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습작단편

야반도주 *

by *열무김치 2018. 5. 2.





봄날


 꽃잎이  지지 않았다면

사랑도 그리움도 지겨웠으리라





산골 다랑논 열 마지기래야  열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하늘바라기 천수답은 용하디 용한 봄비 덕으로 용케 모내기를 한다 해도 활착을 해서 가지치기를 하기란  놀부네 마누라에게 밥사발 얻어걸리기보다 더 어려웠다.

감질 나는 봄비는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강냉이 막걸리타령이 제격이어서  게으른 놈 핑계대기에 그만이라 논바닥에 올챙이마리라도 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어르신 올게 모내기는 지가 해주겄시요."

"자네가쩐 일로?"

동네 총각들은 유독 윤 씨네 어른께만 설설 기었다.

"알게 승남이 놈이 모내기 해 준다 두만."

"아따, 그놈이 속셈이 있는 갑제."

"무신 속셈?"

"몰라섬시 ?  지깐 놈이 부랄만 찼지 쪽박이제."

골 따라 벽차게 흐르는 개울이 듬성듬성 참꽃을 보여주었다.

일찌감치 참꽃 술거리는 따다 놓았으니 장에 가서 쐐주나 두 어병 사면 될 일이었다.

"지랄도 가지가지 허네. 아들도 아이고 그깟 참꽃 술이 뭐이 좋다고."

윤 씨 아낙은 밀주나 담그면 된다고 우기다가 술독을 뒷간 거름 더미에 냅다 팽개쳤다.

콩 팥 부치미를 할 때 쯤 사단이 나리라.


원순이, 두리, 삼순이, 먹자가 물이 오르자 동네 총각들이 몸이 달았다.

내리닫이 딸만 낳은 장 씨는 윤 씨가 술이 곤조가 될 때 마다 내지르는 아들타령을 듣기 싫어 엄한 사랑채 여물 솥에 장작을 우겨넣곤 했다.

"지 놈 집구석 씨가 안 좋은 거제. 뻑 하믄 지랄이여 지랄이. 지지바는 내 혼자 싸지르능감."

엄한 누렁이는 사흘이 멀다하고 매타작을 당했다.

제 놈도 눈치가 구단이라 장 씨가 부지깽이만 들면 뒤란으로 냅다 튀는 게 사람 못지않았다.

달포나 되어야 얼굴 내미는 구루므 장사는 강냉이 말이라도 받아가야 하는데 기척이 없었다.

뽀사시한 맨얼굴에 지 에미 바를 새도 없이 훔쳐 바르는 가시나들이 영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얼굴에 퍼 발라도 달라지지도 않을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뒷산 갈풀이 푸른색을 더하자 모판의 모가 한 줌씩 잡혔다.

갈을 꺾어 넣은 다랑논에 누리끼리한 물이 고이자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겨우내 여물이나 새기던 새끼 밴 암소가 대충 써래질을 끝내자 새벽모판에서 쪄낸 모춤이 동네 잔칫날 떡그릇 돌리 듯 구불구불한 논다랑이 여기저기에 던져졌다.

"논빼미가 영 설거워서 모살이를 지대로 하겄어?"

"그보단 하늘바래기가 더 걱정이제. 그전에 살아 붙어서 가지치기라도 지대로 했음 쓰겠구만."

동네 장정들이 들어선 손바닥 만한 논다랑이는 뒤로 물러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워쩐 일이여. 동네 장정들은 윤 씨네 섶에 다 들었구만. 모살이는 지대로 되겄어."

전노리를 이고 오는 윤가네 딸들이 보이자 총각들의 입이 벌어졌다.

"아, 이놈아 모심다 말고 웬 곁눈질이여."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윤가네 세째가 논두렁으로 올라오자 총각들이 우르르 달겨들어 국수채반을 받아들었다.

살풋한 얼굴에 홍조가 보이자 몸이 단 총각들이 몸을 꼬았다.

"육갑들을 허네. 저 놈들 진작에 알았다만."

연두색 저고리를 걸친 윤가네 세 째가 국수그릇을 펴놓기 바쁘게 총각들이 달겨들었다.

국수를 퍼 담는 손동작, 붉은 입술,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봉긋한 가슴과 실팍한 엉덩이를 훔쳐보느라 국수그릇은 뒷전이었다.

"이놈들아 빨리 처먹고 정심 전에 이짝 논 빼미는 끝내야 혀."

윤가의 잔소리 따위는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이었다.

희뿌연 막걸리 사발이 돌자 윤가의 잔소리가 기세를 올렸다.

"일은 검불 날리듯 허고 처먹기는.. 누가 밀주를 가져 오라고 혔어. 에미냐?"

윤가가 갈퀴눈을 하고 째려보자 사발에 술을 따르던 세 째가 후다닥 일어났다.

못내 아쉬운 건 동네 총각들이었다.

"에이고 어르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이놈아, 그따구로 에영비영 할거믄 집구석에 끼가라."

할수 없이 모춤을 잡은 총각들이 입을 내밀었다.

"내 참, 더러버서.."

세 째가 채반에 주섬주섬 그릇을 주워담자  별 말이 없던 승남이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바소구리에 모춤을 주어 담던 윤가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빨랑  안 끼가고 뭐하고 자빠졌냐.  굼벵이도 너그보다 낫긋다."


*************************************************************************************

윤가네 세 째가 승남에게 자주 웃는 얼굴을 하자 승남은 몸이 달았다.

윤가네 세 째가 지나다니는 행 길 미류나무 뒤에 서서 몰래 훔쳐보는 걸 모를 리 없는 승남에미는 부아가 돋았지만 다 큰 자식의 연분을 어찌 할 수도 없었다.

"갸가 워데가 좋다고 글카냐?"

뒤통수를 벅벅 긁던 승남이 초승달 눈을 뜨고는 언 송아지 똥 싸듯 주접거렸다.

"통통허니 이쁘잖여유"

"저런..뭔 놈의 종자가  지에비랑 빼다 박었냐. 갸가 워데가 이쁘다는거여. 내가 보기는 갸는 글렀다."

"엄니가 암만 그려도 난 갸가 좋아유"

"가시나들이 쎄고 쎘는데 허필 그 가시나여."

듣는 둥 마는 둥 승남은 휭하니 윗 골로 내달았다.

혀를 끌끌 차던 승남 에미는 아차 싶었다.

이미 혼기를 놓친 나이에 똥구멍이 찢어지는 살림에 설사 장가를 간다고 해도 탈이었다.

논마지기께나 가진 윤가의 벽 찬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그 놈 집구석이 본시가 남의 머슴이나 살던 하찮은 집구석이라고  스스로 업신여겨보아도

속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소시적 부터 남의 땅이나 얻어 부치던 승남 에비를 나무라 보았자 달라질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부아가 끓어올랐다.

"베라먹을 영감탱이를 믿고 살다간 늦 팔자가 사납지. 진즉에 보따리를 쌌어야카는데.."

곰방대를 물고 들어오는 영감을 보자 승남에미는 찌그덩한 개집에 땟국물이 덕지덕지한 개 밥그릇을 냅다 패대기를 쳤다.

"왜 그려?  개가 뭐라카남?"

"그 놈의 종자가 워디 가겄어?"

"이 놈의 여편네가 왜 또 발광이여?"

삽짝을 나오자 이내 좁다란 논둑길이 나왔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오락가락 들렸다.

윤가내로 접어들자 꼴에 한가닥 하고 산다고 쌍으로 세워져있는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잠뱅이를 걷어 올린 윤가가 모로 비딱하게 삽을 메고 들어오고 있었다.

윤가는 승남 에미를 보자 본 척도 하지않고 싸리나무로 대충 얽어놓은 사립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갔다.

"나 좀 보소. 두리 에비요."

승남 에미가 큰소리로 불렀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비쩍 마른 검둥이가 컹컹거리자 윤가네 댁이 삐끔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고, 워쩐 일이여?"

"내, 두리 애비 좀 보러왔소."

"우엔 일로?"

"당게 아이고, 두리 그놈의 가시나 말이요."
"우리 아를 와?"

"승냄이한투로 꼬리 좀 치지 말라고 그라지."

"고거이 뭔 소리여?"

윤가네 댁이 토끼눈을 하고 나오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윤가가 쫓아나왔다.

"울 아가 꼬리를 쳐?  요거이 뭔 귀신 씨나랙 까먹는 소리여?"

"몰랐소? 동네 소식은 다 아는 양반이 등잔 밑은 꼬까로 그런 갑네."

"가시나 단디 단속하소. 승냄이 그 아가 지금 지정신이 아이요. 허구한 날 끼어 나가고."

윤가가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더니 집안으로 들어가 두리 머리채를 끌고 나왔다.

"이게 뭔 말이여? 니가 승냄이 놈한테 꼬리를 쳤냐?"

윤가네 세 째가 깔깨눈으로 승남 에미를 훔쳐보더니 윤가 손을 뿌리치고 뒤란으로 냅다 달아났다.

"저거 보더라고, 내가 익은 밥 먹고 신소리 하겄소?"

윤가가 지게작대기를 들고 뒤란으로 쫓아가자 윤가 댁이 승남 에미를 붙들고 늘어졌다.

"에이고 ,이 놈의 여편네야. 누 아를 잡을라꼬 지랄이여. 두리 애비 승질을 몰라서 여까정 와서 분탕질이여?"


승남이 윤가의 곤조에 닥달을 당하는 날들이 많아지자 승남 에미는 몸이 달았다.

달래고 얼레어도 윤가네 둘째에게 맘이 빼앗긴 승남은 요지부동이었다.

동네에서는 둘이 벌써 볼 장을 다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윤가가 두리를 방안에 가두고 매타작을 했지만 강아지처럼 목줄을 할 수도 없어서 틈만 나면 달아나는 딸년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승남이 상사병이 나서 들어눕자 견디다 못한 승남 에비가 윤가를 찾아갔다.

"이거고 저거고 우리 아 죽게 생겼소. 너무 글카는 거 아이요?"

"허니께 송충이는 솔잎을 끍어야지. 누가 시킸소?"

"아는 살고 봐야 하는 기 아이요."

"데지거나 말거나 내 알거 없으이 여 와서 헛소리 그만 지꺼리. 등신 같은 자석, 가시나 땜구로 무슨 지랄이여 지랄이."

윤가가 입에서 나오는대로 마구다지로 내뱉자 승남 에비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썩을 놈아.  니가 언젯 적부터 마을 유지여. 새경이나 게우 받아 처먹던 놈이.."

승남 에비가 희번덕한 눈으로 거품을 물고 멱살잡이로  달겨들자 윤가는 승남 에비 머리를 냅다 들이받았다.

"니 놈이 새경 맛이라도 봤냐. 고따구로 하니까로 장레쌀이나 겨우 얻어 쳐 묵는거여."

두 사람의 멱살잡이는 기어이 진흙탕으로 나뒹굴고 끝이났다.

밥술이라도 더 챙겨먹은 탓인지 윤가 밑에 깔린 승남에비 꼴이 딱 물에 빠진 달구새끼 같았다.

주먹으로 얻어걸린 명치끝에서 꾸욱거리는 소리를 들은 승남 에비는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분을 이기지 못한 승남 에비가 집으로 돌아와 사랑채에 누워있는  승남을 걷어찼다.

"고까 가시나 땜시 에비 속 끍을거면 아꺼운 밥 축내지 말고 그만 디져라.  진즉에 알았다만 그 에비에 그 딸년이여."

꾸리한 담배연기를 내뿜자 돌아누운 승남이 꾸루대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습작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 *  (0) 2018.05.27
고독  (0) 2018.05.26
만덕이  (0) 2017.12.04
순정이 *  (0) 2017.11.29
파란초등학교 3  (0) 2016.1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