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군 입대 전 전라도 군산에서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나는 나무 도시락 공장을 운영하다 사업을 접고 깊은 산골에 차돌광산 사업을 시작하다가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광산일을 전혀 모르는 데다 험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그곳에서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내는 순영이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하는 일이 고단하여 이성에게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왈가닥 성격인 그녀와 티격대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타 지역에 원석을 납품하다가 내 제안으로 우여곡절 끝에 차돌을 가공하는 공장을 세우게 되지만 그 사업은 초반부터 벽에 부딪치게 되고 운영 자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계에 몰리게 된다.
군 입대를 연기한 나는 공장 일에 매달리다 임금을 주기 위해 광산으로 갔다가 순영이 광산일을 그만두고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과 순영이 숙박을 하던 주인집 딸이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된다.
받지 못한 대금을 받기 위해 서울을 오르내리던 나는 서서히 지쳐간다.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교회에 나가 찬송가 반주를 하던 나는 평소 보지 못하던 아가씨를 만나게 되는데 처음 보는 그 아가씨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몇 번의 만남 뒤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 아가씨가 살고 있는 후미진 산골짝을 찾아 갔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걸려 혼쭐이 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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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빡에 피도 안 말킨 놈이 하는 꼴딱지가 뉘렇다 요 똥같은 놈아.
여그에 또 얼쓴대면 메가지를 비틀끼야."
하..
몽둥이를 들고 희멀건 눈을 부리라는 모습을 본 나는 꽁지가 빠져라 산 비탈을 뛰어 내려왔다.
뛰어오다 뒤를 돌아보니 돌담을 쌓아 올린 화장실 옆에서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 보고 서 있었다.
몇 걸음 더 내려 오다가 다시 뒤를 돌아다 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기에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몇 차례 손을 흔들자 그녀도 손을 흔들었다.
오오...
익은 봄 날 아른아른 피어 오르는 저 아지랑이 같은 풍경이라니.
그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와 달콤한 시럽처럼 입과 눈에 붙었다.
저 예쁜 그림이 설마 꿈은 아니겠지.
그 모습이 시나 소설 같아서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조금 전 잡아 먹힐 듯 혼쭐이 난 기억은 모두 시냇물에 종이배를 띄워 보내듯 떠내려 가고 이내 머리가 상큼해지고 있었다.
집까지 시 오리가 훨씬 넘었지만 집으로 오는 내내 내 입은 벌어진 채 다물어 지지 않았다.
"무신 일 있나?"
"무슨 일은 요. 그런 거 없어요. "
"그칸데 입은 왜 벌키고 댕기노."
눈치 구단 어머니는 간 만에 헤벌쭉하니 입을 벌린 내 모습이 싫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하긴 공장이 문을 닫고 채무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으니 좋은 일이 있을 리 만무여서 매일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던 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니 기분이 좋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주던 아가씨는 그 일이 있은 후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매주 마다 오르간 앞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던지 집이 싫어 다시 있던 곳으로 간 게 아닐까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속은 답답했지만 군 입대 전 어떻게든 공장을 정상화 하고 채무도 어느 정도 해결을 해야 했으므로 마음이 급했다.
어머니를 설득하여 식목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산을 매물로 내 놓자 몇 군데서 사겠다고 찾아왔다.
목상이셨던 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나무를 심고 가꾸던 사실상 마지막 남은 부동산이었다.
당시 산 가격이 형편이 없어서 1정보 3,000평은 당시 가격으로 10~15만원쯤 되었다.
쌀 한 가마 가격이 30,000~35,000을 오르내렸으니 쌀 세가마 살 돈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산 1정보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산은 소비자들에게 별다른 매력이 없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매가 잘 되지 않았다.
당장이 급한 지라 시세보다 싸게 산을 내어 놓자 얼마 되지 않아 매매가 되었다.
산을 산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다.
가을이면 소득이 생기는 전지와 달리 당장의 소득이 없는 산을 살 까닭이 없기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0여 정보를 판 돈을 밑천 삼아 다시 공장을 돌리기로 마음먹은 나는 야반도주를 한 매형에게 연락을 했지만 이미 수 차례 고초를 겪다가 도망을 간 지라 매형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몇 차례 연락을 했지만 지금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다시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행이 객지에 나가셨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 오셨다.
워낙 사업에 눈이 밝으셨던 분이라 그런지 공장을 가동할 만한 자금을 마련하여 오셨는데 그동안 억눌린 부아 때문이었는지 난 아버지에게 매달려 대성통곡을 했다.
그 까닭을 아셨기에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본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녹슨 기계를 닦아내고 인부들을 모아 공장을 가동하던 날 세찬 비가 내렸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걸 보니 물은 만복의 근원인기라. 앞으로 잘 될끼다."
힘 든 오르막이 있으면 쉬운 내리막도 있는 것이어서 다행이 공장이 그런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석을 캐내고 가공하여 건설사에 납품하는 일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바람을 타고 건설 자재의 공급이 늘어난 까닭이었다.
그동안 받지 못한 납품 대금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횡재 같은 일들이 벌어지자 난 환호성을 질렀다.
인부들 역시 오래 만에 후한 임금에 보너스까지 받자 난리가 났다.
밤시간 까지 연장 근무를 하는 날들이 많아지자 근방은 물론 멀리서 일을 하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공장 한 쪽에 떡하니 사무실을 꾸미고 책상 몇 개와 서류를 넣을 수 있는 캐비닛 몇짝를 들여놓은 나는 작업복 대신 제법 티가 나는 양복에 공책과 볼펜을 들고 다니며 폼을 잡았다.
소식을 들었는지 다시는 오지 않겠다던 매형이 돌아 오던 날 나는 건방을 떨었다.
"뭐 하러 왔어요. 밤에 몰래 도망까지 가시더니 ,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분한 마음에 투정을 부렸지만 매형과 누님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싶어 난 또다시 매형과 누님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무렵 나는 서울을 오르내리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졸라 당시 인기를 끌던 포니 승용차를 구매하여 타고 다녔는데 당시 여간해서 탈 수 없었던 승용차를 몰고 다니자 나를 보는 눈이 180도로 달라졌다.
특히 나를 구박하고 천하에 못된 놈이라고 내쫓던 교회에서 만난 아가씨의 아버지가 내 소문을 들었는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변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5일 장날 우연히 만난 그녀의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 된통 당했던 상처가 너무 깊어서 한동안 몸살을 앓았던 나는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는데 막상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살가워 간사한 마음에 담겨있던 그동안의 응어리가 봄 눈 녹듯이 풀렸다.
"그때 내가 좀 실수를 했구만. 이해를 하꾸마."
그녀의 아버지는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멋적게 웃었다.
"아닙니다. 제가 무례를 했지요. 타시지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나는 가슴을 펴고 요즘 말로 깨춤을 추었다.
고등어 마리와 쌀푸대를 든 그녀의 아버지를 태우고 그때 찾아갔던 집으로 가자 그동안 만날 수 없었던 그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아버지와 나를 본 그녀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어떻게.."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오래 동안 그리던 그녀의 모습을 보자 숨이 차고 현기증이 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훅 불면 어디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집이 산 아래 있는 지라 짐을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으므로 그녀와의 기회를 놓치기 싫어 얼른 쌀푸대를 집어 들었다.
"됐꾸마. 여기까지 탱구고 옹거두 고맙구만 그만 가 보시게."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쌀푸대가 무거우니 제가 들어다 드려야지요."
내가 앞장서 가자 그녀의 아버지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뒤따라 왔다.
혼비백산 도망가던 길을 이렇게 다시 오다니, 나는 너무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짐을 내려놓고 더 붙잡지 않나 눈치를 보던 나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하며 그만 가 보겠다고 하자 걸걸한 그녀의 아버지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여 까정 와서 애를 썼는데 정심이나 들고 가꾸마. 자반 한 손 사 왔으이 니는 빨랑 정심을 하고."
안 그래도 된다고 손바닥을 비비며 헛소리를 하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멍석이 깔린 허름한 바닥에 궁둥이를 들여 밀었다.
내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알듯 모를 듯 표정을 짓더니 푹 둘러 빠진 정지깐으로 들어갔다.
담배 잎을 말리는 높다란 담배 곳간이 그리는 그림자가 짧아 진 걸로 보아 정오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조리를 한 담배 잎들이 새끼줄에 꿰어져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한 낮 더위가 대단했지만 담배 곳간 아궁지에 지핀 장작이 뻘건 신음을 토하며 너울거렸다.
뽕나무 삭정이와 소나무 밑둥을 찍어온 뭉툭뭉툭한 조각들이 널부러진 마당 한쪽에는 털이 듬성한 깡마른 개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더위에 지친 탓인지 낯선 사람을 보아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궁지에 움푹 패인 등걸을 넣던 그녀의 아버지가 힐끔 나를 올려다 보자 오줌을 누고 난 아이처럼 괜시리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끽소리 못하고 앉아있는데 사랑채 같은 방문이 삐끔이 열리더니 늙수그레한 여인이 나왔다.
"누구여?"
곰방대를 문 여인은 돌로 만든 절구에 담배꼬가리를 탁탁 두들기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 보았다.
"아, 예..그러니까.."
" 외삼촌을 모시고 온 손님이에요."
내가 어물 거리자 어느새 나왔는지 부엌에서 밥을 짓던 그녀가 그 여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외삼촌?
그럼, 저 우악스러운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라 외삼촌 이라고?
"대글빡에 피도 안 말랐고만 새파란 남새가 말만한 처녀가 있는 여그에 왜 얼쩡 대는고?"
빌어먹을..
이 집구석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왜 이 모양이야.
화딱지가 난 나는 그만 가겠다며 봉당을 내려 섰다.
아궁지에 불을 때던 그녀의 아버지 아니, 그녀의 외삼촌이 껄껄 웃었다.
"곤찮여, 밖을 내다본 걸 봉깨 예편네가 사람 소리가 듣고 싶었고만"
"에?"
그 여인을 자세히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외삼촌의 처라기보다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옛날 이야기 한 토막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점심을 먹으라는 그녀의 부름에 다시 봉당으로 올라간 나는 밥 숟가락을 뜨면서 가재미눈으로 여기저기를 슬금슬금 살폈다.
내 표정을 눈치 챈 그녀가 내 밥그릇에 고봉이 되도록 밥을 얹어 주었다.
"찬이 션찮아두 많이 푸게. 돌이라도 씹어 삼킬 때지."
그녀는 얌전하게 앉아 밥을 먹었다.
짙은 눈섭과 동그란 얼굴이 내 눈으로 들어오더니 그네를 타듯 일렁거렸다.
송글송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준 밥이 부담스러웠지만 꾸역꾸역 억지로 삼키며 나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바라다 보자 그녀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엷게 웃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다니, 그해 여름은 세상의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고 눈깔사탕보다 단 향기로운 바람이 내 가슴으로 밀려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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