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월
입영을 한지 몇 달 후 부대배치를 받자마자 혹한기 훈련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중부전선이 춥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 난생처음 겪어보는 추위였다.
강원도 겨울추위도 만만치 않은데 더 춥게 느껴진 건 아마도 낯설고 배고픈 환경 탓 이었으리라.
포병이었던 우리는 산골짝 기슭에 포진지를 구축하고 곧바로 밤을 지새울 비트를 파기 시작했다.
야전삽으로 언 땅을 파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추위를 피할 비트를 마련해야 했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땅을 팠다.
금방이라도 눈이 퍼부을 것만 같은 을씨년스런 하늘이 부채질을 했지만 짧은 겨울 해에 1개분대가 머무를 1m이상의 비트를 파기란 쉽지 않았다.
이내 어둠이 깔리고 더 이상 작업이 곤란해지자 간단한 야간점호를 마친 우리들은 판쵸우의와 솔가지등을 이용해 얼기설기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렇게 밤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군인이었지만 기가 막혔다.
처음엔 킥킥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말수가 줄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추위가 몰려왔다.
자칫 얼어죽는 건 아닐까.
이빨이 딱딱 부딪칠만큼 몸이 떨려왔다.
"분대장님예,이러다 얼어 죽는 거 아입니꺼? 도저히 못 참겠는데예."
부산에서 살다왔다는 동기는 거의 우는 소리를 했다.
"저게, 디질라고..안 죽어."
그 상황에서도 고참병이 체면을 세웠지만 고참병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모두들 모포로 몸을 감싸고 최대한 자세를 낮추었지만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장이 한차례 다녀간 뒤 누군가 불을 때자고 제의를 했다.
처음엔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던 고참병은 자기가 생각해도 안되겠던지 몰래 밖으로 나가 나무 잔가지들을 모아왔다.
한 쪽 구석에 연기가 빠질만한 구멍을 내고 불을 피웠다.
처음에 좀 타는가 싶더니 이내 불이 꺼졌다.
하지만 당장이 급했던 우리들은 온 힘을 다해 입김을 불어가며 불을 피웠다.
간신히 불을 피웠지만 그게 따스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 불이 작은 위로가 되어서 우리들은 불 주변에 얼굴을 맞대고 입김을 불어댔다.
그러길 몇 시간
조금 따스해진다는 느낌과 함께 깜빡 잠이 들었다.
기상나팔소리에 눈을 떴는데 얼기설기 만들었던 지붕이 푹 꺼지고 대부분 주저앉아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엉금엉금 기어 나오던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밤새 내린 눈으로 주변은 온통 설국이었다.
생각해 보니 밤새 퍼부은 눈으로 인해 그 눈이 이불역할을 해서 비트 안이 좀 따스해졌다는 걸 알았다.
아침점호를 받으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굴뚝을 청소한 사람처럼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포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대장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 중 몇 사람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식사시간에 야전 전투식량을 배급받았지만 뜨거운 물이 없어서 불려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어서 바짝 마른 걸 먹고 있는데 고참병이 나를 불렀다.
"야, 윤이병. 쩌기 민가 보이지? 몰래 저 집에 가서 물을 얻어 오던 가 쫌 어떻게 해봐라."
"네?"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신출내기 쫄병이었던 나는 끽소리도 못하고 반합 두 어 개를 들고 몰래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지붕이 나지막한 작은 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이 잔뜩 쌓인 울타리 주변에서 안쪽을 기웃거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저기요...계신가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몇 차례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벌벌 떨며 한동안 서있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마당안으로 들어가 큰소리로 부르자 헐쯤 한 문이 열리더니 늙수그레한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뉘시오?"
막상 사람이 나오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은 시커먼 얼굴을 한 내가 이상했는지 위아래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저기...훈련 나온 군인인데요."
뒷머리를 긁으며 어정쩡하게 서있자 잠시 뒤 방안에서 머리를 길게 땋은 아가씨가 나왔다.
아가씨를 본 순간 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후다닥 마당을 뛰쳐나왔다.
얼떨결에 도망을 치다보니 길이 아닌 밭두렁으로 내달았다.
"저기요. 잠깐만요."
그 아가씨가 도망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가세요. 왔다 가세요."
아가씨의 상냥한 말을 듣자 난 귀가 번쩍 뜨였다.
못이기는 체 아가씨를 따라 다시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노인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엉성하게 서있자 아가씨가 쿡쿡 웃었다.
"괜찮아요. 전에도 그랬어요. 물 얻으러 오셨지요?"
"아니, 그 걸 어떻게.."
"벌써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처음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추우실텐데 이리로 들어오세요. 바깥보다는 훨씬 따스해요."
마루로 향해 놓인 방 쪽보다 움푹 패인 부엌으로 들어서자 훨씬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끓인 숭늉인데요. 좀 마셔보세요."
아가씨는 사발에 밥알이 둥둥 뜬 숭늉을 따라주었다.
난 엉거주춤 서서 따라주는 숭늉을 후루룩거리며 마셨다.
몸이 좀 풀리자 나도 모르게 졸음이 밀려왔다.
"많이 추우셨나 봐요."
"네, 눈이 너무 와서.."
"전에도 이곳으로 군인들이 자주 훈련을 왔거든요."
아가씨가 시커먼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얼마 뒤 물이 끓었다.
가지고 간 반합에 뜨거운 물을 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마당을 나서는데 아가씨가 쫓아 나오더니 시커먼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김치인데요. 많이는 못 드리고 나누어 드세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그리 구요. 얼굴 좀 씻으셔야 할 거 같아요."
아가씨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감사함과 창피함에 난 후다닥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뜨거운 물과 김치를 얻었다는 그 기쁨과 창피함은 단 몇 십미터를 가지 못해서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너무 급하게 뛰던 나는 눈밭에 쭐러덩 미끄러져 나뒹굴었고 들고 가던 뜨거운 물이 담긴 반합과 김치봉투를 눈밭에 패대기쳤다.
반합에 담긴 물과 함께 뻘건 김치가 얼굴에 튀었다.
반합에 끓는 물을 담았지만 기온이 워낙 찬 탓에 얼굴에 튄 물에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눈밭이라 엎어진 김치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었다.
허겁지겁 눈이 잔뜩묻은 김치를 주워 담고있는데 그러는 나를 지켜보았는지 아가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다시 오세요. 또 드릴께요."
어느 하늘아래 그 아가씨도 늙어가겠지.
그나저나 78년에 이런 사진을 어떻게 찍은건지 궁금해집니다. 그것도 칼라로.. (그 때는 대부분 흑백사진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옷을 따듯하게 입은거 같으네요..ㅎ
요즘 군대생활은 밴드에서 거의 다 공개를 하지만 개인이 사진을 찍을수는 없습니다.
둘째가 군대성당에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성가대 지휘를 했는데 사진좀 찍어 보내달라 했더니 한장도 못 찍었다 하더군요.
근데 밴드에 소대장님들이 올리는 사진들을 보면 2층 침대에 내무반마다 큰 TV가 있고 에어컨도 설치되어 있더라구요.
내무반에 전화도 있어서 언제든 통화를 할 수 있구요.. 군대 생활 대부분을 밴드에 올려 부모들과 소통을 합니다.
뜨거운 물은 저녁시간에 두 시간정도 샤워할수 있도록 나오게 해 준다고 해요.
강원도 산속은 겨울이 길어서 겨울동안 제설이 가장 큰 작업인거 같은데 제설하면서 아이들이 저절로 체력단련이 되는거 같아요.
먹거리도 얼마나 풍부한지 항상 풍족하게 먹는다고 합니다. 우유도 언제든 먹을수 있게 나오고..
우리 둘째는 조기진급이라 2월 말이면 병장 진급을 합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읽다보니 저의 어릴적 기억이 떠 오르네요..
우리집 옆쪽에 군부대가 있었는데 겨울이면 우리집으로 군인들이 김장을 얻으러 오곤 했지요.
대가족(16명)이 살던 우리집은 늘 김장을 넘치도록 해서 많이 나누어 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위에 사진은 많은 추억이 담긴 소중한 사진이겠습니다.
글고 저도 어디에선가 늙어가고 있을 그 아가씨가 궁금해 집니다.
착하고 인정 많은 분이니 좋은 남자 만나 예쁜 아이들 낳고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따스하게 입은 게 아니라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깡통만 들지 않았지 거의 거렁뱅이(?) 차림입니다.
저때 몹시 추운때였는데 바지는 건빵바지라고 해서 광목으로 만든 홑바지였고 상의는 야전점퍼라는 명칭과는 달리 매우 얇은 긴 옷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속으로 여러벌을 껴입어서 원치않는 뚱뚱이가 되었다는...
신고있는 군화는 휴가때나 특별한 훈련때만 신었고 평소 교육훈련시는 그냥 작업화를 신고 생활했습니다.
컬러사진은 당시 하사관이었던 사람이 야시카 일제 카메라를 갖고다녔는데 가끔 우리들을 촬영해주고 사진값을 아주 제대로 챙겨갔답니다. ㅎㅎㅎ
말씀처럼 당시 흑백사진이 주류였고 컬러사진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였지요.
벌써 병장진급을 하는군요.
뉴스를 보니 병장 월급이 40만원이 넘도록 오르고 내무반 생활이 과거완 비교불가로 변했다고 하더군요.
40년이 흘렀으니 당연한 변화지요.
조카아이들이 군입대할때 몇 번 따라가 보았는데 정말 많이 변했더군요.
의식주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풍성해졌으니까 부모님들의 마음도 좀 편해져야 하는데 언제나 음과 양은 있나봅니다.
아..
결이님도 김장김치를 나누어 주었던 추억이 있으시네요.
아드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님품으로 돌아오기를 빕니다.
머잖아 결이님은 다른 걱정을 하실거예요.
취직, 결혼, 육아 등등...
저도 비슷한 경험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눈에 띄어 그곳에 갔는데 목사님 따님이었나 봅니다.
그 아가씨도 늙어가고 있고
숭늉과 김치를 준 그 아가씨도 늙어가고 있겠지요.
아마 손주를 보았을 겁니다.
전 80년도에 결혼을 했어요 ㅎㅎㅎ
제가 일찍 결혼을 했지요 ㅎㅎ
그냥 셈을 해봤습니다
그땐 겨울이 무지 추웠어요
결혼해서 시부모님이랑 살던집은 비교적 지은지 얼마안됀 멋있는 집였는데도
집장사가 지은 집이라 그런지 난방이 그리 잘돼진 않았나봐요
겨울엔 ㅂ주방 행주가 꽁꽁 얼어있었어요
그렇게 추웠었는데 그 허허벌판 강원도 밖의 날씨는 얼마나 추었을까요
아들 군대보내고 어머니가 가슴애려 잠도 잘 못주무셨을것 같아요
참 그렇게 고생스러운 세월속에서도 국방부시계는 돌아갔으니 지금의 이 회상록을 볼수 있는거겠지요?
아무리 그지같은 차림였어도 그때청년의 열무님은 미남이십니다 ㅎㅎ
따듯한 물과 김치를 나눠줬던 그 아가씨 얼굴 한번 본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추위도 까맣게 잊었었을 호사를 혼자 누리셨어요 ㅎㅎ
지금 우리나이가 되었을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날수 있다면 참 이야깃 거리가 많을것 같습니다 ㅎㅎㅎ
그 훨씬 전엔
국방부 장관이라나 모시깽이라나 군인들이 먹을밥을 반으로 잘라 자기배를 채웠다 하데요
너무 배가 고팠다 하더라구요
배치를 받아 떠나던 도중에
삼십여분 기차를 세웠었는데
그 사이 군인들이 튀어나가 민가로 가 구걸을 했다지요
어느집엘 들어가니
말려 두었던 누릉갱이를 내 놓더랍니다
양껏 먹고들 가시게나
아마도 잘 사는 집이었나 봅니다
그 누릉갱이를 들고 기차로 오다가
눈이 덮혀 보이지 않는 똥을 모아놓은 구덩이에 두발이 빠졌답니다
에구 우리영감 이야기입니다
밥이라도 실컷 먹여놓고
나라를 지키라 해야 하는거 아닌가베 ...^^
단편집을 읽은 기분입니다
고생하시던 모습이 눈에 어리는데도
슬그머니 웃어짐은
아마도
지난간 추억이라서인가 봅니다 ...^^
전 운이 좋아서 자유배식을 하는 부대로 배치를 받아 배를 곯지는 않았습니다.
아저씨의 기막힌 추억담이 생생합니다.
당시 그런일들이 부지기수였다니까요.
사실 제가 군복무를 할때도 상황은 녹록치 않아서 고생을 많이했지요.
특히 입성은 아저씨 군생활하실때보다는 나았겠지만 여전히 배고프고 춥고 그랬지요.
동계훈련을 나가 만났던 그 아가씨는 산골처녀였는데 저보단 한참 위여서 지금쯤 할머니가 다 되었을겁니다.
비록 눈밭에 엎기는 했지만 그렇게 얻어온 김치로 밥을 먹었으니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지요.
경기도 설악면의 그곳을 지날때면 마치 영화의 필림처럼 그때의 일들이 지나갑니다.
아직도 그 곳에 그집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있다해도 사람이 살지 않던가 ?
예쁜 팬션이 자리하고 있던가 ...
도시로 합류 됐던가 ...그렇겠지요?
김밥 몇 줄 배낭에 넣고
한번쯤 추억의 그 장소를 찾아가 봐도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만 같습니다.
이곳에서 그렇게 멀지않으니 가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아마 너무도 변해서 그 아가씨가 살던집 쪽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지같은 차림이었어도 그때가 좋았지요.
젊음이 있었으니까요.
아..
너무도 멀리 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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