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돈 벌러 간 둘째 누님이 어쩌다 집으로 내려오는 날은 명절 만큼이나 가슴 설레이는 날이었다.
산골에서는 여간해서 보기도 힘든 사탕이나 쵸콜렛을 맛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꽤 근사한 옷 도 얻어 입을 수 있었다.
외양간 송아지가 코뚜레를 하고 개울 건너 두어 마지기 쯤 되는 밭에 감자랑 고추를 심게 된것도 순전히 누나 덕이었다.
하지만 세째 누나는 전혀 딴판이었다.
집에 올때는 화사한 옷을 입고 내려왔고 과자도 사다주지 않았다.
아버지께 혼찌검이 나는것도 세째 누나였다.
집에만 오면 하도 심부름을 시키는 통에 난 세째 누나만 보이면 부리나케 내뺐다.
어느해 봄 서울서 내려온 누님은 서울로 갈때가 되었는데도 가지 않았다.
"서울 안가?"
"응..이제 안가."
봄이 이슥 하도록 집에만 있던 누님은 웬 낯선 사람들이 몇번 오가더니 시집을 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삐걱거리는 안방 앞 마루에 솜이불을 널찍하게 펴놓고 바느질을 하셨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누님이 시집을 갈 곳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대화라고 했다.
대화는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평창군의 용평을 가기 전의 작은 읍이다.
영동 고속도로가 나기 전에는 서울이나 원주에서 강릉을 가려면 찐빵으로 소문이 난 안흥을 지나 대화를 꼭 거쳐야 했다.
그 길 말고는 길이 없었다.
지금은 대관령 터널을 거쳐 번쩍하면 강릉으로 가지만 당시엔 머나 먼 여정이었다.
더구나 대관령의 수많은 구비는 강릉으로 가는 객들의 발길을 쉬 놓아주지 않았다.
안흥을 거쳐 70여리를 가다보면 방림 삼거리가 나오는데 방림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평창,좌측으로가면 대화였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보면 허생원이 다녔던 대화, 평창, 봉평장이 나온다.
장돌뱅이들이 나귀에 시장짐을 싣고 5일장을 돌았던걸 생각하면 당시 대화나 봉평장은 규모가 꽤 컸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대화초(고추)는 유명세를 타는데 근대화의 물결에 밀리면서 옛 명성이 많이 퇴색 되었다.
옆방에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어린 내가 못 알아 듣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서울 갔으면 서울서 신랑을 만날 일이지 흉악한 산골짜기로 뭐하러 간대.."
난 별 생각없이 그말을 어머니께 했는데 대판 싸움이 났다.
어머니가 그렇게 무섭게 싸우는건 처음이었다.
난 아주머니가 무서워 슬 슬 피해 다녔다.
서울 살때는 명절때마다 꼭 내려오던 누님은 시집을 가더니 함흥 차사였다.
시집가고 한 두번 우리집으로 오던 매형이 처음부터 난 싫었다.
예쁜 누나를 뺏어 갔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있었다.
몇번이나 어머니께 졸랐지만 거기가 어디라고 가냐며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이리저리 푼돈을 모아 약간의 차비를 마련한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초행길에 나섰다.
친구네 집에 가서 이틀밤을 자고 올테니 나중에 엄마한테 말씀 드리라고 동생에게 10원을 주고 꼬드겼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를 걸어와야 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버스에 올랐는데 문제가 생겼다.
차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차장 아가씨는 나를 보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대화 신리라고 했더니 꿀밤을 한대 쥐어 박았다.
가만히 앉았다가 내리라고 하면 얼른 내리라고 했다.
난 한쪽 구석에 쥐죽은듯이 앉아서 갔다.
비포장길의 그곳은 생각한거보다 멀었다.
낯선 동네에 내리면서 난 차장 누나에게 90도로 절을 했다.
먼지나는 신작로에서 난 한참을 서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몇번을 물었지만 누님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해가 이슥 하도록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다.
허기도 지고 맥도 빠졌다.
산기슭 마을이 보이기에 무작정 그곳으로 갔다.
해가 뉘엿 해서야 동네에 들어 섰는데 여기 저기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겁이 더럭 나서 커다란 바위 옆에 쭈그려 앉아 있는데 물동이를 이고오는 사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아...누나였다.
몸빼 바지에 누덕한 옷을 입었지만 분명 누나였다.
"누나야~!"
내가 달려가서 매달리자 누님은 깜짝 놀랐다.
"아니..네가 어떻게 여길 왔니?"
나는 무엇이 서러웠는지 누님께 안겨 엉엉 울었다.
아침 밥상에 오른 강냉이 밥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나물반찬 몇가지에 시래기국을 차려온 누님은 많이 먹으라고 자꾸만 밥을 덜어 주었다.
그날 오후 누님은 대화 장에서 고등어를 한 손 사와서 조려 주었다.
그게 왜 그리 맛이 좋았을까.
누님은 가난했다.
산골 농사는 어린 내가 보아도 간단해 보였다.
누님의 차림새도 그렇고 찌그덩한 초가집도 넘어갈듯 초라해 보였다.
하룻밤을 더 자고 난뒤 어머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어떻게 아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당 뒷켠에서 난 어머니께 꾸중을 듣고 결국은 매타작을 당했다.
"간도 크지 어린놈이.."
누님은 눈물을 질질 짜는 나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랐다.
그곳에 올라 앞을 보니 버스를 타고 왔던 신작로가 꼬불꼬불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누님이 들려준 옥수수 보따리를 들고 처음 찾아 헤메던 동네로 내려왔다.
나중에 다시 놀러 오라고 누님이 꼬깃한 돈을 손에 쥐어 주었다.
버스에 올랐지만 난 누님을 바로 볼 수 없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창문으로 뒤 를 돌아다 보았는데 먼지가 가득한 신작로에서 누님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꺼벙했던 소년은 세월 이만치에 와 버렸고 백발이 성성한 누님은 기억이나 하시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이 있어서네요.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접해 보지 못한 추억들이 많으시니
그 추억으로 사시면 항상 행복하실거 같습니다.
누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음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 갔을까요.
글을 읽으며 영화를 보는것 같았습니다.
열무김치님 훌륭한 따님 두심 다시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바쁘게 일하시면서 언제 이렇게 글을 쓰시는지
그 열정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린 나이에 참 대담하셨네요.ㅎㅎ
그리 곱던 누님도 이젠 많이 늙으셨겠지요.
그래도 열무김치님 마음속엔 수줍은 봄꽃같던
누님의 모습이 또렷이 남아있을것 같아요.^^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하는 누님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때로는 낮시간에 매장에서 슬쩍 들어가 보기도 하구요.
누님이 여러분 있습니다.
딸을 많이 낳아서 아들 낳으려고 자꾸만 낳으셨다네요.
제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나 있습니다.
딸 그만 낳으라고 동생 이름을 끝순이라고 지었는데 또 딸을 낳으셨지요.
말씀처럼 제 마음엔 연세들어 늙은 누님이 아니라 먼 옛날의 이리따운 누님으로 남아 있습니다.
둘째 누님은 경기도에 사셔서 특별한 날이나 되어야 만나게 됩니다.
주로 제가 가지요.
외동아들 아니세요?ㅎㅎ
다 모이시면 대식구겠네요.
누님과 여동생 사이에서 자라셔서
그렇게 고운 감성을 가지셨나봅니다.ㅎㅎ
소년과 누나의 마음이 제 가슴속에 전해져서....
어느새 아름답던 그 누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셨으니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아마 누님의 기억에도,
그때 그 먼길을 누나를 만나러 왔던 동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계시리라 사료됩니다.
꽃다운 18세에 첫째 누님을 낳으셨으니 큰 누님이 80이 멀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기억을 하실라나?
그때 누님은 왜 그 험악한 산골로 시집을 가셨는지 지금도 고개가 갸우뚱 해 집니다.
해서 가끔 묻습니다.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으시네요.
4월이 왔는데도 눈이 날리고 바람불고 마치 겨울로 되돌아 간듯 을씨년스러운 날씨네요.
거리를 다니다 보니 모두들 움추리고 얼굴이 밝지가 않네요.
봄 오기가 버겁군요.
왠지 쨘해요.
그때 누님의 마음과 생활고가 자꾸 제 심장을 건드려요.
글쎄..왜 그렇게 가난한 산골로 시집을 가셨을까요?
말하지 못할 사연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저는 누님이 계시지 않아서 느끼지 못한 정을 읽고 갑니다
예전엔 글을 퍽 아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 읽는 글들은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오늘은 선거로 하루 놀고 내일과 모레는 진천 출장가는데 끝나면 금요일 오후 서울에 가려합니다.
서울 올라가서 이번엔 담배 끊는 노력을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잘 될런지 . .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