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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아름다운 悲劇.... 영화 <아무르>

by *열무김치 2019. 12. 16.

 

 

 

희망의 메세지를 쓰던 연 초

추위가 물러나면 이내 훈풍이 불고 꽃이 피면 우리는 겨울을 잊는다.

이제 그 겨울은 당분간 잊고 지내리라.

그러나 짜증스러운 더위와 얼굴을 간질이는 가을바람은 한 장의 책 페이지를 넘기듯 지나간다.

곶감꼬지의 곶감을 빼먹는 즐거움이 유난한 것은 달콤함의 연속성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해를 보내고 다시 맞는 일은 태양계의 구분일 뿐 연속되는 무형의 시간세계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정말 미스테리 한 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시간이 우리의 삶을 물리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나 동 식물의 나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수없는 메세지를 보내 변화를 예고한다.

이를 목격하는 일이 일상이지만 우리는 일정 도착점에 이르기 전까지 이를 인지하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신이 이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못하게 한 것은 삶의 곡선으로 보아 큰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더라도 삶의 습기가 줄어드는 것을 목격하는 일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평생 갈구하던 행복이 변형되어 보이다가 결국은 낙엽처럼 추락하는 것을 발견하면 철옹성 같은 우리의 의지도 이내 색이 바랜다.

일정 나이가 되면 우리는 그 과정이 되도록이면 완만하기를 바란다.

 

 

 

 

굳이 바라보거나 선택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가야 할 길이 있다.

노후의 삶이다.

그 길은 선택사항이 아닌 지고 가다가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짐이다.

아무도 그 짐을 지고싶지 않지만 신에 우리에게 내린 가장 공평한 짐이니 불평을 할 수도 없다.

 

<영화 아무르>

2001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2013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미카엘 하네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노부부의 사랑과 죽음을 통해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질곡을 그렸다.

 

자식을 출가시키고, 단둘이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친다.
고령에도 꼿꼿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안느는 신체 오른쪽 마비가 찾아오면서 혼자서는 거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간의 삶과 미래가 두려워  입원을 하지 않으려는 아내

 남편 조르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지키기 위해 정성을 다해 수발을 들어준다.

그러나 남편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불구하고 안느의 병세는 더욱 짙어진다.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조르주는 서서히 지쳐간다.

부부가 살아오면서 향유했던 행복했던 지난 날, 아름답고 우아했던 아내가 처참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남편 조르주는 깊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마침내 그녀가 마지막을 품위 있게 마칠 수 있도록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사랑을 뜻하는 프랑스어 <아무르> 는 애정영화의 단골메뉴인 흔한 키스 장면이나 뜨거운 스킨 십 장면도 없다.

아내 안느의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나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조르주의 수심에 찬 얼굴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암시한다. 

영화 <아무르> 는 노화의 비극적인 면과 노인들의 슬픔을 잘 그려내고 있다.

젊은시절 안느는 음악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했던 사람도 병이 들면 결국 사회로 부터 격리된다.

세상의 바쁜 이야기들은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이 늙어가는 모습 , 더구나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20대에 크게 다쳐 1년 가까이를 누워 지내며 이를 절절이 느꼈다.

굳어가는 수치심이나 자존감은 병 든 자신을 점점 고립시키다  끝내 죽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 영화는 고독하게 늙어가는 노인문제를 제시해 어떤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정책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다.

노부부의 사랑과 회한, 허무한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본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통찰을 건넨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극단적인 호불호가 대립한다.

과연 조르주의 극단적인 선택이 안느의 품위있는 죽음으로 귀결 되었겠는가

노후의 병든 삶을 최악으로 이끌어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줌으로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공범으로 만들어야 사회성이 있다는 건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삶의 높낮이가 있을 뿐  늙음과 죽음의 그 과정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런 과정을 통해 고독해질 수 밖에 없는 노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말에 긴병에 효자 없다는 이야기는 부정이 아닌 긍정을 말하려 한 것 같다.

우리 삶의 끝 날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늙거나 병들어 소외 될 자신의 후일을 들여다보는 일은 쓸쓸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정해진 길이다.

사회가 핵가족화 되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노골화 될 것이다.

물론 조물주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이겠지만 아름다운 봄날이 아닌 가을 쓸쓸한 낙엽으로 지는 인생사는 가끔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더라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긍정하고 싶다.

빛나는 날이 있었고 쓸쓸하더라도 낙엽으로 내려야 다시 누군가의 봄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간 내 곁에서 머물다 떠나신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든 생각이다.

 

 

 

 

 

 

 

 

 

 

"지쳐간다"는 말이 자극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치지 않는다면 그건 삶도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지쳐가지 않는다면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벌레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승은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라고......
좋은 글, 좋은 사진 잘 감상하였습니다.
너무 오래 살다보면, 몸이 둔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힘도 둔해지고,
때로는 몸보다 생각하는 힘이 먼저 둔해지면 우리는 치매라 부르지요.
치매가 되면 옳은 생각을 할 수 없으니 나무둥치만도 못한데,
언제 우리 앞에 그런 일이 올지 모르니 살아 있으니 사는 것이 노년의 삶입니다.
노년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노인까지 살아지기도 하니 문제이지요.

열무김치님께서 모친 보내 드리고 많이 힘들어 하신다 싶었습니다.
암이 전신에 퍼져서 더 이상 치료 효과가 없다고 치료 중단이란 말을 듣고 온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도, 요양원도 가지 않고, 그 진통의 고통 견디면서 집에서 지내다 집에서 돌아 가신 분도 있으십니다.
삶은 각자가 다른 사람과 유대관계로 살지만, 죽음은 각자 자신만의 일이다 싶습니다.
어느 누가 그 답을 알 수 있을까요.
내 대가 자리를 비켜주어야
내 다음대가 또 충실히 이어가리라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또
가장 정확한
자연적이란 계산까지 번히 알면서
내 마지막을 아직 상상조차 못하니
한심도 하고 염치도 없는것 같아요

저 노부부의 현실
내게도 금방 당하리라

요즈음은
자주 자주 결심을 합니다
영감님과 구순히 보내자
불평은 꿀떡 목구멍으로 넘기자

싸다는 핑계로 슬쩍 상한 물건들
태산처럼 구입한다 해도
그냥 몰래 버리면 된다
참자 참자 참자 ...^^ ^^ ^^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생을 반추해보면
마지막 순간 만큼은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호상이란 단어를 쓰며
슬픔을 쓱 지워버렸던 순간이 있었답니다
때론 자책하기도 했고
때론 부끄럽기도 했지만
누구나 가야하는 길 ᆢ
나 또한 가야하는 길ᆢ
아버지처럼 늘 쓰시던 침대 라듸오 작은 방 하나에
딱 하루 죽 드시고
끝까지 화장실 볼일 다 보시고
잠들듯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 당시에 83세
당신의 출세한 장남 덕분에 어쩜 살아서도
누리지 못했던 마지막 순간만큼은 화려한 마침표를...


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때까지만
그냥 저냥 살아가다가
동백처럼 툭 ~'하며
마지막 점을 찍고 싶은게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길고....지리하지 않기를....
읽다가
잠이들고ᆢ
깨어서
횡설수설
우리 모두의 바램 간절합니다 저도 열힘히 운동하는 목적이 건강하게 살다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스채화님의 답글 동백처럼특
언젠가 저는 상가를 나오면서 동행한 친구에게
'나는 사흘 정도만 앓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그는 크게 정색하면서 '사흘이 뭐냐? 하루만 앓다가 가야지!' 하는 것이었지요.
원하는 바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게 정설인 줄 알고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법륜스님의 강연을 듣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하루만 앓다 가면 자식들이 '뭐가 급해서 이렇게 빨리 가셨냐'며 원망하니
적어도 석달은 앓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래야 자식들의 마음에서 아쉬움과 원망이 사라진다네요. ㅎㅎ

아무르, 저 영화... 저도 보았습니다.
아내나 제가 맞이해야할 궁극의 모습이라 굉장히 겸허해지는 마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고 하루하루 살아왔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했더라도
남겨지는 후회

먼저 가는 사람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남겨진 자의 몫

요즘 하나 하나 깨닫고 있습니다.

젊었을때 잘 살아야 노후가 아름답다는 것

풍요로움 보다는 애틋한
대화가 우선

선생님과 사모님
참 행복해 보이셔요.

어머님이 많이 행복하셨을 거에요.
사모님의 희생과 정성이 빛이나네요.

늘 따스한 블방 감사해요. [비밀댓글]
보신
영화에 대한 성찰 대단하신

누구에게나 다가올
그 시간에 대한 스스로의 잣대도 세워야할

그러는 마음도 상기네요
과연 담담하게 받아드릴수 있을까

요즘 영화 볼 시간이 없네요
아무르
가요 제목에도
시인들의 시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
기억해 두었다 저도 봐야겠습니다

저는 며칠전에 시동이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큰 감동을 못 느끼고 그냥 보는거라고 보고 왔네요..
끝이 너무 흐지부지 했다는 기억만 여운이 된듯 합니다.
윤슬이 반짝이는 강..
훗날 제가 건너야 할 요단강도 무수히 많은 윤슬이 저리 반짝여서
외롭지 않길 꿈꿔 보네요.
아무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 현실로 상영되어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영화 내용을 요점과 문제성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 정확하게 잘 짚어주셨네요.
노인연령이 급작히 늘어나는 우리나라도 심각한 노후 문제가 아닐수 없네요.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하는 조르주의 수심에찬 얼굴과
부인의 품위있는 죽음을 위해 취하는 행동....
비난보다는 오죽했으면....하는 옹호마져 생겨나네요.....
남의 같지 않아 보여집니다.
생활이 소 가족화 되면서..... 고독사도 늘고..... 안타깝네요.
너무 늦게 와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보지는 않았지만 들어서는 알고있는 영화네요
얼마전 여고친구들 모임에 가니 ㅡ덩치가 커서 회원이 20명이나 되는 ㅡ
올 한해 자녀를 1쌍 결혼시켰고
무려 네 분의 어버이가 생사를 달리했다는 말을
총무가 결산으로 하더군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노년의 삶이 머지않은 우리들의 미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갈테고
소멸이 또 다른 생을 잉태함이 세상의 이치임을
익히 알면서도 나만은 그순간이 오래오래
남았다고 착각하며 사는게지요


다시 읽었습니다.

이젠 남의 얘기 같지 않아요
철학, 죽음을 말하다 를 읽으면서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한 적 있어요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해 보이는
이제야 죽음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거죠

주위에 누군가 가고 나면
다시 한번 죽음을 짚어보는
언제 아무르란 영화 봐야겠네요
이제 다시 영화 보기 시작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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