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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5월 ...용서와 화해

by *열무김치 2014. 5. 16.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 는  그가 쓴 많은 작품들과 다소 대비되는 성격을 보인다.

18세기이래 영국은 물론 문학세계는  문호 세익스피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세익스피어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이 구축되면서  문학의 출발점과  성장과정,인재 등용의 루트로 통용되게 된다.

이는 그의 문학세계가 다양한 장르에 걸쳐 독창성이 강하면서도 대중들의 친화력을 이끌어 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들이 한국사람들에게 크게 어필된 것은 한국 문학이 지닌 독특한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전래 동화의 해피엔딩에는 가난과 불행을 보상받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더 크게 확대 해석을 한다면 시대적인 어두운 단면을 가리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아니었을까.

세익스피어의 위대한 걸작인  햄릿 ,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작품들을 바라 보노라면  한국인들의 정서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라는 말이 있듯 강한 비극과 슬픔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보다 오히려 반발심을 일으키는 모르핀 작용을 한다.

우리민족이 즐겨 불렀던 노래들의 상당 부분이 슬픔을 표현했다면 그 슬픔은 눈물샘을 자아내는 단순한 슬픔이 아닌 참고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는  희망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한국이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다.

서구의 비극적 결말이 우리의 비극과 닮아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는 전혀 별개로 그것을 필두로 가는곳마다 식민지를 일삼던 서구문명이 세익스피어의 문학적 가치를 치켜 세우며 비극과 희극을 말한다는게 우스꽝스럽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상당부분 기록 된다는걸 알면 놀랄일도 아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세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는  그가 남긴 작품중에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복수와 관용, 그리고 용서, 화해라는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천부적인 글솜씨로 잘 버무려 냈다는게 그 이유다.

 

마술 연구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게을리하던 대공 프로스페로는 그의 동생 안토니오가 나폴리의 왕 알론조의 힘을 이용해 지위를 찬탈하자  무력하게 그의 딸과 함께 무인도로 쫓겨나게 된다. 그가 쫓겨날때 늙은 대신에게 귀중한 마법 서적을 얻어가게 되는데 그가 쫓겨난 섬에는  시코락스라는 악녀가 살고 있었다.

시코락스는 괴물과 같은 켈리반을 낳고 에이리얼이라는 정령(精靈)을 나무에 가두어 두고 노예로 부린다.

오늘날 판타지가 예전을 모델로 했음이 자명하다. 물론 프로스페로는 에일리얼을 구해주게 되고  자유함을 얻은 에일리얼은 그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고 괴물 켈리반도 그를 따르게 된다.

세월이 흘러 프로스페로의 지위를 찬탈해 부귀영화를 누리던 안토니오는 그의 거사를 도왔던 나폴리의 왕 알론조와 함께 이웃나라 왕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 오던 중 엄청난 폭풍우을 만난다.

물어보나 마나 마법을 통달한 프로스페로가 거대한 폭풍우를 일으켰고  그것을 빌미로 섬으로 끌여들여 복수를 하기위한 것이었는데 의도와는 반대로 형제는 화해하게 된다.

프로스페로는 복수대신 자신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를 택하면서 그가 몰두하던 마술도 버린다.

 세익스피어는 작품을 통해 용서와 화해의 가치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먼곳이 아닌 우리들 삶속에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이 남긴것으로 전해지는 일리겐슈타트 유서 ,작곡을 하고 있는 베토벤 판화, 원작 카를 슐뢰서, 1890년경.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작품 31 템페스트는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인연이 닿아있다.

베토벤이 세 곡으로 되어있는 소나타 OP.31이 작곡된 시기는 베토벤 자신이 귀가 멀게되는 암울한 시기였다고 알려진다.

육체적인 고립과 그로인한 정신적인 분열은 그에게 치명타를 안기지만 베토벤 자신은 神에게 부여받은 사명이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이겨낸다.

이 곡이 템페스트라는 곡명을 얻게 된데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안톤쉰들러가 베토벤의  OP.31의 연주를 듣고  그가 받았던 감동을 말하며 연주법을 묻자  베토벤은 먼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 보라고 권유 했다고 한다.

템페스트 (tempest) 가 폭풍우를 뜻하는걸로 봐서 베토벤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것으로 보인다.

프로스페로의 마법으로 일어나는  거센 폭풍우와 그 뒤에 찾아오는 평화로운  용서와 화해..

說로 전해지는 내용일지는 모르나 곡을 듣고 있노라면 이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도  그 느낌을 알아채게 된다.

첫 악장의 다소 음울한 분위기, 두번째 악장의 드라마틱한 구성,마지막 악장의  강렬하고 눈부신 기교로 이루어진 세 악장의 곡은 당시 처했던 베토벤의 암울하고 복잡한 심경을 긍정으로 승화시킨 혼이 녹아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신에게 부여받은 생명의 존귀함이나 아름다움을 극단적인 상황에서 표현해 냄으로서 그의 불행이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바탕으로 작용했고 후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쓰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약해 말한다면, 위대한 작품의 뒤안길에는 후대의 사람들을 위한 신의 거대한 계획이 숨어 있었고 당사자들의 처했던 환경들은 우연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대부분의 불행했던 작가들의 삶이 위대한 작품을 이루는 바탕으로 작용했다는 후대들의 평가는 다소 냉정하면서도 이기적으로 비치지만 묘하게 일치하는점이 많은걸로 보아 허언은 아닌 듯 하다.

 

근래의 주변상황을 보노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사람이 용서하지 못할일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간 자리엔 용서와 화합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 없을만큼 깊은 상처가 남았다.이 도려낼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상처는 언제 치유가 될지 지금으로서는 암담하기만 하다.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어야 하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가슴에 응어리가 탁 막고 있어서 사실 답답하고 우울하다.세월호라는 얼른 수긍이 가지않는 이 응어리는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예측이다.이제 이 답답함을 털어내야 살 수 있다고 하소연 한다.

 

 

 

 

세월호 관련으로 모 탈랜트가 검찰의 부름을 받으면서 그가 입고 간  옷차림과 태도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적잖은 나이와 방송계의 연륜으로 봐서 보통 상식을 지닌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여기서 특정종교를 거론할  마음도 없고 또 그럴 위치도 되지 못하지만 이는 종교 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을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종교적인 신념은 때로 어떤 상황이든 긍정으로 받아 들이는 놀라운 힘이 있다.그 긍정이 바른 신앙관에 의해 정립된것이냐 아니냐 하는것은 지면상 한계가 있어서 한마디로 쓰기엔 어렵지만 그분의 태도로 보아 사태의 정황이나 본질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고 보여진다.다만 예를 든다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을 약속으로 이루기 위해 온 예수그리스도를  당시 로마의 압정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민족이나 심지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로 생각 했고 ,예언을 숱하게 전하던 랍비들이 있었음에도 로마에 의해 세워진 분봉왕 헤롯은 태어난 예수가  또 하나의 왕이라는 정치적 위치로 오해한 나머지 두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무참히 도륙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요즘 온통 시끄러운 하나님의 나라나 특정 구원론,나아가 막강한 재력과 정경으로 세력화된 거대 종교집단의 파워플한 모습을 보면서 마치 이 오해를 보는것 같다.하나님의 나라가 이런거였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지금의 신앙인들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 나라는 돈과 권력,인간이 만든 세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구원관 역시도 이 관계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면 인간 욕심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신앙의 삶이 사람이 지녀야 할 아름다운 모습을 배제하고 신앙 자체를 위한 보호막이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면 그 결과는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무서운 결과로 돌아온다. 

 

하도 답답하고 시끄러우니 엉뚱한 베토벤을 끌어들여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식으로 해보는 소리다.지금은 상처가 깊어 정황이 없지만 서로를 보듬고 아우르는 좋은 해결책이 있을것이란 믿음을 두어본다.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glenn  gould Beethoven, sonata Op.31 N.2-1  largo,Allegro

 

 

 

Beethoven, piano sonata No.17, Op.31 "Tempest" (1960)

 

소중하게 주신 댓글을 읽으며 글 제목이 주는 선입감이 오해를 부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우리앞에 나타난 거센 폭풍우..

결국 우리들이 해결 해야만 합니다.

구제 할것과 버려야 할것을  이번에 명확하게 해야 앞으로 우리들이 제대로 살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버려야 할것은 화해와  화합을 위해 깨뜨려야 할  자신의 불신 이라고 봅니다.

국가가 나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했다면 그 책임의 반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화해와 화합은 어렵고 힘 든 이야기지만  우리들이 져야 할 짐이 아닐까요.

 

 

 

 

 

 

저는 의자왕이나 광해군이 폭군은 아님은 물론이고
연산군이나 장희빈도 역사의 기록만큼의 악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사란 어디까지나 승자들이 마음대로 적어둔 흔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의외로 엉터리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유대인 만을 위한 복음이 아닌 인류를 위한 복음이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죄명으로 그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통해 전 유럽으로 전파된 이후
그리스도를 죽인 사악한 종족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유대인들은 탄압당했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공격적인 전도방식을 습득한 후예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그 이상의 방법으로 타종교와 이방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문화를 파괴했지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의 그 특정종교 역시 넓은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가 낳은 부적절한 사생아겠지요.
어느정도 근거가 있으니 그런 이야기도 나왔겠지만 말씀대로 승자의 편에서 기록한 역사가 오류가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개인의 생각을 떠나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구요.
그동안 이들의 악인 역할로 각종 예술분야에서 이를 많이도 울궈 먹었는데 갑자기 아니라면 정말 곤란해 질것 같습니다.
극적인 부분에서의 악인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 위치니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폭군이나 악인은 정점을 향해가는 핵심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극작가들의 위치선정이 영 우스워질것 같습니다.

한 집안에서도 종교문제로 갈등이 이는 경우가 많아 졌습니다.
사실 종교이념은 그 불씨를 이미 안고 있다고 보지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민한 편입니다.

마음의 상처들이 큰 지금 폭풍우를 견디고 다시 평화로움을 찾는 베토벤의 소나타가 생각이 났습니다.
공무원이 타락하면, 국민이 거지가 된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어린생명들이라 많은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가 봅니다. 70이 넘으신건가요, 저분,,,
아침 거리나 방송이 이 사건으로 다 장식하니까, 국민들은 더 (우울)하네요.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하는데, 슬기롭게 잘 극복하고,
늘 사건의 말은 많은데, 처리결과는 늘 미비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큰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떠나서 많이 죄송함을 느낍니다.
아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속앓이를 한 경우가 없었을것 같네요.
잔인한 4월과 5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상가집에 가서 조문을 하려고 , 지인들끼라 모여서 가면, 기독교는 서서 묵념. 그냥 무종교, 불교는 업드려 2번절하고, 반절을 하죠.
그래서 맘이 아팠습니다. 상가집의 종교를 알고 가지 못한 불찰로 생각하고, 많은 사람의 수에 합류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전, 상을 당하신 분의 예를 생각해서 그분의 종교를 받들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을당하신 분이 불교인데, 여기가서 기도를 한다면, 이거 상가가서 할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 종교에 상관없이 상가집을 갈때는 그 상가의 풍토를 존중해줘야 하지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욕을 먹은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부분의 존경심을 생략하시어, 그런경우가 있었지요.. 수행원의 잘못도 있지만, 이부분은 위정자가 지녀야할 기본규칙을 모르는 오류도 포함되기 때문에 시끄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말씀처럼 상가에 갔을때 어떤 자세로 문상을 해야 하냐는 작은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종교에 따라 다르니 문상을 하는 사람도 가끔은 곤혹스러울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런것에 구애를 받지않고 자기 방식대로 합니다.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온 사건이지만 이렇게 큰 아픔을 겪으면서 사회는 모습을 바꾸어 가는가 봅니다.
하지만 이번 상처는 아주 오래갈것만 같습니다.
화해와 용서에 대해 읽으며 '그렇지, 그래야 하겠지...' 했습니다.
열무김치님!
그게 분명한데도, 일반론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긍정적인데도 불구하고, 저 개인에 관한 일에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인가?' 싶은 것은, 인간인 제가 바라보는 인간이고,
인류에 대해서는, 민족에 대해서는, 국민에 대해서는, 이 사회에 대해서는 쉽게 "화해와 용서"를 도입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개인적인 일과 국가사회적인 일, 개인적인 일과 보편적인 일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베토벤 이야기도 깊이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그 베토벤의 전기를 로맹 롤랑이 썼고, 그 전기가 전기문의 효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쓰신 것처럼 그는 귀가 다 멀어서도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는데, 저는 우선 어디가 조금만 고장나면 죽을 것처럼 나댑니다. 이 모양이니...
이게 아주 나약한 인간의 표본인가 봅니다. 어쩔 수 없는......
그런 생각을 하면 저 베토벤이 더욱 빛나는 인물입니다.

'화해와 용서'에 대한 담론이어야 하겠는데, 참 어처구니없는 한 인간의 고백이나 늘어놓아서 쑥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면, 그럼 언제 가까워지나...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간다고 합니다.
다만 그사람의 타고나 성격이나 지니고 있는 지식 정도에 따라 모양을 좀 달리 할 뿐 큰 차이가 없다는거지요
실제로 주변을 보면 그말이 별로 틀리지 않음을 봅니다.
아마 이런 모습이 지극히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오랜기간 교육계에서 다양한 경험으로 살아 오셨으니 생각 하시는것이나 행동도 여느분과는 좀 다르실거라는 제 생각입니다.
자신에 대한 고민 역시도 그 부분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베토벤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자유롭기만 했겠습니까.
신으로 부터 위임받은 위대한 음악가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우리들 시선과는 다르게 한 개인으로서의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나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도
있었겠지요.
우리들은 그의 음악을 통해 추측을 할 뿐이지만 대부분 아름다운 음악만으로도 이런 모든 아픔들이 가리워 집니다.
만일 우리들 생에 어느 누군가의 수고로 이루어진 이런 예술이 없었다면 오로지 먹고 살고 투쟁하는 몰골만 남았을지도 모르지요.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아픈 현실들을 액면 그대로 보면 용서라는 말을 꺼내기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큰 사회로 가기위한 몸살로 보아야 하는데 우리들은 그 몸살을 너무도 가혹하게 치르고 있네요.
요즘은 좀 뜸하지만
전엔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자주 들었었지요
지금 템페스트를 다시 들어보면서
세익스피어 템페스트도 생각해 보네요...

온국민의 마음을 슬픔의 나락으로 빠뜨린
세월호 참사도 한달이 지났네요...
아직도 슬픔은 흥건히 남아있는데...
이 현살속에서 진정한 화해와 용서...?
템페스트만 계속 듣다가 가네요~~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용서 할수는 없겠지요.
또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 갈수도 없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복잡한 우리들의 심경을 대신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 크나큰 고통이 안긴 불신을 딛고 반드시 그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열무김치님
너무도 공감이 가는 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화해와 용서!
모두가 그런 맘으로 삶을 꾸려야 할텐데요..
요사히 각종 방송을 보고 있누라면 울화통이.....
자주 들려 공감의 글에 평화를 찾으렵니다
성장 위주의 틀속에서 소중한 많은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과연 나아닌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용서하고 살 수 있을까..
전 국민이 겪고있을 우울감의 터널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것 같지 않습니다.
불신의 늪이 너무 깊기 때문이지요.
상당기간 호된 몸살을 더 겪어야 우리들의 소중함을 알겠지요.
5월도 하순으로 갑니다.
나날이 푸르러 가는 녹음에 위로 받으며 사시길 바랍니다.
요서와 화해...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용서할 사람과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을 구별해야할 것 같습니다.
용서가 혹시라도 싸구려 화합으로 이어지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테니까요.
네..
특정 종교사상이 낳은 비뚤어진 사고와 그로 인해 얽혀진 일들이 참으로 엄청 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싸구려 화합이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선생님!
용서와 화해에 대한 글
감사히 읽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월에는 용서와 화해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구요
좋은 글 올려 주심에 감사드리며
귀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쉽게 용서가 될수 없는 일이고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느게 우리를 위한 것인지 생각이 많아 집니다.
그냥 다시 뵙게 됨이 반가울 뿐입니다.
저희 역시 세월호, 지하철 사건에 이어서 소속기관 2개소가 화재가 터지는 바람에
5월 한달은 아카시아 피는 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여파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내주 출근하면 무슨 일이 기다릴지 모릅니다.
힘든 시절이군요.
반갑습니다.
여러 일이 있었네요.
올해는이런저런 일들이 분수처럼 쏟아져서 사실 정신이 없기는 합니다.
내일이면 더 낫겠지 하는 희망으로 사는게 우리들입니다.
지금까지 잘 해 오셨으니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겁니다.

네이버 로그인이 안되면 댓글도 쓰기 어렵게 되었더군요.
좀 아쉽긴 합니다.
아니오 남의 다리를 긁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토벤과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인용해서 이런 좋은 글을 쓰신다는 것
왠만한 필력가나 독서가가 아니고선 힘들지요
말씀마따나 요즘 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행태들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사람을 보고 다니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를 가야하는데일부 신도들은 또 광신적으로 목사님들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권위에 대한 존경심으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먼저 욕심과 권력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는 지도자의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심히 걱정이긴 합니다
한국처럼 수많은 종교집단이 난립한곳도 드물지 않을까 합니다.
종교성이 깊은 민족이라 자연스러운 결과겠지만 변질된곳이 너무 많고 정치적 목적으로 바뀐곳도 많아서
이게 과연 종교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구요.

순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애둘러 합리화를 한다고 해도 마음이 시원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과정이 결국 하나의 선을 이루는 밑거름으로 작용 할거라는 희망을 둡니다.
그렇게 희망을 할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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