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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이야기

원주 베론성지

by *열무김치 2015. 3. 25.

원주 베론성지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베론성지는 사실 충북 제천시 봉양읍에 위치해 있다.

배론성지 (舟論聖地 Shrine of Baeron) 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 2리 646번지 일대에 비교적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베론이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럼 생긴데서 유래됐다고 한다.치악산 동남쪽 구학산과 백운산을 양쪽으로 둔 산골짜기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충북 기념물 제 118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 성지는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소유, 관리하고있다.

 

 

 

 

베론신학교는 1855년 조선교규의 장상이던 메스트르 신부가 설립한 우리나라의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구로 알려져 있다.

 

1856년 부임한 교장인 푸르티에 신부, 1861년 말에 부임한 프리니콜라 신부, 김 사도 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등 이 모여 신학생들에게 라틴어, 수사학, 철학 등의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신학생들은 마을에 기숙하며 신학교를 오가며 공부하였고 박해와 건강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학문에 임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2명의 신부와 장주기, 그리고 세명의 신학생이 순교함으로써 신학교는 문을 닫는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2003년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다.

 

 

 

 

 

병인박해(丙寅迫害)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 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층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기원한다. 당시 대원군의 동맹체결을 조장하던 선교사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가톨릭교를 배척하던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기로 결심,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이 포고되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 당한 것을 필두로 수 개월 내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해군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황사영 토굴

천주교가 탄압받는 당시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요청하는 백서를 이 토굴에 숨어 집필하였다고 한다.

 

*황사영백서: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당지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고자했던 청원서, 이 백서는 발각되어 황사형은 사형에 처해지고 천주교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토굴에서 썼다는 청원서

 

 

 

황사영 교구를 기리는 탑

 

 

황사영

 

1775년 서울 아현동 남인시파에 속하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1790년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 하였고 ,정조는 그를 불러 격려하면서 나이 20세가 되면 탁용해 주겠노라 약속 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해 정약현의 딸 나주정씨 난주 라는 아가씨와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시위가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돈간이었던 이승훈과  초창기 천주교 교회를 이끌던 정약종과 인연을 맺게된다.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게 되고 정약종, 홍낙민등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을 하게되고 처숙인 정약종의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면서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입교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충북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현재의 배론 성지) 속에서 지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동안 주문모의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중국 천주교 성직자 구베아 주교 에게 전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심 등과 함께 붙잡혀 모두 처형당하였다.

이 밀서를 '황사영 백서사건'라고 하며, 이 사건 이후 천주교는 반(反)국가종교로 규정되어 정부의 박해가 한층 더 엄중해졌다.

일각에서는 중국에게 청탁하여 대국의 힘으로 조선에게 압력을 가함으로 그를 빌미로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매국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하여

국기보다는 한 종교만을 위한 매국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배론성지에서 보듯 황사영은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부(1821~1861). 일명 정구()라고 한다. 세례명 토마스이며, 1836년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발탁되어 마카오 건너가 신학 공부하였다. 신학교 졸업한 우리나라에서 번째 신부 되어 포교 활동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자기들 유리한쪽으로 교리를 만들어 교회나 종교단체를 스스로 우상화 한 점이 크기 때문이다.

신앙의 순수함이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를 당하거나 목베임을 당하는 문제는 얘기가 다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초대교회의 모습이 처음부터 잘 못 되었다는게 아니다.

이를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한국의 문화를  버드나무 휘 듯 이해하여 보듬지 못하고 대나무 부러지듯 부러진것은, 처음부터 잘 못 이해 되어진 성경의 교리부분의 영향이 크다는 걸 말하고 싶은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조선의 입장과 단칼에 맞짱을 떠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면 이는 너무도 무모했다는 생각이다.

일각에서는 동굴에서나 발견되는 문서조각을 모아 짜집기한 사막의 잡신의 기록을 성경이라고  폄하하지만  66권을 꿰어보면 성경은 지극히 지식적이고 六何原則에 의한 기록물이다.

이렇게 말함은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하지만 오랜세월을 거치면서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 핵심은 창조주가 죄로 가득찬  세상을 불쌍히 여겨 구약을 통해 예수를 보내겠다고 예언하였고, 그 예언대로 예수는 우리들에게로 와서 율법으로 통용되는 죄의 삯을 십자가에지고 가면서 죽음이 아닌 사랑과 이로인해 얻어지는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이 전파되면서 핵심이 아닌 곁가지인 미신숭배나 우상숭배 제사문화등이 걸림돌이 되어 본래의 취지가 사장된것은, 예수는 사랑과 생명이라는 대 주제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하면 안되고 또 어떤것은 교리에 어긋난다는 사람이 만든 교리부터 들여밀었기 때문이다.

오랜세월 자기의 영역이 뚜렷했던 한국의 입장에선, 성경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부딯칠 수 밖에 없는 당대의 문화와 排他的인 교리의 갈등은 자연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어느 종교던 나름의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시행착오라는게 선교의 문제에 있어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흡수하여 감싸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맞서 내것만이 옳다는 식의 항거나 투쟁하여 이겨내야 한다는 쪽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종교는 세상의 전쟁보다 더 잔혹한 피를 부르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과거뿐 아니라 작금의 종교분쟁을 보더라도 이는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지는 세계 도처의 피를 부르는 다툼이 정치적 이념의 전쟁보다 훨씬 강도가 강하고 피해가 막대함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성지를 만들고 , 성지를 돌아보는 사람들이나 종교 기득권들이 지난 과오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저울질 해보고 앞으로의 신앙생활을 가다듬어 본다고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배론성지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3월 하순이건만 이곳의 봄은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다.

제천 의림지

 

 

 

 

결론이 참 좋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어제 선배 한 분을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평생을 기독교 신자로 생활한 자신이 보기에도 주변에 기독교 신자이면서 오히려 이기심이 짙어진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래, 제가 위로한답시고 이야기했습니다.
"선배님, 그 사람들은 목사라 해도 신자가 아닙니다. 종교를 생활의 방편으로 여기는 무리들입니다."
아, 베론 성지는 의림지와도 멀지 않은 곳이로군요.
관광버스를 타고 제천을 거쳐 정선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차창에서 본 제천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정겹고 아기자기 했던 기억입니다.

김훈의 소설 <흑산>을 읽으면서 베론 성지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생생한 사진으로 대하니 바로 옆에서 구경하는 느낌입니다.
가을의 베론성지
참 아름답지요
어느 종교나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한 맘을 갖으라 하고 좋은 것을 권면하는데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도 하고 내 밥그릇은 철저히 지켜야 하고
심지어 개신교와 천주교간에도 반목이 있고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파가 틀리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조금 힘든 것이 현실이네요.
원주 성지, 한 번 쭘 가보고 싶은 곳이지요.
불가해한 길의 섭리, 5월에 떠나는 순간 이미 황홀경에 빠져듭니다.
펼쳐진 올해의 5월에는 마음 먹었던 모든 일들이 잘 이행되기를 소망합니다.
건강과 행운이 함깨하는 더없이 좋은 한 달 되세요.
조선 후기의 역사를 보면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이 많았죠.
그런 갈등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는 성지들이 있었네요.
유익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아^^ 강원도는 제 생에 딱 한번 가 봤는데...베론 성지 가보고 싶네요.
황사영이 남인이었군요. 윤선도와 정약용도 남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정약종이 정약용의 셋째 형이었네요.
좋은 게시글 잘 읽고 나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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