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 이야기 4

by *열무김치 2024. 7. 7.

 

은발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 채송화가 피었다.
"수수하니 예쁘네요."
"원체 가물어서 꽃 꼬라지를 할까 싶었는데 용케 장마가 져서 꽃 꼴을 하는 구만"
"할머니가 심으셨어요?"
"그럼, 여그 골목에 맨 머리 허연 귀신들만 사는데 누가 심겄어.
그냥 심심하니께 아침마다 나와서 딜다 보고 출석도 부르고 그러는 거이지"
"출석요?"
"아그들 같잖여. 쬐끄만게 머리 이쁘게 하고 방글방글 웃는 게 꼭 우리 손주들 같어.
그래서 애들 대신 내가 맨날 간 밤에 잘 잤나 하고 이름을 부르지."
"손주들 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한동안 하늘만 보던 할머니가 시큰둥한 표정이다.

"갸들, 안 와.꽤 됐어.
여그 와 봐야 즐 거도 없꾸, 집이 원체 허름해서 놀데두 없는데 뭐가 좋아서 오겄어."
"에이, 할머니 집이 좋아야 애들이 오나요. 그냥 할머니 보러 오는 거지."
"그 짝은 사정이 좋은가 부네. 손주들이 안 와도 꽃 보고 떠들면 되니까니 그냥저냥 괜찮어."

습한 바람이 부는 골목에 여름이 익는다.
풍부한 물질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들 주변에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리움을 삭이는 사람들이 많다.
골목을 나오며 앙증맞게 핀 채송화를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이야기 2  (2) 2025.02.06
가을 이야기 3  (2) 2024.10.09
연말  (3) 2023.12.26
애증의 화장실  (5) 2023.08.20
11월  (9) 2022.11.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