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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사촌누나

by *열무김치 2018. 1. 9.

                                                                                              

1968년

작은집 둘째 누님은 잘 있던 서울에서 내려와 한동안 집에 있더니 얼마 안 있어 시집을 가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남은 핏줄이었던 그 누님이 우리 형제들과 한 지붕을 쓰다가 계속 있기가 그랬던지  어느 날 보따리 싸들고 서울로  갔다.

그러기를 사 오년. 

듣기론 서울에서 집안도 괜찮고 사람도 괜찮은 총각을 소개받아 서로 혼담이 오갔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누님은 그 일이 있은 뒤 곧바로 산골 오두막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사랑채에 살던 대장일을 하는 사람이 우리 집 안방을 들락거리더니 이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키가 작달막한 대장장이는 어린 내가 보아도 마땅찮았다.

곱디고운 누님을 하필 저런 사람에게 소개를 하나 싶어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한 번은 누님에게 시집을 가지말고 얼른 서울로 가라고 했더니 길게 머리를 땋은 누님은 조용하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장장이가 얄미워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대장장이는 쇳불도 단김에 빼려고 했는지 누님은 일사천리로 시집을 갔다.

 

이듬해 가을 중학생이 된 나는 우연한 기회에 누님이 살고있는 강원도 평창의 어느 후미진 동네에 가보게 되었다.

그러나 누님이 살고있는 집은 집이 아니라 헛간에 가까웠다.

더욱 놀랐던 것은 저녁에 받은 밥상이었다.

쌀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강냉이와 조가 섞인 우르르 날아 갈 듯한 밥그릇을 받아든 나는  어린 마음에도 눈물이 나왔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는 쌀과 보리를 섞은 부드러운 밥을 양껏은 아니어도 굶지 않고 먹었는데 누님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듬해 누님이 사는 그곳에 논 여덟 마지기를 사 주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버린 작은아버지의 혈육이 그렇게 사는 게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다.

더구나 남의말만 듣고 당신이 권유해 시집을 보냈으니 더 마음이 쓰이셨으리라.

훗날 들으니 아버지가 사 준 논 때문에 비로 서 쌀밥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윗집에 사장어르신이 살고 있었는데 그분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먹고 살만하다고 큰 소리를 치던 택택하다는 살림살이는  화전이나 진배없는 산지를 개간한 비탈진 밭뙈기가 전부였다.

"속아서 온 거지. 저 집 형제들이 거의 굶고 살았는데 무슨 살림이 택택하다는거여."

아버지는 도지로 쌀 한 가마를 받곤 추수의 대부분을 누님에게 주셨다.

 

달라질게 없는 그곳에 눌러앉은  누님이 안되어서 그만 이곳을 떠나는 게 어떠냐고 묻자 매형의 아주 걸작 대답이 돌아왔다.

"나물먹고 물 마시는 이 생활이 얼마나 좋은데. 처남이 어려서 몰라 그렇지."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말하는 매형이 얄밉고 가정을 꾸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지만 누님이 별 말을 하지 않아서 달겨들지  못했다.

그 후로도 누님의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나아질 건덕지가 없었다.

소 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옛사람들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매형은 농사보다는 약초나 버섯 등을 따러 다녔는데 수입이라는게 섣달 널뛰기라 감나무 아래 입 벌리고 있는 식이었다.

일 보다는 말쑥하니 차려입고 거리 방을 나다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누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소를 기르고 소 장사를 하는 등의 남자가 하는일을 닥치는 대로 했는데 매형은 여성스러운데다 나약해서 늘 누님의 그림자 뒤에 서 있었다.

 

이미 80줄을 넘겼으니 좋고 나쁨이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사느라 고단했던 사촌 누님은 병을 얻어 병원신세를 지느라 노후가 녹녹치 않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새악시 같은데다 나물먹고 물마시면 족하다고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살던 매형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여전히 씩씩하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고, 어느 한 쪽이 손해를 봐야 다른 쪽이 이득을 보는 것은 세상만사가 공통이다.

일전에 누님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갔다가 너무도 초라해진 누님 모습과 말쑥한 매형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무심한 세월만 탓 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시간에 그때 무슨 연유로 쫓기 듯 시집을 갔느냐고 여쭈었더니 간단하고 쓸쓸한 대답이 돌아왔다.

"팔자소관이지 뭐.  나도 서울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었지.

그런데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은 더 없는데 무슨 염치로 기울어도 한참 기우는 사람에게 가나. 미안하고 염치없는 짓이지

불행할 거 같아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기로 한거야.

그런데 그게 틀렸어. 요즘 송충이는 그렇게 하면 제 몸 만 망가져.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변신을 해야 해."

 

에고..

거, 이제와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한답니까.

 

처남.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워낙 사실적이어서 그 사촌누님이 그려집니다.
우리가 본 사촌누님은 다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여러 사촌누님 중 한 분은 마음씨가 비단결 같았는데 고생은 더할 수 없이 했고, 그 고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합니다.
어릴적에 저희 가족은 전주 친할아버지댁 근처에서 살았지요.
그러다가 아버지께서는 서울로 학교를 옮겨 가셨지요.
또 그러다가 미국으로 유학가시게 되었지요.
그때 같은 학교에서 음악선생님이셨던 아버지친구 딸이 저하고 친구였는데, 제게 그렇게 말했지요.
"나는 맨날 이시골 구석에서 사는데 너는 아버지따라 서울로, 이젠 미국으로 가서 살게 되는구나." 하고요.
저를 부러워했지요.그 친구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에는 큰도시로 나가는 것을 다 좋아 했지요.
그 사촌누님께서도 그냥 서울서 사셨어야 했는데...한번 그렇게 다른 선택을 하면 그것이 평생동안 살아 가는 길이 되네요.
그누님께서 80을 바라 보신다니 이젠 그 자식들이라도 잘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열무김치님의 사촌 누나라면 아마도 우리 연배이실 듯 합니다.
우리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시골에서 그래도 보리양식도 있고, 벼 농사도 근근이라도 여름, 가을은 보리쌀을 넉넉하게 섞은 밥,
겨울에는 무밥, 콩나물 밥, 저녁은 나물죽을 끓여서라도 끼니는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돈이 될 것은 누에를 치고, 소를 먹이는 일 말고는 몫돈을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래들은 도시에 식모살이도 갔고, 도시의 섬유공장, 신발공장으로 일 하러 나가서 월급을 받아 시골 집으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소를 샀고, 땅도 사고, 아들아이들 중고등학교도 보내고 그렇게 우리세대의 희생으로 시골 집안은 조금씩 형편이 나아졌지요.
이 누님께서 차라리 도시로 나가 공장이라도 다니셨으면 이렇게 고생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인데, 그 인생이 평생 어려우십니다.
일 덜 하고 사신 매형 되시는 분은 덜 늙어셨구요.

그냥 사촌누님이 아니시고, 열무김치님 댁에서도 같이 있었던 분이라 맘이 안타까우시겠습니다.
예전 말로 신발 끈은 가다가도 다시 맬수 있지만, 팔자는 바꿀 수 없다라 했습니다.
건강이라도 하시면 이제는 자식들이 있을테니 자식들에게 대접 받고 사실 수 있으실터인데, 건강도 그렇지 못하니
당신께서는 팔자라 생각하실만도 하십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생각이겠지만
그땐 그게 숙명이려니 생각하고 살았나봅니다만..
그 사촌누이가 저도 정말 아깝고 속상하고
사촌 매형 그분이 정말 염치없는 사람같애서 본적도 없지만 참 꼴뵈기 싫습니다.
그때나 하니 그 대장장이 그분이 장가를 갔겠지요?
글을 슬프게 쓰시고 정훈희 노래때문에 더 슬퍼집니다.


옛날 우리둘째 언니가 하필만난 사람이 포천사는 사람였어요
젊어선 그래도 인물도 괜찮은듯 햇지만
결혼식 올리게 되어 그쪽 포천엘 가게 되었는데
어째 꼬불꼬불 저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산꼴짝 같앴는데
너무 기가막혀서 머 이런데로 시집간다고 가면서 내내울었었지요

시골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고생도 하고 살았겠지만
형부하고 정이 좋아 지금도 서로 마주바라기만 하면 웃는통에.
제가 늘 그러고 놀리지요
그렇게 좋아?
ㅎㅎㅎ 둘이 좋으면 됐지요 모.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열무김치님 안녕하세요?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아침입니다.
건강관리 잘하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실화인데 정말 한편의 소설이군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많은 생각을 합니다
누님의 결정에
우리는 자신의 결정이라고 하지만
과감한 결정을 해야 하는군요
저는 열심히 사신 누님을 위해 잠시 화살기도 합니다
참 잘 사셨습니다
남쪽엔 눈이 연이틀 많이 와서 엉금엉금 다니네요.
그래서 오늘은 운전 안하고 동료차 타고 출근했어요.
그러면서 생각이 나더라구요.
강원도에는 이런 눈은 눈축에도 들지 않을텐데...
열무님이 계시는 강원도의 설경은 어떤지 그런 생각이요.

너무도 착한 사촌누나의 삶을 보면서
그시대의 여자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제 한몸 열심히 불살라서 끝까지 태우는 삶인듯 싶어요.
모쪼록 노후가 좋아야하는데...나이들면 아프니...
사촌누나의 생을 보면서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저는 화살기도가 어찌 하는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잠시 마음을 모아 그 누님께 두손을 모두고 빕니다
툭툭 털고 일어나시어
남은 생애서라도
자손들한테
조금이나마 편함을 찾으셨으면 간절하게 빕니다 ...._()_

내 형부인양
내 사위인양
열무님의 그 매형이 참 얄밉습니다
누님은 초라하신데 말쑥하시다는 그 매형의 모습에 또 울화통이 치밀구요

배운거 없고 '
갖인거 없고
나는 한가지 더 보태어 생김까지 엉망이었으니 휴우우 ... ^^

여전히 막힘없이 읽혀지는
진솔한 글에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삶을 팔자소관으로 여기고 후미진 곳으로 시집을 간 사촌누님이
건강을 잃고 병석에 계시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어여 쾌차하시길 빌어봅니다.

열무김치님!
평안하셨는지요?

늘 그러했듯이 부끄럽게도 지난 12월 초부터 찾아온 감기와 목디스크,
그리고 병약한 몸 때문에 가지가지 합병증을 앓고 지내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일어나
늦었지만 지난 한해 동행해 주신 걸음에 감사했다는 말씀과
새해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2018년 올 한해도
가슴 후려치는 좋은 작품과 아름다운 풍경들 많이 보여주시고
마음에 품은 뜻,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시는
멋지고 달달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마음 모두고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물론
건강과 행복도 손 모아 빕니다.

오늘도 따스한 하루 보내십시오.^^* [비밀댓글]
사촌누님을 생각하시는 열무김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하지만 결국 사촌누님이 선택한 길이니 후회스런 삶은 아니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서울 사람을 마다하고 그 키작은 매형을 본인이 선택하셨으니 천생연분 아니었을까요?
본인이 선택한 삶이었으니 헛간에 살아도 강냉이를 먹어도 당시엔 행복했을거란 생각입니다.
나중에 살면서는 후회했을지 몰라도 결혼할 당시에는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지 않았을까..
사촌누님은 조건보다 마음이 가는 사람과 결혼을 하신거지요.
제 주변에도 그런분이 계시는데 조건좋은 사람은 마음이 가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과 하셨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 지네요
그 시절에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살게 되셨을 분들..
노후에라도 건강하셔서 옛말하며 호강 하고 계신다면 보상이 되실텐데..
그 시절에는 중매쟁이 님들이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며 혼사를 연결 시키려 하셨을까요..

정훈희 씨의 화사한 미성이 제 마음을 아련한 환상 속으로 몰아넣는군요.

저는 사촌 누님이 세 분 있는데 결혼 후 두 분은 삶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큰 누님은 결혼한 이듬해 매형과 사별한 후 유복녀를 키우며 70이 되셨구요.
둘째 누님은 환갑이 되던 해 매형의 외도를 발견하고 이혼해서 혼자 되었습니다.
저는 삼 형제 중 막내인데 어머니는 장형만 끔찍히 여기며 키웠고
동생 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두 누님은 숙모인 제 어머니에게 따지곤 했습니다.
"숙모, 저것 둘도 신경 좀 쓰세요. 쟤들은 숙모 자식 아니예요?"
ㅎㅎ
갑자기 두 누님이 그리워지는 오늘입니다. ^^;
좋은 글 읽고
인사 드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오랜세월 삶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이제라도 행복이라는것을 조금이라도
누리셔야 하는데요
착하면 안되는 이유가
눈물이 많다는 그말이 맞네요
서울로 시집 가고 싶지만
배운것도 없고 없는것이 더 많으니
차라리 솔잎을 먹노라고ᆢ
그것은 큰 아버지에게 짐을 벗어 드리려고 내린
용단이었다고 봅니다
모두를 팔자소관으로 돌렸어니
착한 가슴에 눈물만 가득했겠지요
애뜻한 마음이 갑니다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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