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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행

겨울이야기3.. 숨

by *열무김치 2020. 12. 21.

남한강

빛과 어둠

그 소중함을 위해 강이 흐르고 

우리는 고통의 강을 건너야 한다.

 

 

 

 

 

겨울 유희

 

 

 

 

장대 아저씨

 

 

겨울이 되면 도무지 낙이라곤 없는 후미진 산골마을에 어느 날부터 폭음탄 터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봐야 종일 불어대는 칼바람 뿐이어서 아이들 손등은 오뉴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았서 피가 질질 흘렀다.

재수 좋게 벙어리장갑이라도 얻어걸린 아이들은 보란 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손등은 물론 팔꿈치나 정강이가 더덕더덕  때국물이 흐르는 데다 그 때국물이 굳어서 생긴 딱지는 여간해서는 벗겨지지도 않았다.

겨우내 외양간에서 강냉이 대궁에 구정물만 먹어서 비쩍 마른 황소 엉덩짝에 철썩 달라붙어 말라버린 쇠똥 같은 딱지였다.

학교에서 용의 검사라도 할라치면 영락없이 손등과 손바닥을 맞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놈아 뜨끈한 물 세숫대야에 받아서 푹 불궈서 벗겨라. 너, 담에도 이러고 나오면 그땐 열흘간 변소 청소시킨다."

가장 창피한 건 개울 건너에 사는 두 갈래로 머리를 땋은 이쁘장한 애리에게 손바닥을 맞는 장면을 들키는 거였다.

손바닥을 맞고 아파서 손을 호호 불면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못 본 척했지만 나는 쥐구멍이 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월남에 갔다 왔다고 자랑을 하는 혼자 사는 아저씨가 있었다.

여자 같은 곱상한 얼굴에  키가 훤칠해서 우리들은  그를 장대 아저씨라고 불렀다.

더구나 당시에 동네에서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라디오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들은 틈 만나며 그 아저씨에게 몰려갔다.

장대 아저씨는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어느 날부터 옥수수나 쌀, 콩 등을 튀겨주는 뻥튀기 기계를 가지고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튀밥을 튀겨주는 일을 했다.

우리들은 학교가 파하기 바쁘게 그리로 달려갔다.

집에 가봐야 소 여물이나 퍼주어야 하고 자칫하면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갈게 뻔한 거여서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장대 아저씨 근처에서 놀았다.

군것질거리 시원찮았던 겨울날

바짝 달구어진 뻥튀기 기계에 철망을 대고  노리쇠로 입구를 당길라치면 우리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뻥튀기 기계가 뻥~ 하고 굉음을 내면 옥수수 튀밥이 사방으로 날았다.

철망을 대긴 했지만 큰 압력이 터져 나오면서 철망 주변으로 튀밥이 튀어나왔다.

우리들은 우 하고 달려들어 여기저기에 떨어진 튀밥 낱알들을 알뜰하게 주워 먹었다.

사카린을 입은 구수한 옥수수 튀밥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주변에 앉아 놀았다.

그럴라 치면 엄마들이 찾아와 야단을 치고 어떤 아이는 부지깽이나 빗자루로 매타작을 당했다.

그리고 왜 아이들을 이곳에 모이게 하냐며 장대 아저씨를 나무랐지만 장대 아저씨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시커먼 땅바닥에 떨어진 튀밥을 그렇게 많이 주워먹었지만 배탈 한 번 나지 않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장대 아저씨는 귀찮게 구는 우리들을 나무라거나 내쫓지 않고 가끔씩 바가지에 튀밥을 쏟아주기도 해서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더구나 어떤 날은 공책이랑 연필을 공짜로 나누어 주었다.

동네 꼬맹이들은 연필과 공책을 받은 날 너무 좋아서 만세를 불렀다.

 

이듬해 겨울

장대 아저씨가 뻥튀기를 하지 않는 날들이 더러 있더니 어느 날부터 밖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입이 심심해졌고 추운 날 마땅히 갈 데도 없었다.

손바닥만 한 동네 논바닥에 물을 대고 얼려서  팽이도 돌리고 칼날 스케이트도 탔지만 먹을 게 없는 논바닥 놀이는 이내 싫증이 났다.

" 야, 장대 아저씨는 언제 뻥튀기 하냐?"

"나도 몰러, 니가 한 번 물어봐라. 니가 반장이니까 알아봐야 하잖아."

나는 반장이 알아봐야 한다는 말에 숙맥처럼 장대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저씨 강냉이 언제 튕겨요?

양지쪽에 앉아있던 아저씨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대신 웃기만 했다.

우리들은 당번을 정해서 가보고 혹시라도 강냉이를 튀기면 얼른 알려달라고 작당을 했다.

 

봄이 오고 6학년이 된 나는 학교만 파하면 소를 끌고 갱변으로 나가야 했다.

쇠풀이 있을만한 곳에 소를 매어 두고 싸리나무 바소구리에 쇠풀을 베어 담았다.

꿈에 떡맛보기로 튀밥을 튀기던 장대 아저씨가 이상하게 걷는다는 소문이 들렸다.

"어떻게 걷는데?"

"내가 보니까 이렇게 다리를 쫙 벌리고 게처럼 가던데."

"게가 걷는 거 본 적이 있냐?"

"책에서 봤잖아"

나는 그 소문이 궁금해서 학교가 끝나기 바쁘게 장대 아저씨가 사는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저씨를 볼 수 없었다.

 

그해 여름

동네 앞 개울가에서 목간을 하는 장대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아저씨는 키기 작아져 있었다.

왜 그럴까 싶어서 미루나무 뒤에서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목간을 마치고 둑으로 올라가는 아저씨의 다리는 매우 벌어져 있었다.

왜 저럴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됐지만 장대 아저씨는 더 이상 뻥튀기 기계를 돌리지 않았다.

가장 아쉬운 건 우리들이었다.

엄마에게 왜 아저씨가 뻥튀기를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 해 겨울이 다 가도록 장대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장대 아저씨가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더 이상 장대 아저씨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잘 모이지도 않았다.

 

생강나무 꽃이 얼굴을 내밀 무렵

동네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장대 아저씨가 바소 골 어느 무덤가에서 발견됐다는 거였다.

바소 골은 산세가 깊어 겨울이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후미진 곳이었다.

나는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었다.

지서에서 순경이 왔다 갔다고 했다.

한동안 시끌벅적하던 동네는 부침이가 시작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중학교 3학년 때

비로소 키다리 아저씨의 죽음에 관해 알게 되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도시의 삶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왔는데 소문을 추측하건대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병을 얻은 것 같았다.

건강이 나빠지자 활동하기 힘들어졌고 신변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였다.

발견될 무렵 소주병이 여러 개 있었고 그 무덤은 그 분 고모의 산소였다니..

겨우내 내린 눈이 그를 덮었고 매서운 추위와 깊은 산세로 겨울이 다 가도록 장대 아저씨를 발견하지 못한 거였다.

 

봄이 익을 무렵

까까머리 소년이 된 나와 친구들 몇은 그분이 발견되었다는 바소 골  그분의 고모님 산소에 찾아갔다.

그리고 피기 시작한 수국 몇 가지를 꺾어 무덤에 꽂아주었다.


 

 

 

 

 

 

 

 

 

 

처음엔 내 얘기구나 했습니다.
그러다가 장대 아저씨 얘기에 빠져들었는데 직접적인 대사는 없지만 빙그레 미소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엽제가 죽음의 원인이라니.........
참 슬픈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 보살필 사람도 하나 없었는지, 죽은 고모를 찾아갔는지 딱하기 짝이 없는 얘기입니다.
처음엔 키도 크고 곱상한 외모에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는데
몇년안에 급하게 변하더니 소문도 없이 사망했지요.
뻥튀기 기계를 보면 그분이 생각납니다.
어린 날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수국꽃을 들고 찾아간 소년들
그꽃을 받은 무덤의 주인은
어땟을까요?
마음이........소년들의 마음을 그려봅니다.


제주변에도 고엽제로 고통 받으시는
분이 계셔요.
체격도 좋으시고 운동도 잘하셨는데
몸의 중심을 잘 못잡으시고
보는 사람마저 조마조마하게 하시는
나라에서 연금을 조금 주신다는데
참 그렇다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글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동감이 늘 넘치셔요.
선생님 닮은 순수한 책을 .....새해엔
소망해 봅니다.





[비밀댓글]
마을마다 기막힌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꼭 있었지요.
몸과 마음으로 불행했지만 이웃의 배려로 살던 사람들
그렇게 비비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이웃이 많지 않습니다.
빗장을 걸고 살아야 하는 지금이지만 사람 마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먼저 손을 내밀어 볼까요.
'처음에는 내 얘기구나' 했다는 파란편지님 댓글에 빵 터졌습니다.ㅎㅎ
너무 웃겨서 배꼽잡고 웃었더니 우리 결이가 이상하게 쳐다보네요.
그 시절 사신분들에겐 다 비슷한 경험이었나 봅니다.
어떻게 소 엉덩이에 붙은 쇠똥딱지 같은 것이 손등에..
그 시절 많이 지저분한건 사실이었지만 좀 심하게 과장된 표현인거 같긴 합니다.

또 떨어진 튀밥을 알뜰하게 주워 먹었단 표현도 너무 재밌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상상이 되거든요.

장대 아저씨의 사후 삶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억울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주위에 많은거군요.
제 주변에선 보지 못했습니다.
살을 좀 보태긴 했습니다만 실제 제 손등은 거북이등처럼 갈라져서 피가 났지요.
날씨가 몹시 추웠고 가장 큰 원인으로는 따스한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ㅎㅎ

웃을일도 별로 없는데 어찌됐던 한바탕 웃으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눈물없이~
저 강을 건너야하는데

빛이
앞을 가리구나)))
코로나 강을 건너려면 아무래도 눈물을 더 흘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건너야지요.
그래야 예전처럼 살지요.
열무 김치님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전후 이태리에 등장한 네오리얼리즘의 영화 "자전거도둑"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아 뒤에 남는 묵직한 삶의 무게로 가슴이 답답해 오는......
오래전 방송에 나와 헤어진 가족과 재회하며 눈믈을 뿌리는 장면에서 그땐 모두 살기가 어려웠잖아요하는 분의 나이를 역추적해보면 60년대말,70년초입니다.
지난 시절을 기억하기 보다는 눈을 감고 싶었나 봅니다.
전후 교실도 없이 불타버린 학교에 지은 흙벽돌 교사에 상급생들은 가마니 깐 바닥에서 책상 걸상 없이 공부했지요
일학년인 우리는 운동장에서,등나무 밑에서 선생님이 종이에 쓴 아버지,어머니를 보고 외우며 공부를 했습니다.
군복무 시절 사단 본부 동창의 만류로 월남전 지원을 포기했습니다.
육사를 나와 월남에 다녀온후 고엽제 후유증으로 중령으로 예편, 사망한 이웃.
그의 아들은 20대에 목에 난 혹으로인해 부친을 따랐습니다.
해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교인, 후유증으로 태어나 아들은 정신 연령이 4-5세입니다.
평생을 아들 뒷바라지에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
정작 당사자는 보훈병원에서 2-3년 고생하다 하늘 나라로 떠났고 아들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40대 중반이 되었네요.
비극의 주인공들입니다.
뻥튀기 아저씨 ,그분이 사망한 고모의 무덤에 수국 몇송이 들고간 마음이 곱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가난과 고통의 시간과 역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50~70년대를 산 사람이면 비슷한 공감대를 갖고 있으리란 잠작입니다.
당장 의식주가 급했고 사회 인프라가 농경사회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설명하기 힘 든 부분들이 많지요.
하여 자녀들과 공감대를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냥
다름을 인정하고 사는 게 속 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살던 산골마을엔 아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강냉이 몇 말, 콩 한 두되,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잘라다 팔아서 주사를 맞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불과의 세월인데 아주 멀리왔다는 느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쓰신 댓글을 읽으며 지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장대아저씨 한숨소리가 깊습니다

그 세월속에
운명아 비켜라고 호언도 했을것이고
때로는 달빛 고운 강가에서
손도 잡아보고
이제는 겨울나무처럼
하나,둘 떠나가니

누가
가고 싶어서
걷고,강을 건너냐 마는
내 손바닥에 그어진
자서전과 예언서따라 가는길
나도 어느새
눈이 희미해져 길을 잃은듯 ᆢ
월남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경우를 더러 보았습니다.
미국이 월남전때 무슨짓을 한 건지..
가공할 위력에 애꿎은 피해자들의 마지막 삶이 억울하기 짝이없었지만 당시엔 그 까닭을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알고보면 그렇게 돈 벌어서 지금이 됐는데 모두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좀 다듬어서 수필로 만들면 멋지겠어요.
원고 15매 내외 정도로,
좋은 글은 고릴라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는 글이라고 하죠.
열무김치님 문장력이 참 좋으세요. 늘 느끼지만.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하게도 장대아저씨 얼굴이 지금도 산명하게 기억됩니다.
리디오 뒤편에 커다랗게 달려있었던 건전지
저녁이면 동네사람들이 라디오앞에 모여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듣곤 했습니다.
멀리와서 돌이켜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랑가는 모습은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은 사람들이 한국에도
꽤 있었겠다는 정도로나 생각했었거든요.
재작년 서울에서 만난 아주 가까운 친구가
어느 때보다도 쾌활하고 건강해서 짧은 우리
만남이 더욱 즐거웠는데, 그가 60년대 중반에
월남 파병에 지원해 다녀온 게 생각나더라고요.

열무김치님, 좀 어둡기도 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즐거운 연말연시 보내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노루님~!
그곳의 풍경을 구경하고 왔더니 어느새 연말입니다.
올해는 참 비루하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다니까 새로운 한해를 기다려봐야지요.
계시는 곳 어디서든 밝음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쓸쓸한 연말에 불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산수국을 아직 만나질 못했는데...
아이들의 순수하고 여린맘들이 모여 장대아저씨 고모 산소를 찾아들었다니,
부모님 산소를 찾지않고 고모 산소를 찾아든것도 사연이 있을테지요?
코 끝이 찡해집니다.
제 블 카테고리중 ' 강원도! 내맘을 흔들다.' 에
강원도 시댁 둔덕 아래 손바닥만한 구멍가게 마당에서 겨우내 튀밥을 튀기던 그 시절 풍경을 담은 글을 올린적이 있는데
아스라히 그 시절이 떠올랐다 사라집니다.
본문 글중에 갱변 바소구리 ...등 추억속에 묻힌 단어들이 방가움으로 다가섭니다.
저희 고향쪽에서 갱빈이라고 했거던요..
얼굴도 모르는 장대 아저씨를 떠올리면서
시골 옛집에 불쑥 찾아들던 전쟁중 손 다친사람들이 나타나 한껏 겁에 질리던 생각이 나네요
언젠가 저두 그즈음 이야기를 남겨 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감성의 결을 자극하는 글들이
블로그를 떠나지 못하는 미련으로 남아있네요..
아릿한 수필집 한 장을 넘겨봅니다
카테고리를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산촌의 겨울은 그야말로 정적의 미를 빼고나면 사실상 고독하기 그지없어서 아이들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었지요.
유일한 재미를 안겼던 뻥튀기아저씨의 몇 년 일기가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가는길에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과 미소들이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리라 위안해 봅니다.
특별히 나서진 않았지만 아이들을 좋아했거든요.

눈이 조금 내렸네요.
집합금지로 설레어야 할 연말이 참 쓸쓸합니다.
코끝이 찡합니다. 오래전 이야기를 잘 간직하고 계셔서 저희들에게 글로 보여주시니 고향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늘 건강하셔요 즐거운 성탄절과 새해 맞으시길...
반가워요 아울님.
그곳 사정은 좀 어떤지요.
지구가 몸살을 앓다보니 외국에 나가거나 국내에 들어와 있던 분들도 마음대로 출입국이 안되어 고민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백신접종이 시작되었으니까 머잖아 희망이 보이겠지요.
게신곳에서 건강하시고 무탈하시길 빕니다.
장대 아저씨!
그렇게 허허롭게 사는 것도 모자라서 고엽제로 후유증이 더 심해져서
혼자서 바쁜게 저 세상 가셨네요.

저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살던 곳이 학교에서 조금만 나가도 산 밑이고,
논 밭이였습니다.
산 밑에는 성냥갑 같은 상이군인들의 집이 지어졌고,
그 시절은 한샌병 환자도 있어서 논 밭으로 우리들이 나갔다가
한샌병 환자, 상이군인을 만나면 아무래도 쳐다 보아서 그랬나
막 혼을 내셨지요.

그 때의 그 땅들은 집들이 들어 찼고, 그 때의 꼬맹이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부산이라 목욕탕이 있었고, 수도물도 공동수도라 할지라도 있었고,
그 후 고학년 때 시골에 가서는 정말로 손등이 터져서 피가 나고, 발은 동상에 걸렸지요.
자기 오줌에 손을 담그고 그 오줌에 언 발을 넣었지요.
그 시절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산 사람들은 파란편지 선생님처럼 내 이야기인가?
하게 되는 그렇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다.
장대아저씨가 슬픔을 넘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셨습니다.

저가 자랄 때는 시골장에도 뻥튀기 기계가 없었는데, 열무김치님 어린시절에는
뻥튀기 기계가 있었군요.
뻥 ~~~하고 터질 때 귀막아라 하고
까르르 아이들은 웃고, 이제 보니
낭만이었습니다.
산골마을의 긴 겨울추위는 혹독해서 먹성이 시원찮았던 아이들에겐 마의 계절이었지만 뻥튀기 기계기계가 생기면서 지루한 줄 모르고 지나갔지요.
방학내내 그 근처에서 놀았는데 장대아저씨는 한 번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그런 아픔이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이런 비슷한 사연이 어디 한두 곳 이겠습니까.
한국 성장기에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답답한 연말이지만 휴일 평안하세요.
70년대 이야기를 읽고 또 읽고
내 이웃의 이야기 인듯
그 시절 생활 풍경이 그러 했으니
옛향수에 젖는 글입니다.
그땐 그랬지요..
그 시절 우리는 어려서 다행이었다 싶습니다.
예쁜 글 속에 머물다 가네요..

올해도 저의 곁에 이렇듯 늘 계셔주셔서 든든하고 고마웠습니다.

여말이 되니 자꾸 과거로 갑니다.
요즘의 시국이 답답하니 저절로 그리되는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뒤엔 항상 그늘이 있어서 독일에 가서 고생했던 광부나 간호사, 그리고 월남파병으로 생긴 수많은 사연들,
그 많은 사연들이 지금의 초석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여느 사업과 다르게 블로섬님의 수공업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월남전의 비애
고국에 돌아왔으나
월남전 보다 처절한 고엽제 삶
가슴 아려 오네요
아이들에게 튀밥같은
하얀 웃음을 던져주는
그 의미
세상을 초월하신 사랑의 미소가
고모님 사랑 고마워
그 무덤가에 던져졌다니
사랑이 찾아간 곳은
바로 사랑을 준 곳이라는
단편 소설 같은 난픽션
늘 건강하십시요


반갑습니다.
고요속에 성탄절이 저물어 갑니다.
후일 전무후무한 성탄절로 기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연제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에겐 그저 동화처럼 들릴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다니까 월남전은 완전히 끝난게 아니군요.

확진자 증가로 연말을 맞는 마음이 착찹하기 그지없습니다.
무탈한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에세이집 한권을 읽은 기분입니다
그시대의 우리의 자화상이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대나무 뿌리로 된 매로 손검사 발검사 손바닥 발바닥
엄청 맞은 것 기억이 납니다
저는 다행히도 조금 잘 사는 편이어서 부모님들께서 관리를
잘해주셔서 매는 안 맞고 살았습니다만....
저도 월남전에 다녀왔지만 고엽제 하도는 거리가 멀었는데
소총부대에서 모기와의 전쟁으로 많이 사용했나봐요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들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줄압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아..
월남전에 참전하셨군요.
그러시다면 고엽제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보시는 시선이 남다르시겠어요.
저는 그저 겪은 이야기에 살을 보탰습니다만 당사자분들에겐 그 후의 삶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짐작입니다.
글의 주인공 장대아저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만큼

연말이지만 기분이 뒤숭숭합니다.
이어지는 휴일 평안하세요.
거참.....
남의일 같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봅니다.
당시에 월남 다녀온 군인들 멋지고 부러웠는데.....월남에서 소포로 외제물건들 보내오기도.....
그것에 혹해서 73년도 6월 해병대 지원하여 9월에 자대에 떨어졌는데.....
제 기억에도 저희 부대에서 차출되간 선임수병중 월남 앞바다까지 갔다가 배를 못대고 빠꾸 했노라는....
배타고 가는중에 패망해서.....
뭐 그렇게 무용담으로 들었지요
저는 쫄병때라..... 한 1-2년 더 전쟁이 길었더면....?
에효~~~ 장대 아자씨 짠하네요. 전쟁터도 뽑기운 같아요.....
이런저런 세월의 상처들..... 씁쓰레 합니다.


저도 그런풍경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월남갔다온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상자에 처음보는 물건들을 꺼내서 자랑하던

그분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질병으로 고민하다 죽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멀쩡허던 사람이 몇 년 새 변하는 걸 보고 어린가슴에도 저으기 놀랐지요.
그 뻥튀기 기계로 요즘 말하면 동네 아이들의 스타였는데 그분의 최후가 너무 쓸쓸했습니다.

코로나로 쓸쓸하게 세상을 등지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착찹한 심정입니다.
빨리 이 어두운 터날을 벗어나야하는데
진행이 더디기만 합니다.
뻥튀기 아저씨
가슴시린 우리 역사속의 한 분이십니다
고모님 산소에서 생을 마감하신 그분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한참은 맴돌것 같습니다

손이 많이 터져서 피는 늘 흘렀었습니다
피난생활때지요
군불로 데워진 더운물은 순식간에 식어서 손등을 불린다는건 언감생심
덜뜨려진 손등은 허옇게 불어 터지고
지금은 그 이름조차 잊었네요
기름 종류던가요 말갛고 끈적한 물을 흠뻑 바르고 살짜꿍 혀를 대면 달큰했었어요

그때는 터져서 흉측했던 손등
지금은 장갑도 안끼어 망가진 손등에 주름까지로 흉측해진 손등
이래 저래 내 인생엔 고운 손등은 없었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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