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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만추에 기대어

by *열무김치 2022. 11. 1.

여보
올해 가을도 이렇게 가네
그러게
나 좀 봐
작년 가을보다 더 늙었지?
아니 눈에 띠게 변하진 않았어
정말?

거리의 낙엽이 예쁘다며 졸라서 간 그곳엔
색 바랜 낙엽 위에
이사를 간다며 좋아하던 큰 아이
대출금 이자가 올랐다고 머리를 싸매는 둘째
허리 때문에 골프를 그만 두어야겠다며 허풍을 떠는 친구
오랜 병 수발에 우울한 소녀가 되어버린 명자가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한 조각의 바게트를 적시곤
사선에 선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오후
1년 그 새 털 같은 날에
소년의 날이 얼마나 될까

이왕 나온 김에 저녁도 먹고 갈까?
그러지 뭐
낙엽은 짠순이 아내 편이 되어 주었다
낙엽은 결코 우울하지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차 표를 끊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낙엽을 쓸며



상기된 얼굴로
마당의 낙엽을 쓸다

연두색 5월은 몇 곡의 노래를 부르고
꾸어다 놓은 보리 자루처럼
표정 관리가 어둡다

고약한 심사
하루 밤 숙소의 짐을 빼듯
그 곱던 얼굴을 비로 할퀴며 중얼거리다

끝까지 곱게 화장을 해 줘서 고마워
이쁜이 몇 잎은 책갈피에 꽂아 두었다가
봄 기다림이 지겨우면
슬며시 꺼내 볼께

안녕

낙엽을 쓸다가

 

 

 

사과 사는 날

원 세상에
너무 비싸서
안 사려고 했는데
빨간 립스틱에 홀랑 넘어갔네

청춘이오
당신이 바라는
도톰한 입술은 아니어도
한 입 베어 물면
입술에 젖는 머나 먼 그대의 향기

손님
5만원이에요
예?
5만원이나 한다 구요?
빨간 립스틱을 너무 발랐네

사과를 담다가

 

 

 

 

가을 비

비 나리는 골목에 서서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리다
낙엽의 배웅에 돌아오는 길


찬 비는 그대 미소로 내리고
쓸쓸한 거리는 그대의 눈이 되어 시를 씁니다
한 점 낙엽이
한 없는 사랑의 언어로 나부끼는 날
가을 비로 난
당신의 가슴을 여는 법을 배웠습니다

 

 

 

외출

 

월말 공과금 계산을 하다가
문틈을 헤집는 늦가을 햇살에 왈칵 눈물이 났다
도토리 키 재기 살림살이
얼마가 모자라고 얼마가 남은 들
재 봐야 암 까마귀 수 까마귀인 걸
내 이렇게 늙어 죽을 수는 없으리

딸래미가 버린
유행 지난 립스틱을 빨갛게 바르고
장롱 신세 10년 지기 루비통 볕 쬐는 날
모델도 아닌데
우아할 게 뭐람

만날 사람 없는 거리에서
낙엽 비 맞는 날
나는 발칙한 돈키호테가 되었다

이 머플러 얼마에요
이 가방은 요
귀밑 머리 넘기며
입술을 오므리다가
거울에 비친 숱 없는 머리
순간과 영원을 오가는 손가락에 낀
무이자 6개월 카드가 배시시 웃었다

여보
어디 갔어
늦어
알아서 찾아 먹어요

노란 은행잎 소녀가
루비통 가방에 콩나물 한 봉지를 넣어 돌아 오는 길
가을은 깍지를 끼고 서서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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