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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단편, 장편

차돌광산 아가씨 5

by *열무김치 2024. 9. 14.

*지난 이야기*

군 입대 전 전라도 군산에서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나는 나무 도시락 공장을 운영하다 사업을 접고 깊은 산골에 차돌광산 사업을 시작하다가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광산 일을 전혀 모르는 데다 험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그곳에서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내는 순영이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하는 일이 고단하여 이성에게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왈가닥 성격인 그녀와 티격대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타 지역에 원석을 납품하다가 내 제안으로 우여곡절 끝에 차돌을 가공하는 공장을 세우게 되지만 그 사업은 초반부터 벽에 부딪치게 되고 운영자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계에 몰리게 된다.
군 입대를 연기한 나는 공장 일에 매달리다가 임금을 주기 위해 광산으로 갔다가 순영이 광산일을 그만두고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과 순영이 숙박을 하던 주인집 딸이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녀는 그녀 외삼촌이 근처에 사는데 마을 이장을 맡고 있으니 한 번 부탁을 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자존심이 상한 나는 이 일은 내 문제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공연하게 소리를 질렀다.
"증말로 요상하네유. 그런다고 돈을 달라는 것 두 아니고, 보니까니 빨랑 공장부터 돌려야 하는 거 아녜유?"
어느 순간부터 내 일에 간섭을 하는 것 같은 그녀가 내심 못마땅했지만 사실 몸과 마음은 반대로 가고 있었다.
"아니, 뭘 안다고 돕니 마니 하는 거예요. 그냥 광산일이나 열심히 하라 구요."
내가 공연한 신경질을 부리자 멀뚱이 바라보던 그녀가 하늘을 향해 혀를 내밀더니 작은 보따리를 하나 내 밀었다.
"이거이 며칠 전에 캔 건데 씰만해유. 방맹이로 넙데데 하게 두들겨서 고추장 발라 구워서 먹어봐유. 맛이 괜찮아유."
"그게 뭔데요?"
"아, 보면 몰라유?"
보자기를 풀자 굵직한 더덕이 나왔다.
"아니, 이런 걸 뭐 하러 가져와요. 누가 먹는다고.."
듣는 둥 마는 둥 그녀는 이미 공장 문을 나서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며칠 간의 대립이 있었고 관에서 나와 중재를 하는 등의 마찰이 있었지만 동네에 발전 기금을 내어 놓고 마을 사람들 일부를 고용한다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그녀의 외삼촌 역할이 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광산에 올라간 나는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해결이 잘 됐다믄서유? 것 봐유. "
"여튼 고마워요. 외삼촌께서 힘을 썼다는 거 들었어요. 누구 도움을 받기 싫었는데.."
"무슨 일이등 간에 똥고집을 부리믄 못 써유. 사람이 꾀를 써야지유."
"그래요. 똥고집을 부려서 미안해요. 아주 아주 고마워요. 이제 됐어요?"
"아고야..그 씰데없는 똥고집은 여전하시네유."
"에이참, 똥고집이 뭐야. 아가씨가 무슨 말 뽄새가 그래?"
그녀는 주먹을 치켜세우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잘났어, 증말"

남의 공장에 물건을 대던 경험으로 공장을 짓고 가동을 시작했지만 원석을 캐고 운반하여 가공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중고 기계는 숙련 미숙으로 툭하면 멈춰 서고 한 번 멈추면 수리를 하여 다시 가동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물건을 대던 공장에서 사정 사정 해서 데리고 온 이 분야에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던 박 기사는 기계가 낡아서 그렇다며 애초에 새 기계를 샀어야 한다며 투덜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가공한 차돌을 산업 현장이나 건축 회사에 납품한 뒤 대금 결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약속어음을 남발하는 업체들의 사정과 달리 당장 광산과 공장 인부들의 인건비며 운반비, 전기료, 각종 경비를 제때 처리할 수 없어서 시간이 갈 수록 공장 일은 꽈배기처럼 꼬여가고 있었다.
나는 밀린 대금을 결제 받기 위해 수시로 서울과 인천을 들락거렸다.
자가용 승용차가 없었으니 가공한 차돌을 실은 트럭을 타고 서울을 갔다 오느라 이틀을 허비했지만 사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집안에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모두 처분하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경북 문경의 새자뜰 논 열 닷마지기와 대리 경작을 맡겼던 밭 2000평을 모두 팔아 공장에 투입하였지만 잠시 반짝 했을 뿐 사정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귀한 땅을 처분하는 일은 죄를 짓는 것 같았지만 막상 필요한 돈으로 바꾸는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간단했다.
부동산 매각 대금이 제법 되었지만 인부들의 임금이 몇달씩 밀린 데다 공장의 기계 수리와 운반비에 들어가는 비용이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다.
마침내 이웃을 비롯한 사돈의 팔 촌 까지 돈을 빌릴만한 곳은 억지 맞보를 서가면서 까지 돈을 빌렸다.
그러나 미지근한 상황은 그때 뿐 판매 대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형편이 반복되었다.
동네에서는 윤가 부자가 되지도 않는 광산 사업을 벌리다가 쫄딱 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으로만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있는 재산 다 팔아 올리고 대추나무 연 걸리듯 여기 저기 빚을 지자 걱정이 태산 같은 어머니는 끝내 몸 져 누우셨다.
누님들과 매형들이 최대한 돕느라 애를 썼지만 그 살림이라는 게 아이들 소꿉놀이 같이 불 보듯 뻔한 거여서 서로 힘만 드는 꼴이었다.
밀린 임금 때문에 닥달을 받던 매형이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처남이 군대 가는 거 좀 연기를 해야 할 거 같아.
장모님도 편찮으시고 공장 일도 이 모양인데 덜렁 가버리면 좀 그렇지 않겠어?"
"제가 입대를 늦춘다고 뾰족한 수가 나겠어요?"
"어허, 이 사람이, 그게 장남으로 할 소리야? 그럼 여기가 죽이 되든 말든 상관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왜 공장을 짓는다는 말은 꺼내 가지고 이 모양을 만드는 거야.
그냥 차돌 원석이나 팠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고."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매형도 팔자를 고칠지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결정은 아버지가 하신거지 내가 무슨 무당도 아니고..."
"하이고야, 언 송아지 똥 싸듯 말은 따박따박.."
매형의 험상궂은 얼굴을 본 나는 춘천으로 올라가 입대 연기를 신청했지만 그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입대 연기도 합당한 사유가 필요했고 입대일이 가까워 불가능하다고 했다.
맥이 빠져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동네 이장으로 부터 2대 독자이니 서류를 갖추어 다시 한 번 신청을 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추천서와 함께 필요 서류를 갖추어 춘천으로 다시 올라갔다.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장 운영에 관한 서류도 함께 제출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힘들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보고 군에 입대하는 것에 내심 불안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광산 임금이 계속 밀리자 퇴근 무렵 그녀가 불쑥 찾아왔다.
"뭐, 볼 일이 있어요? 임금 문제라면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은 아무리 졸라도 돈이 없어요."
듣는 둥 마는 둥 무슨 말을 할 듯 말듯 망설이던 그녀는 불쑥 누런 봉투를 하나 내 밀었다.
" 뭐에요?"
"그냥.. 도움이 될까 해서유."
내가 선듯 봉투를 받지 않자 그녀는 내 손목을 꽉 움켜쥐고 강제로 봉투를 쥐어 주었다.
"뭔데 그래요?"
그녀가 건넨 봉투를 열자 제법 많은 지폐가 들어 있었다.
"계속 돈도 안 나오구, 보니까니 행편이 영 아닌 거 같아서유. 보태서 쓰세유."
"아니, 임금도 못 주는데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됐으니까 도로 가져 가세요."
"그러지 말구유, 왕가뭄엔 접새기물도 귀한 법이래유. 그냥 쓰세유.
공짜로 주는 건 아니구유, 낭중에 돈 많이 벌면 그때 꼽배기로 돌려 줘유."
"생각은 고맙지만 됐어요. 이 돈으로 해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내 하는 모양새가 같잖게 보였는지 그녀가 소리를 꽥 질렀다.
"굶어 죽는 사람이 무신 놈의 똥고집에 자존심은ᆢ
하여튼 난 줬으니까 더 이상 난 몰라유."
그녀는 다시 쥐어 주었던 돈 봉투를 냅다 던지고 산비알로 치 뛰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입영 연기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입영 연기 통지서가 날라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형편으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입영 연기를 받은 나는 죽기 살기로 공장일에 매달렸다.
전라도로 내려가기 전에 교회학교 교사로 활동을 했기에 그 무렵부터 다시 교회에 나가 교회학교 교사를 맡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주일 날 잠시 일을 놓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지내다 보면 마음도 가라 앉았고 새로운 힘도 생겼다.
교회에 낡은 오르간이 있었는데 군 입대 전까지 찬송가 반주를 맡아서 했다.
아내를 만난 것도 오르간 반주가 인연이 되었다.

*입대 후 군 부대 근처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를 맡아서 하다.


 
어느 주일날 오르간 앞에 앉아 찬송가 반주를 하다가 목사님 설교 시간에 오르간 옆에 앉아있던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설교 후 기도가 끝나고 찬송가를 연주해야 하는데 내가 반응이 없자 목사님이 큰 소리로 불렀다.
"여기는 여관이 아니에요.얼른 일어 나세요."
깜짝 놀라 일어나 입가에 흘린 침을 닦자 교인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눈을 비비고 오르간 앞에 앉아 주보를 보고 찬송가를 찾고 있는데 그 모습이 보기 그랬는지 목사님이 반주 없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몇몇 교인들이 따라 불러서 민망한 얼굴로 따라 부르다가 앞을 보니 웬 아가씨가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가씨였다.
나를 알고 있나?
순간 당황스러워 얼른 오르간 밑으로 몸을 숨겼지만 찬송가가 끝난 후에도 얼른 일어날 수 없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장로님이 나를 불렀다.
"요즘 피곤한가 봐요.전에는 안 그러더니 찬송가 반주를 하는 사람이 잠을 자지 않나, 왜 그래요?"
"그러게요. 저도 모르겠어요."
"차돌 공장 일은 잘 돌아가요?"
"그게.."
대답을 하다가 밖을 보니 아까 입을 가리고 웃던 아가씨가 교회당을 나서고 있었다.
부리나케 밖으로 나오자 재정을 맡고 있는 집사님이 나를 불렀다.
"어디 가요. 오늘 재직회의 있잖아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갑니다."
나는 뒤도 돌아다 보지 않고 아가씨 뒤를 따라붙었다.
"아니, 저 사람이 요즘 왜 저래?"

다른 사람과 비교해 키가 훤칠한 아가씨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키가 더 훌쩍 해 보였다.
부지런하게 뒤따라 갔지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뒤따라 가며 주뼛거리자 내 모습이 좀 그러했는지 같이 가던 손집사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꼭 똥마려운 강아지 같네. 왜, 무슨 할 말이 있어? 나는 아닐 테고 , 저 아가씨?"
"에이,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이마에 떡하니 써 있는데.
재직회도 참석하지 않고 헐레벌떡 뛰어온 걸 보니 아가씨 말고 뭐, 집에 호떡이라도 붙여 놨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본 손집사가 끌끌 대며 아가씨를 불렀다.
"OO씨, 여기 윤 선생님이 할 말이 있다는데?"
순간 당황한 나는 손집사 입을 가로 막았다.
"아니, 왜 그래요. 내가 언제."
빙긋이 웃던 그 집사님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내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때야. 잘 해 보라고."
내 행동을 지켜보던 아가씨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얀 손에 들려진 검은 성경책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양쪽으로 짧게 묶은 머리에 꽂힌 분홍색 머리핀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짧은 치마에 가려진 하얀 다리가 눈부시게 빛나더니 이내 현기증으로 변했다.
오줌을 누고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아이처럼 허둥대던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저기..혹시 저를 아세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더 할 말이 없으면 가도 되지요 하는 표정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반드시 끊어진다는 말과, 인연은 서로의 삶에 함께하는 순간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인연이 깊으면 거리를 넘어선다는 말을 읽었던 기억에 용기를 낸 나는 얼른 그녀를 따라내려 갔다.
"저기요..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녀는 헐떡 대는 나를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예배 시간에 저를 보고 웃었는데 왜 그러셨나요?"
순간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짧게 웃었다.
이걸 질문이라고 하다니..
난 내 입을 쥐어 박았다.
"그냥요.머리 모양이.."
"네? 내 머리가 우스워요?"
"아ᆢ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해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머리가 어떻다는 거지?
"아. 미안해요. 먼저 가겠습니다."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집으로 내려온 나는 얼른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거울 속에는 짚북더기 같은 장발에 쥐 집을 지은 것처럼 꼬질꼬질하게 엉켜 있는 부시시한 얼굴이 염하다 놓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ᆢ
이런 이런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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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그간 밀렸던 자재 대금이 일부 들어와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광산을 찾았다.
머리를 짧게 깎고 말끔하게 차려 입고 내려간 나를 본 인부들이 돈 냄새를 맡았는지사무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작업반장을 불러 그녀에 대해 묻자 몰랐느냐고 되물었다.
"그만 둔 지 열흘이 넘었는데 감독이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하네유?"
"그만 두었다구요? 왜 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워쪄유. 돈도 안 나오고 그러니까 괜뒀겠지유."
"아니, 그러면 반장님이 저한테 말을 했어야지 왜 가만히 있었어요?"
"순영이 갸가 말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지유. 내가 무슨 갸 앞잽이도 아니구."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팔짱을 낀 작업반장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니, 시방 왜 화를 내는거유? 한다고 했으니까 시키긴 했지만서두 돌 깨는 일이
여자가 할 일이유? 그만두기 잘 혔지. 뭐, 마음에라도 둔 여잔가? 괜히 승질을 부리네"
"뭐에요? 사람이 없어졌으니 하는 말이지. 왜 쓸데없는 상상을 해요."
'"아이고, 저러니 더 이상하네. 윤 감독 지금 이상한 거 알지유?"
처 삼촌 벌초하듯 돈을 나누어 주고 광산을 내려온 나는 부리나케 묵었던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 없었다.
집도 텅 비어 있었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에 얼른 내려오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있자 그녀의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사를 하는 나를 보더니 대꾸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등에 걸머졌던 망태기에서 무슨 뿌리를 꺼내던 그녀의 어머니께 다가가 급하게 물었다.
"저기, 순영씨는 광산을 그만 두었다는데 어디 갔나요? 집에 없네요."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갸가 말하지 않던가요?"
"무슨 말이요? 저는 한동안 공장에서 있어서 오늘 처음 알았어요."
"다 말하고 간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어디를 갔어요?"
"예, 그게.."
" 알라고 할 거 읍꾸, 제 집으로 갔으니께 더 이상 찾지 마시유."
그녀의 아버지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오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 말했다.
"예? 여기가 집인데 어디로 갑니까?"
곰방대를 피워 문 그녀의 아버지가 침을 택택 뱉으며 중얼거렸다.
"갸 집이 여가 아니유. 글고 갸는 내 딸도 아이고 아무 사이도 아니유."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간 알 만도 했을낀데 젊은 양반이 눈썰미가 영 아니구만. 내가 말 한대로유.
그니까 더 묻지 말고 찾지도 마시유."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머리가 하얗게 서려오고 있었다.
"어디로 갔나요?"
"몰라. 더 이상 묻지 말라니까."
"그동안 일 한 임금도 줘야 하고 제가 도움도 받았는데 갑자기 없어지니 당황스럽네요. 뭐,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따 이 양반, 우리도 몰러. 갸가 그냥 살던 대로 갔어. 그게 다여."
"그럼, 아무 연고도 없는 아가씨가 이런 산골짝에 왜 들어 왔나요?"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만 가세유. 괜히 저 양반 승질 건드리지 말구. 더 나올 것두 없구"
그동안 밀린 그녀의 임금을 전해주라고 하자 전해 줄 방법도 없고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이니 받지 않겠다고 했다.
떠밀리다시피 집을 내려온 나는 그녀와 토닥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개울가에 내려가 땅거미가 밀려올 때 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딱히 그럴만한 까닭이 없었음에도 수 일이 지나도록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공장에 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니는 무신 근심이 있나? 왜 그렇게 축 늘어져 있노. 지금 행편도 오그랑 바가진데
힘을 발끈 내야지 늘게져 있으면 되겠노 . 도라꾸 타고 서울에 가서 어쨌등간에 돈을 받아 오그라."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에 어디든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트럭에 올라 공장을 빠져나왔다.
"요즘 얼굴이 많이 말랐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에 왜 그래?"
"그래 보여요?"
"내가 맞춰볼까?"
"아저씨가 뭘 안다고.."
"윤 감독, 그 아가씨 때문에 그러지?"
트럭 기사가 순영이 이야기를 꺼내자 머리가 뜨끔해졌다.
"무슨 얘기예요. 그 아가씨 그냥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 중 한 사람인데."
"그러니까ᆢ
윤 감독이 눈치채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아가씨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네요. 아저씨는 어떻게 아신 거에요?"
'돌 실어 나르다 그 집 양반하고 술 퍼먹다 알게 됐지. 그러더라고 자기 딸이 아니라고. 그 아가씨가 그 양반들하고 너무 닮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
안흥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몇 가지 더 물었지만 트럭 기사는 더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윤 감독이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서 뭘 하던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넌지시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참으로 괴이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더구나 조건 없이 상당액의 돈 봉투까지 주고 간 사람이 아닌가.
서울을 다녀온 뒤로도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버릴 수 없었던 나는 공장 낙성식 무렵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을 도와준 그녀의 삼촌이라는 사람이 생각나 퇴근 후 그 사람을 찾아갔다.
나를 본 그는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웬일이시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다고 하자 그는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처녀 일로 온 모양인데 미리 말하지만 난 그 애 삼촌도 아니고 아무 관계도 아니오. 하도 매달리기에 좀 거들었을 뿐이지."
"그럼 , 전혀 모르는 아가씨였다는 말인가요?"
"글쎄, 그렇다니까."
"전혀 모르는 아가씨인데 부탁은 뭐고 거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 게.."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들어온 아주머니가 말을 막았다.
"이 양반이 구장이라고 하니까 뭔 말을 들었는지 보루 담배랑 돈 봉투를 들고 와서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합디다. 첨에는 윤 목상하고 친척쯤 되나 보다 해서 몇 번 거절하다가 하도 매달리기에 처녀를 봐서가 아니구 윤 목상 어른을 봐서 몇 마디 거들어 준거지 딴 뜻은 없어요."
"돈 봉투요?"
"안 받을라구 했지. 그런데 구들짱에 자꾸 던지고 가니 어쩌겠수.
윤 목상 어른이야 면이나 군이 다 아는 사람인데 덮어놓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구.."
"그럼, 혹시 그 아가씨 어디서 살다 온 사람인지 알고 있는 건 없나요?"
"난 밤나무둥치 그 술 곰탱이 친척인 줄 알았지 내사 순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어."
시큰둥한 그의 말을 듣고 있기가 거북해서 그곳을 빠져나오다가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그곳을 돌아다 보았지만 무슨 일인지 두 사람은 기척도 하지 않았다.

광산에서 채굴한 원석이 공장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가공한 차돌 판매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인부를 줄이고 광산일을 단축하는 등의 궁여지책은 시간이 갈수록 옹색해지고 있었다.
생각 끝에 아버지에게 당분간 공장을 세우는 게 어떠냐고 말씀을 드렸다.
술을 잔뜩 먹고 들어온 매형은 나를 보더니 욕지거리를 해댔다.
"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든다 더니 처남이 그래. 이제 어쩔 거야.
다 말아먹고 어디 이사도 못 간다구. 맞보에 걸려서 밤에 도망도 못 가게 생겼다니까.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이 철딱서니 없는 자식아."
성격이 몹시 급한 매형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자상한 사람이었는데 술을 먹고 대차게 불평을 해 대는 매형을 보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누가 망하려고 사업을 해요. 다 돈 벌려고 그런 거지. 그게 왜 내 책임이에요.
매형도 앞장을 섰잖아요."
"시끄러, 지금 같아서는 도망을 가등가 해야지 돈에 졸려서 살 수가 없잖아.
이제 외상도 안 준다 구."
공장 가동을 멈추자 빚 독촉이 거세졌다.
가공한 차돌을 납품한 회사에 찾아가 죽기 살기로 매달렸지만 극히 일부만 결재가 될 뿐 자기들도 건설대금을 받지 못해 답답한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해 겨울은 잔인할 만큼 추웠다.
가동을 멈춘 공장은 물이 그대로 얼어붙어 마치 얼음을 만드는 공장 같았다.
매일이다시피 찾아와 빚 독촉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머니는 문을 걸어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금 마련을 해 보겠다며 객지로 나가자 채권자들이 더욱 거세게 나왔다.처음엔 앞에 서서 나를 막아주던 매형도 더 이상 버티기 힘이 들었는지 어느 날 가족들을 데리고 슬그머니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다.
동네에서는 이제 윤가네가 떨거지 신세라 윤 목상 그 양반도 이제 운빨이 다 되었다는 비아냥이 동네
안주거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교회에 가는 시간 말고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찾아와 봐야 건질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빚 독촉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지만 한시도 마음이 편치않았다.
주일 날 교회에 가는 걸 안 빚쟁이들이 득달같이 쫓아왔다.
"하이고, 무슨 낮짝으로 교회를 나가나. 그런 심뽀로 무슨 천당을 간다고 그래."
빚에 쪼들린 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두려워 교회에 나가기 싫었지만 이를 무릅쓰고 나간 건 교회에서 만난 나를 보고 웃던 아가씨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난 그 날 뒤로도 간간이 교회에 나왔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려워진 공장 때문에 다른 곳에 관심을 둘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교회에 갈 때 마다 얼굴이나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고, 신수가 훤해졌네. 공장일이 잘 풀려가나 보지?"
교인들이 농담 반 진담 반 놀렸지만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객지로 나간 아버지는 몇 달이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겨울을 넘기면서 멈추어선 광산과 공장의 기계들은 벌겋게 녹이 쓸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공장을 둘러보러 갔던 나는 교회에서 만난 그녀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걸 알았다.
앞일이 막막하여 마음이 착잡했던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녀가 산다는 곳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예배 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인사치레 정도였으므로 그곳을 찾아갈 이유가 없었고 만나서 할 말도 없었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몇 번을 물어 그녀가 산다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나지막한 산 밑에 자리한 갈로 지붕을 얹은 작은 집이었다.
올라오는 내내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만큼 외딴곳이라 가다가 엎어져도 도움을 바랄 수 없는 곳이었다.
소 잡은 데 개 어르대듯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었다.
해가 뉘엿해지자 한기가 몰려왔다.
집 안쪽을 찬찬하게 살펴보았지만 몇 가지 농기구가 걸려 있을 뿐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까 더 살펴볼까 망설이는데 부엌 쪽으로 난 낡은 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져 허리를 구부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큰 그릇에 물을 담아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 그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냥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쥐를 본 고양이가 엎드려 기듯 살금살금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문틈으로 안을 살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똑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그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문을 더 벌리고 안을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어떤 놈인데 남 집구석을 염탐하는 기야?"
뒷덜미를 바짝 잡힌 나는 기겁을 하고 주저앉았다.
턱수염이 그득하고 얼굴이 우락부락한 산적 같은 사람이 낫을 들고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었었다.
"뭘 훔치러 온기야? 도둑질을 할라믄 있는 데 끼 가야 먹등가 말등가 하지 여그에 뭐이 훔칠게 있다고, 요 쥐새끼 같은 놈."
"그게 아니에요. 전 도둑이 아니라니 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고럼, 왜 남의 집을 무당 점 보듯 쳐 보는 거야."
"그게요. 사람을 좀 만나러 왔는데요."
"사람 누구? 어디서 굴러온 놈이야."
밖이 시끄러웠는지 그녀가 쫓아 나왔다.
그에게 멱살을 잡힌 나를 본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그 모습을 들킨 나는 너무 창피하여 좀 놔 달라고 사정했지만 우악스러운 그는 내 멱살을 더 세게 조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할금거리민서 누구를 만나러 왔다는데 니가 아는 놈이냐?"
쩌렁쩌렁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에 잔뜩 주눅이 든 나는 그녀에게 빨리 말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네, 아는 사람이에요. 일단 이거 놓으세요"
그녀는 얼른 다가와 내 멱살을 잡은 그의 손목을 잡고 그만 풀어주라고 했다.
그에게 풀려난 나는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었지만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니가 이 놈을 어떻게 아는데, 안다는 놈이 도둑놈처럼 남의 집을 기웃거려?
이 놈이 누구야?"
"저기.. 교회 아시는 분이에요."
"교회? 너, 나 몰래 예배당에 나간 거냐. 행동거지를 어떻게 했길래 요 쥐새끼 같은 놈이 여그를 막 찾아오는 거야."
"아저씨, 처음 보는 사람에게 쥐새끼가 뭡니까.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기고 아니고 넌 빨리 집에 들어가고, 요 잡놈의 새끼, 여그서 빨랑 꺼대나가라."
그는 주먹을 들고 때릴 듯이 협박을 했다.

 

6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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