 했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그렇게 짠돌이 짓을 하면 되겠어요?
빨랑 내어 놓으세요."
나는 졸지에 고리대금업자가 되어 있었다.
막내 동서는 돈을 더 내어 놓으라 하자 자기도 일을 도울테니 금액을 좀 깎아 달라고 했다.
"아니, 돈은 얼마든지 내어 놓겠다더니 갑자기 왜 그러셔?
꿍쳐놓은 돈을 처제한테 들켰나?"
나중에 알고 보니 처제가 마련해준 할당 비용을 중간에 잘라 먹었단다.
****************************

막내 동서가 며칠 간의 휴가를 받아 일을 도우러 내려왔다.
하지만 풍요로운 집안에서 곱게 자란 막내 동서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일을 돕기는 커녕 되레 방해가 되었다.
작은방 보일러 공사를 하다가 막내 동서가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투덜거리기에
할 수 없이 중국집에 배달을 시켰다.
한참 일을 하다가 막내 동서가 보이지 않기에 불렀더니 이를 쑤시며 내려왔다.
"뭐 하느라 보이지도 않아?"
"뭘 하긴요. 탕수육 먹었어요."
"탕수육이 언제 왔는데?"
"아까 왔잖아요."
"그럼 , 우리를 불러야지."
"형님들이 안 먹는 줄 알고 저 혼자 다 먹었는데요?"
"아니, 탕수육 대짜를 혼자 다 먹었다구? 그걸 왜 혼자서 다 먹어? "
"안 드시는 줄 알고.."
막내 동서는 그게 뭐 어떠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에라이, 무슨 돼지도 아니고, 그게 말이야 방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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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삶아 점심을 때우고 잠시 쉬고 있는데 막내 동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요?"
"저 앞에 창고 옆에 있잖아."
부리나케 뛰어나간 동서가 얼른 쫒아왔다.
"형님, 화장실이 이상해요. 변기가 없잖아요."
"뭐? 수세식 변기 말하는 거야? 그런 게 여기 어디 있어.
여기는 그냥 풍덩 화장실이라구. 재래식 화장실 몰라?"
얼굴이 사색이 된 동서가 혀를 내밀며 코를 실룩거렸다.
"저기, 여기 근처에 수세식 화장실 없어요?"
"이 사람아, 이런 산골 구석에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거 없으니까 급하면 여긴 천지가 다 화장실이니까 아무데나 빨리 싸고 와."
급하게 쫒아간 동서가 다시 뛰어왔다.
"형님 ,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요. 냄새가 너무 나서 .."
"그럼 어쩌라구? 저기 널찍한 들판에 가서 적당히 해결하고 오셔. 개방감 있고 션해서 좋다니까."
"사람들이 볼텐데 창피하게 어떻게 그래요. 평창 시내에 가면 안 될까요?"
"허, 이 사람이, 여기 볼 사람이 누가 있다고.
본다고 해도 닭 소보듯 할테니까 신경쓰지 말라구.
무슨 똥 누려고 시내까지 가. 저기 밭에다 그냥 싸."
하지만 동서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안절부절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여보, 지우 아빠가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빨리 당신이 지우아빠 데리고 농협 화장실에 다녀와요."
"아고야, 그러게 탕수육 대짜를 왜 혼자서 다 먹냐구."
할 수없이 동서를 태우고 시내 농협으로 급하게 차를 몰았는데..
중간 쯤 왔을 때 얼굴이 사색이 된 동서가 소리를 질렀다.
"형님 좀 빨리 가요. 죽겠어요. 빨리, 빨리요."
"지금 과속하고 있잖아.쫌 만 참아."
"도저히..도저히 못 참겠어요."
"무슨 애도 아니고..엉덩이를 최대한 오무리고 손바닥으로 꽉 누르라고."
옆에 탄 아내가 빨리 가라고 눈짓을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제한속도 60Km 지방도를 130Km 로 내달렸다.
농협 건물이 보이자 아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 왔다, 지우아빠 다 왔어요. 쫌만 참아요."
평창 버스터미날을 지나 농협쪽으로 들어 섰는데 뒤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뿌아악~푸다다다...
"이게 무슨 소리야?"
순간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뭐야? 차 안에 싼거야?"
동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를 세우자 아내가 얼른 내렸다.
"에이, 정말..."
하지만 미안해 하는 동서를 나무랄 수만 없었다.
아내가 입에 손가락을 대고 가만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아고야....그래, 잘 쌌다. 자연 민생고를 어찌 막으리."
***************************

어떻게 할 수 없어 차를 되돌려 집으로 왔지만 한 겨울이라 차 시트 청소가 쉽지 않았다.
가죽시트가 아닌 천 시트가 문제였다.
물을 데워 여러 번 닦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냄새도 얼른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트를 통째로 갈기도 힘들었다.
영하의 날씨에서 시트를 닦으려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재래식 화장실이 어때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판에 가서 해결하면 될 걸 왜 남의 차에다 실례를 해서
이 추운 날 개고생을 시키냐고.

차 안에 변 냄새가 가신 건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서였다.
아내에게 물었다.
그날 차에 왜 탄 거요?
농협에 가는 길에 장을 보려고 했단다.
동서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엑셀 승용차를 폐차 한지 꽤 오래니 작은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가끔 막내 동서를 만나면 농담을 건넨다.
"여, 엑셀 똥싸개, 그간 잘 지냈는가?"
큰소리로 놈담을 하면 동서는 부리나케 뛰어와서 내 입을 막는다.
"제발, 다른 사람들 있는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차 안에 똥 싸 부친 사람 보고 똥싸개라고 부르는 게 당연한거 아니야?"
"에이, 정말.. 형님 보기 싫어서 처가에 오지를 말아야지."
" 알았어. 다시는 그렇게 안 부를게. 알았지? 똥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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