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추웠다.
짧은 가을이 지면 이내 눈이 내렸는데 어린 마음에도 반년은 겨울이지 싶었다.
논 마지기 깨나 부치는 집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새로 해 얹었는데 달근이네는 그러지 못했다.
새로 지붕단장을 하면 멀리서 보아도 확연하게 구분이 갔다.
노란 빛깔의 말끔한 초가집은 바라보기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벌써 수 년 째 지붕을 해얹지 못한 달근이네 집은 초가지붕의 볏짚이 썩어서 비가 내리는 날은 누르스름한 물이 방안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럴때마다 찌그러진 그릇이나 깨진 사기그릇을 방안 여기저기에 받쳐놓곤 했는데 방안에 누워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실로폰을 치는 소리 같았다.
"난, 눈 내리는 겨울이 좋아. 그릇을 받쳐놓지 않아도 되잖아."
달근이는 여름이 싫다고 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아랫목만 겨우 미지근한 달근이네 와 창순이네집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하루 거지반을 아랫목에 누워 지내는 달근이 어머니는 그런 우리들을 넌즈시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방안에는 토끼가 두마리 있었는데 날씨가 몹시 추우면 달근이가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다.
가끔 무 시래기 말린것을 엄마 몰래 훔쳐다 토끼에게 주곤 했는데 몸집이 큰 쥐만한 토끼는 겨울이 다 갔는데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달근이는 봄이 되면 토끼를 팔아서 돼지를 살거라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방 윗목에 허름한 자루엔 누리끼리한 황옥이 담겨져 있었는데 봄이 올 무렵 자루목이 홀쭉해져 있었다.
고추가루가 없는 백김치에 강냉이밥이 대부분이었던 달근이네 밥상머리에 염치불구하고 끼여앉은 나는 천연덕스럽게 강냉이밥그릇을 비웠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안되어 보여서 엄마몰래 김장독에서 고추가루 듬성한 김치를 훔쳐다 주었지만 달근이 엄마는 여간해서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리곤 얼른 집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어쩌다 목이 잔뜩 쉰 목소리로 무슨 말을 했지만 통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야, 너네 엄마가 뭐라고 하시는거니?"
"몰라 나두."
그렇게 대답하는 달근이의 눈빛은 불안해 보였다.
나는 추운 겨울 밤 달근이네 방에서 밤 늦도록 놀다가 집에 가기 귀찮아 그대로 꼬꾸라져 잠이들곤 했는데 잔뜩 꼬부리고 자는 내 등에 달근이 엄마가 헌 이불을 덮어주는걸 어슴프레 보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추위에 못이겨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곤 했다.
이듬해 봄, 달근이네 집에 낯 선 남자와 여자가 왔다.
서로 싸우는 소리가 나기에 얼른 가 보았는데 달근이는 토끼를 안고 울고 있었다.
"왜 그래?"
달근이는 내가 여러번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달근이네 방에 들어가 낯 선 남자와 여자를 빤히 올려다보자 여자가 내 머리를 쥐어 박았다.
"넌 누구니? 쬐끄만게.."
그들이 돌아가고 한 달이 채 되지못해 달근이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는 날, 달근이네 집에 처음보는 사람들이 여러명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상여를 꾸며 동네를 한바퀴 돌아 뒷산으로 가는동안 달근이 혼자서만 소매로 얼굴을 훔칠 뿐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었다.
봄이었지만 산자락 여기저기엔 허연 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해 한 자 가까이 언 땅을 곡괭이로 파느라 동네사람들이 한나절을 매달렸다.
낯 선 사람들은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다 보았다.
땅을 파서 고르고 고인을 묻은다음 회닫이를 시작하자 동네 어른들이 막걸리 사발을 돌리며 낯 선 그들에게 농을 건넸다.
작대기에 줄을 꼬아 매달고 노잣돈을 건네라고 종용을 하자 그들이 지폐를 몇 장씩 줄에 꿰었다.
달근이는 토끼를 껴안고 한 쪽 구석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모습을 바라다 보았다.
"토끼 네가 길러라."
"넌 어떡하구?"
"큰아버지가 버리고 가래."
달근이는 선 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나에게 토끼를 맡기고 마을을 떠났다.
미련한 토끼는 달근이가 자기를 버리고 가는지도 모르고 풀잎만 물고 오물거렸다.
난 달근이가 떠나자 토끼를 한 쪽 구석에 내동댕이 쳤다.
그러나 달근이가 주고 간 토끼는 그해 여름을 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달근이가 떠났다는 섭섭함에 처음엔 괄시를 했지만 이내 열심히 토끼풀을 뜯어다 날랐다.
제법 토끼꼴을 하던 참이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먹이를 주려고 보니 죽어 있었다.
난 달근이가 나중에 와서 물어보면 어쩌나 싶었다.
엄마 몰래 토끼를 땅에다 묻고 철사로 엉성하게 만든 토끼장을 얼른 내다 버렸다.
"토끼는 어디로 갔니?"
"몰라요. 밤에 도망 갔어요."
난 다시는 토끼를 기르지 않았다.
1984년 높은곳에서 추락해 중상을 입은 나는 반년 가까이를 병원에 있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탓에 아내는 어린 남매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내 간호에 매달렸다.
그러나 회복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많은 병원비 문제로 나와 아내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한 사람이 내 병실로 찾아왔다.
그는 내 침대로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얼굴에 환 한 미소를 지었다.
"나 모르겠어?"
"누구..?"
반색을 하는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 보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월이 가긴 했구나. 나를 몰라 보는 걸 보니..난 단박에 알겠는데."
낯 선 방문에 아내가 그를 물끄러미 건너다 보았다.
"나, 달근이야. 웃집에 살던 달근이.."
"아..."
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제서야 먼 옛날 그의 얼굴이 어슴프레하게 떠올랐다.
"아니, 어떻게 여기를.."
"고향엘 갔다가 자네 소식을 들었지. 얼굴이 그대로 있네.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궁금증이 풀렸다는 표정으로 아내가 음료수를 건네며 눈인사를 했다.
"집사람이야. 너무 결혼을 일찍했나? 벌써 아이가 둘 이야."
그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됐네 하하.."
침대를 밀어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로 나왔다.
"참..네가 주고 간 토끼는 그만 죽어 버렸어. 갑자기.."
"그럴거야 겨우내 굶주렸으니..."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그동안 어디서 살았던거야."
"그냥 , 여기저기 다니며 살았어. 지금도 달라진 건 별로 없지만."
"나도 그래."
"너, 토끼 맨날 껴안고 살았잖아."
그는 내손을 잡으며 아까와는 달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토끼는 동물이 아니라 내 엄마였던 것 같아."
"엄마가 있었는데 그게 무슨..."
오랜 이야기 끝에 그때 돌아가신 분이 달근이 엄마가 아니었다는것을 알았다.
"참, 모진 세월이었어. 그때 친구가 너밖에 더 있었냐. 방 더럽고 냄새 난다고 아무도 안 왔잖아.
너, 토끼 주라고 무 시래기 엄청 훔쳐 왔었지."
달근이는 바람처럼 왔다가 갔다.
대전 어느 공사장에서 공사감독을 한다고 했다.
슬그머니 침대옆에 두고 간 봉투엔 제법 큰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그가 다녀 간 뒤 딱 한 번 전화가 왔다.
그리곤 그것을 끝으로 더이상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분명 잘 살고 있을것이다.
토끼를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자격증의 종류가 100가지가 넘는다고 하네요. 정말 많은거같아요. 제 닉네임을 클릭해서 무료로 자격증 자료들을 받아보세요. [비밀댓글]
예전에 제 기억과 매치과 많이 되서요
저도 어릴 때, 예순이라는 친구네가 웃말도 아랫말도 아닌 언덕중간쯤에 찌그러져가는 초가집에
살았는데 그래도 그집 엄마는 다행히 건강하셔서 없는 살림이지만 밤도 주웠다고 구워주시고
그집에 친구들 모여서 어린 마음인데도 예순이가 하던 일을 많이 도왔거든요
제 기억에 종이꽃을 만들었습니다
그걸 밤이면 예순이와 그 언니가 미군부대앞으로 팔러갔지요
아가씨들과 나오는 미군들이 많이 사줬거든요
엄마가 남의 품일 하고 그리고 그 어린 자매들이 번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간 듯 합니다
그녀도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겠지요
달근이가 참 안쓰라웠네요....
바람 차람 왔다 간 달근이 그분....
아마도 고향은 친구이신 열무김치 님...?
이신 듯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작하신대로 잘 살고 계시리라 믿어지네요^^
그걸 잊고 살아왔습니다.
고추가루 없는 백김치, 그것도 글을 읽으며 비로소 떠올립니다.
그 궁핍함에 얽힌 달근이와의 사연 역시 그와 같은 느낌입니다.
너무도 빨리 잊혀져가는 것들입니다.
입 구(口)자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습니다.
친구의 부인은 친정이 못살았다고 푸념을 하더군요.
저의 조부님은 왜정시대 때 일본인들이 곡식을 세금으로 받을 때
트럭이 열 대 가량 올 정도로 부농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은 초가집이어서 저는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지요.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파란편지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제 본가는 부잣집, 친구의 처가는 아주 부잣집 이렇게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황옥은 무엇입니까?
사과는 아닐테고 ... 사전을 찾아보니 규산염 광물이라고 되어있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강원도 내륙의 산골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았지요.
통일벼가 나오고 밥 술이나 먹게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에도 이제는 아주 오래된 동화 같습니다.
아..
황옥은 당시 정부에서 유일하게 수매를 시작했던 사료용으로 쓰이는 누런 옥수수입니다.
여느 옥수수와 다르게 키가 훌쩍하게 자라고 옥수수 대도 굵고 단단했지요.
옥수수통도 크고 옥수수알도 길쭉하니 커서 쌀로 친다면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안남미 같다고 할까요.
미국에서 들여온걸로 아는데 쪄서 먹으면 맛이 없고 질겨서 찜용으로 쓰기엔 적합한 종자가 아니었습니다.
없는 집들이 말려 두었다가 맷돌에 갈아 밥을 해 먹는데 사용했지요.
이 옥수수는 후일 동네에서 이장일을 하는 사람에게 1년동안의 사례비를 줄때 그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요.
보통 한집에서 두말을 주었던걸로 기억 합니다.
이장은 옥수수룰 모아 정부 수매때 내다 팔았지요.
옥수수를 준 이유는 빈농들이 가을이라고 해도 돈을 봉투에 넣어 줄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글을 쓰시는 분이시니 혹시나 참고가 될까하여 길게 설명 드렸네요.
중복날이니 복달임 잘 하세요.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라 궁금했습니다.
심상대씨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가입니다.
강원도 묵호 출신으로 그분이 낸 소설책은 거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책을 읽을 때마다 모르는 강원도 토착용어가 너무도 많아서
아예 사전을 끼고 읽곤 합니다.
왜정시대에 상당한 부자라도 기와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기계로 찍어내는 공장식 기와가 아니고 전부 손과 반죽해 직접 손으로 한장 한장 만들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와 가마에서 굽던 것인데다 벌목을 금지하던 시절이라 장작은 더욱 귀해서
흙기와집에서 산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네요.
뿐만 아니라 사람이 너무 잘 사는 티를 내는 것도 좋지 않은 시절이었죠.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쑥돌(대리석) 비석 하나 세우려면 나락 100석(12톤) 이상이 들어가는데
왜정시대 이 정도 재력을 비석을 세우는데 사용할 농가가 많지 않아 그 시절 망자들은 거의 모두 비석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가진 것이라고는
자존심 밖에 없으면서.
뭔가 대단한 것을
가진 것처럼 큰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그 잔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집부리고 . 불평하고 , 화내고
싸우고 다툽니다
그러나 마음의 꺼풀을
다 벗겨내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잔존심을 버릴 나이가 되면
공험함과 허무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벗겨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아픔이 필효 하지요
불친님 오늘이 중복이라고 하네요
맛난음식 드시고 건강 하시기 바람니다 ,,,
달근이~~~
글을 읽다 보니 어릴 적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군요
그 때는 왜 그리도 못 먹고 못 입고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지요~~~
참으로 안타깝고도 모진 세월이었지요
그래도 선생님게서는 좋은 친구를 두셨기에 오늘도
그 친구를 생각 하시며 추억에 잠기실 수 있으심에
행복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 그 분도 잘 살고 있을 것입니다
심성이 워낙 고우신 분이셨기에~~~
가슴 찡한 글에 마음 내려 놓아 봅니다, 선생님!
옛날 시골의 기억들이 저도 떠오르는 글 잘 보고 갑니다.
달근친구의 의리 참 멋집니다
누구나 할수 있는건 아닌데 말예요
더운날 고생했습니다
오늘은 좋은 아침입니다 '
활기찬 출발하시며 '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풀리시는 '
기분 좋은 월요일되세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침 인사드립니다 ~~~~~~~~~~~~**
- ★ 미다스 kan7ry
- 2015.07.28 09:23 신고
- 수정/삭제 답글
날씨가 덥고, 후덥기만 하고, 불쾌지수는 높고, 그런 날입니다.
토끼는 집밖에서 기르던 기억이 있지만, 방안에서는 첨듣는 이야기네요..
잘살고 계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그만 눈시울 붉히고 말았습니다.
그 시절엔 왜 그리 지붕하나 새로 얹지 못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 살아야했는지 직접 경험은 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면 참 힘들었겠구나 싶습니다.
비록 토끼 한 마리 기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던 친구 분의 마음은 아팠겠지만
서로에게 따스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두 분은 정말 멋지고 훈훈한 삶을 이어오신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병실을 찾아와 마음을 전해주고 가신
달근이 친구 분도 지금은 성공하여 좋은 가정 이루고
분명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글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열무김치님은
글꾼의 필력을 갖고 태어나신 분 같습니다.
어찌 이리 잘 풀어내시는지요.
더위에 몸 건사 잘하십시오^^*
휴가는 다녀 오셨는지요
전 오늘부터 휴가인데 손님들이 온다고 해서
휴가도 못 가고 하루종일 방콕하다가
늦은밤 다시금 고향 친구분에 대한 깊은 정을
읽으면서 안부 놓고 갑니다
고운꿈 가득한 여름밤 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그때가 못 먹고 못 살긴 했지만 정이 넘치는 세상이었죠.
지금은 예전보다 호당 경작 규모가 5~10배 불어나 각자 먹고 살기 바빠 농촌도 이제 이웃의 일에 손길을 내밀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가고 있지요.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의 동네친구가 어쩌면 진정한 친구인가 싶습니다.
저도 동네 친구가 이런 저런 부탁을 전화 너머로 멀리서 하는데 한 가지도 들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살기도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먼지 풀풀 나는 동네 골방에서 어릴 적 모여 놀던 기억이 다시 떠 오르게 합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 이야기 (0) | 2015.08.04 |
---|---|
사진 찍으려고.. (0) | 2015.08.01 |
7월로......시골에서 (0) | 2015.07.18 |
고랭지의 불편한 진실 (0) | 2015.07.18 |
7월로 (0) | 2015.07.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