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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어떤 인연

by *열무김치 2014. 4. 13.

 

 

 

 

85년 봄

4월 초라고는 하지만 날씨는 겨울추위를 겨우 벗어난 정도였다.

못된 지주놈이 땅마지기깨나 가지고 거드름 피우듯 산골 날씨는 여차하면 눈발이 날려서  거뭇거뭇 피어나는 진달래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벌채를 해 낸 산에다 나무를 심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해 水洞 골짜기를 찾아 들었다.

75년경에 OO여정보에 상당량의 나무를 심은 이래로 이렇게 많은 나무를 심기는 오랜만이라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그동안 강산이 바뀔만한 세월이 흘렀지만 산골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더우기 도로사정은 형편이 없어서 여름 장마가 지나면 이곳에 언제 길이 있었나 싶을정도였다.

고씨와 둘이서 보름 예정으로 내려 왔지만 막상 내려와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걷다가  넘어지기 십상인 돌부리 가득한 좁은 산길은 일 시작도 전에 짜증을 불러왔다.

"이런 산골구석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 대단혀. 이 구석을 또왔네. 안 오려고 했는데.."

집구석에 있어봐야 마누라 바가지니 긁힐 고씨가  왜 따라 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누가 따라 오래요? 기껏 와 놓고는.."

"아, 이사람아 , 일 봐달고 부탁하고 매달린 사람이 누구야? 도로 갈까?"

시오리를 족히 들어 가서야 다 넘어 갈듯한 초가를 만났다.

"이 집 말하는거예요?"

"맞구만. 근데 최씨는 있을랑가?"

"허..아무리 둘러 보아도 변변한 세간살이 하나 보이지 않는데 무슨 수로 밥을 해  준다는거야?"

입을 내미는 나를 바라보던 고씨가 씩 웃으며 산쪽을 가르켰다.

"쩌~기 사람 오는거 보이지? 저 여자가 밥해 줄 여자야."

산쪽을 바라다 보니 머리에 광주리를 인 젊은 여자가 내려 오는 게 보였다.

"누군데요?"

"누구긴..최씨 딸이지."

 

동네에 소문을 냈다.

남자 일당 4,000원  여자 일당 3,000원을  주겠다고.

아무리 둘러 보아도 도무지 사람이 살 것같지 않았다.
"나무심을 인부가 나오기나 할까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요."

"아따, 걱정 붙들어 매더라고.잔말 말고 낼 아침에 봐. 엄청날테니."

고씨는 일도 시작하기전에 됫병술을 깠다.

최씨 딸이 김치나부랭이를 안주로 내오자 소리를 꽥 질렀다.
"마당에 장탉도 많더만.  한 마리 때려잡지 .돈은 나중에 주께"

최씨 딸은 들은 척도 하지않고 휭하니 정지를 나갔다.

"저거 봐. 꼬라지 하고는..저러니 소박을 맞았지."
"소박을 맞아요?"

"몰라도 되여. 그런 게 있다고"

고씨는 신 김치 조각을 입에 털어 넣더니 아예 사발에다 소주를 쿨쿨 따랐다.

"이제보니 인심을 잃었네요. 저 아가씨 표정 좀 봐."

이미 벌채일로 이곳에서 일을 여러 번 했던 고씨는 아버지가  철썩같이 믿는 사람이어서 이번 식목일거리도 사실 고씨에게 맡긴거나 다름없었다.

 

아침에 마당에 나서자 족히 20명이 넘는 인부가 와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걱정 말라고."

난 입을 쩍 벌렸다.

오호라,이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거야.

묵는 집에서 오리 가까이 내려와 가식을 해 두었던 묘목들을 날랐다.

얼음물 요란하게 흘러내리는 골짜기로 묘목단 어깨에 진 인부들이 마치 아이들 소풍가듯 일려로 늘어선 풍경은  산골에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75년경에 나무를 심을때만 해도 골짜기마다 살았던 화전민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하는데 여전히 이름모를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살았다.

벌채를 해 낸 산은 붉으죽죽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쓸만한 목재를 빼내고 불필요한 가지를 모아  일렬로 정리를 해 두었는데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조회시간에 모인 초등학교 아이들 모습 같았다.

골 을 찾아 몇사람씩 나무를 심어 나갔다.

낙엽송과 전나무 잣나무를 심었는데 낙엽송은 이미 키가 큰지라 등에 메거나 옆구리에 차고 다니기에 힘이 부쳤다.

"제대로 푹푹 파고 심어요. 슬쩍 눈가림만 하지 말구."

고씨는 마치 제가 산주나 되듯이 잔소리를 해댔다.

"이거 봐 윤씨..더덕이 제법 있네."

고씨는 아이 주먹만한  씨알이 굵은 더덕을 들어 보이며 큰소리로 웃었다.

"거, 다른 사람들 덞어요. 나무나 심지 무슨 더덕은.."

 

 

 

 

 

 

 

 

점심시간에 최씨 딸이 점심을 머리에 이고 왔다.

"도시락 싸 달라니까  왜 힘들게 오세요."

미안한 마음에 말을 건넸는데 고씨가 재빨리 낚아챘다.

"무신 소리여. 찬밥 보다 이게 훨씬 낫지.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고만."

"거리가 얼만데...내일부터는 그만 두라고 하세요."

"자 자..엄한소리 말고 이리 오더라고.

더덕 캔 거 많으니께  한번 깨물어 보기나 하고 잔소리를 하던가."

고씨는 언제 껍질을 벗겨 두었는지 허연 더덕을 내밀었다.

밥을 이고 온 그녀는 멀찌기 떨어져 무언가를 열심히 캐고 있었다.

옆에서 점심을 먹던 인부들이  별난거나 먹나 하는 눈초리로  우리들이 먹는 밥 광주리를  멀거니 건너다 보았다.

 

비탈진 밭을 가는 산골농부의 소모는 소리와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산골짝의 4월은 다른 세상에 와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봐 윤씨, 내일은 일 집어 치우고 천렵이나 하는 게 어때?"

"아이구 참, 일한지 며칠 됐다고 그래요. 빨리 심고 가야 되는구만  천렵은 무슨.."

"아따 사람 빡빡 하기는..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여. 그러지 말고 내일 개울가나 나가자고. 닭 마리는 내가 낼께."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날 믿고 그러는 고씨를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이튿날 , 날씨도 좋은데다 어떻게 소문을 냈는지 개울가엔 수십명이 나와 있었다.

"아니,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뭘로 천렵을 하려고?"

"에혀,사람 하고는.. 저사람들 빈손으로 안 왔으니께 걱정 붙들어 매더라고."

몇사람이 모여 닭이나 잡아  소줏병이나 마시면 되겠다 싶었던 나는 걱정이 몰려왔다.

어찌됐든 내가 일을 시키는 입장이고 이왕 벌어진 술판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조금뒤 보니 그런걱정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언제 잡았는지 개울가 한쪽 구석엔 누렁이 한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내 가마솥이 걸리고 덩치가 제법 큰  누렁이는 짚불에 그을렸다.
"개는 이렇게 짚불에 그을려야 제맛이지. 윤씨 개고기 하지?"

"아이고,  저 그런거 못 먹어요."

"재미 없기는..  그럼, 그 나이 먹도록  뭐했나? 세상 헛살았구마."

여럿이 달겨들어 불에 그을린 개 털을 긁어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손질하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가마솥에 앉쳐졌다.

다른 솥에는 족히 대여섯마리가 넘는 닭들이 빼꼼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 자, 오늘 기분좋게 한잔들 합시다. 오늘 이자리는 감독 양반인 윤씨가 마련했구요.

개는 내가 한 마리 냈으니 실컷들 먹고 내일부터 또 잘 부탁 합니다."

소줏잔을 높이 치켜든 고씨는 무슨 선거에 나온 후보자처럼  목소리를 깔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 한잔씩 따르시고..오늘 이자리를 마련해 주신 윤씨 양반의 한 말씀이 있겄습니다."

"무슨 한 말씀이요.왜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요."

내가 뒤를 빼자 고씨가 나를 사람들 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 복판으로 나선 나는 건배 제의를 하면서 얼떨결에 하지 말아도 될 쓸데없는 객기를 부렸다.

"많이 와 주셔서 감사 합니다. 앞으로 잘 도와 주시고, 오늘 드시는 음식이나 술은 제가 다 내어 드릴테니 기분좋게 마시고 오늘 하루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성이  개울가를 흔들었다.

"괜히 감독이 아니라니까 . 윤씨 이제보니  기분파네. 자 ,자 먹어 보자고."

그때까지만 해도 난 술판이 그렇게 커질지도 몰랐고 엉뚱한 사건이 터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됫병 소주들이 오가고 삶아 낸 개고기와 닭고기가 푸짐하니 놓였다.

술 서 너 잔만 마시면 뻗어 버리는 나는  이사람 저사람이 건네는 소줏잔을  연거푸 들이키고 얼굴이 벌개진 상태였다.

"윤씨, 개고기 좀 뜯어 보라고."

고씨가  개고기를 건넸다.

"못 먹는다고 했잖아요. 닭고기 먹을테니 고씨나 많이 먹어요."

"이거 먹어야 어른이 된다고. 나이가 몇 인데 무신 남자가 개고기도 못 먹나."

술잔을 건넨 고씨가 개고기를 내입에 들여 밀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소주를 몇 잔 더  들이키곤 건네주는 개고기를 물어 뜯었다.
"옳지 옳지. 잘 먹누만. 요거이 맛 들이면 다른 고기는 못먹지."

헤롱헤롱 ..그뒤로 건네주는 소주 서너 잔을 더 마신 나는 그대로 나동그라 졌다.

 

고함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실눈을 떠보니  방안이었다.

아니,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방문이 삐끔 열리더니 최씨 딸이 얼굴을 들여 밀었다.

"깨셨어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정신을 못차리셔요?"

봉당을 나서자 최씨 딸이 찬물 한대접을 건넸다.

이미 저녁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방안에? 사람들은요?"
"고씨 아저씨랑 제가 부축하고 왔어요.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데요 뭐."

개울가에서는 노랫소리와 고함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도 안 끝난거예요?"

"끝나려면 멀었을걸요. 술병이 많던데.저양반들 모처럼인데다 이런 산골짝에서 무슨 낙이 있겠어요? 기회를 잡은거지."

개울가로 내려가자 웃통을 벗어 제끼고 춤 추는 사람에 한쪽 구석에 나동그라져 자는 사람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고, 저 형편없는 감독양반 오시네 . 이리와서 해장술 한 잔 더 하더라고"

동네 사람들이 나를 잡아 끌고 다시 술잔을 건넸다.

"아직도 노시는겁니까? 대단들 하시네요."

더이상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지만 건네 준 몇 잔의 술을 더 들이켰다.

안주를 집어 먹으려고 보니 여기저기 널브러진 그릇엔 남은 것이 없었다.

"날도 저물고 하니 이만 끝을 내시지요. 내일 일도 해야하니.."

 그런데 게슴츠레한 눈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한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뭐야 , 이 XX 놈아. 네가 감독이면 여기서도 감독이냐.  우리가 산골짝에 산다고 개 XX로 보이냐?"

갑자기 험한 욕지거리 날라왔다.

"왜들 이러세요.제가 언제 그랬다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이내 다시 술에 쩌들은 욕이 날라왔다.
"뭘 봐 XX 야. 뒤질래?"

고씨가 나서며 말렸다.

"야, 이사람아 , 감독이 뭘 잘못 했다고 이래 . 술 잘 처먹고 놀았으면 됐지 왜 엄한데 지랄이야."

"니놈도 저쪽편이다 이거지..야 , 이 XX 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멱살잡이와 주먹질이 오가더니 이내 두사람은 개울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난 어쩔줄 모르고 말리느라 허둥댔는데 그러다 말 줄 알았던 멱살잡이가 더 큰 싸움으로 번졌다.

술에 잔뜩 취한 고씨는 마구잡이로 날라든 주먹질에 코피가 터져 있었는데 피를 본 고씨가 주변에 있던 나무작대기를 들고 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 사람이 고씨에게 달겨 들었고  고씨는 개울가 한쪽 구석으로 그대로 쑤셔 박혔다.

냉정함을 잃지 말고  차분하게 대처를 했어야 할 나는 몇 잔 더 들이킨 소주도 거들었거니와  아직도 남아있는 젊은 혈기를 거스리지 못하고  결국 사단을 냈다.

코피를 쏟는 고씨를 본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해 댄 것이다.

결국 서로 뒤엉켜서 마구잡이로 주먹질이 오가고 비교적 정신이 맑았던 나는  그 중 몇 사람을 무차별로 걷어찼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이 별 저항을 하지 못하고 나둥그라지고 몇 몇 은 넘어지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진걸 안 고씨가 나를 뜯어 말리고 최씨 아저씨와  그녀가 쫒아 내려오고서야 난장판은 끝이 났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그녀는 윗도리가 찢어진 내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동네에서 한참 떨어진 지서에서 순경이 나왔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묵고있는 초가를 찾아온 순경은 나를 부르더니 왜 폭행을 했느냐고 물었다.

두사람이 원주 OO 병원에 입원을 했다면서.

빨리 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엉뚱한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지서에 가서 몇가지 조사를 받고 나왔는데 잘못하면 더 큰 곳으로 사건이 넘어가니 합의를 잘 해보라고 했다.

우선 동네사람들이 입원 했다는 병원을 찾았다.

막상 병원을 찾아가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치게 한 건 제 잘못인데 왜 그러셨어요? 왜 욕을 하고 먼저 치셨냐구요.?

내가 물었지만 그들은 눈치만 살필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말을 해 보라구요. 아무리 술이 취해도 그렇지 저랑 평소 안면이 있었던 분들도 아니고.."
그러나 그들은 미안하다는 말 만 되풀이 하곤 외면했다.

 

지서에 동네사람들과  다시 올라갔다.

이미 고소를 한데다 병원에 환자가 입원을 했기때문에 일이 간단하게 끝날것 같지 않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과 천렵을 한일이 고소로 이어진게 기가 막혔지만 내가 폭행을 한 건 사실이니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고씨와 그녀가 뭘 어떻게 한건지 일이 잘 풀렸다는 연락을 받고 지서에 갔더니 동네사람들과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지서를 나오면서 그녀가 나를 보면서 웃었다.

"숙맥같은 양반이 뒷처리도 못 할거면서 주먹질은 왜 한데?"

"무슨 말 했어요?"

"잡아 넣으라고 했어요. 죄질이 극히 나쁘다고."

 

얼뚱한 일로 열흘 가까이 나무를 심지 못하고 있었다.

한두번 봄비가 내리고 가식해 둔 묘목에 움이 돋는걸 본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큰일 났네.

다행이 그녀의 도움으로 동네 사람들과 입원을 했던 두 사람이 좋게 합의를 해 주어  병원비를 물어주는 조건으로 갑작스레 벌어진 천렵사건은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사건 뒤로 몇 사람 말고는 인부들이 일을 나오지 않았다.

고씨를 앞장세워 권면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벼룩도 낮짝이 있지. 실컷 처멕여 놨더니  겨우 주먹질로 보답을 해?

그러니 무슨 낮짝으로 기어나와. 사람이면 못그라지"

투덜거리는 고씨를 보고 난 소리를 꽥 질렀다.

"이게 다 고씨 때문이야. 왜 난데 없는 천렵은 하자고 해서 일을 이모양으로 만드냐구요."

"순한 산골 사람들이라 누가 그럴줄 알았나. 술 처먹는 버릇이 아주 드러운거지."

"그나저나 그날 먹은 술값이랑 개값은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전방에 외상으로 달아놨지. 윤씨가 다 낸다메?"

이런, 빌어먹을..

 

동네사람 두어명과 종일 나무를 심어봐야 도무지 일이 진척이 되지 않았다.

울화가 치밀어 산등성이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 보았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 많던 고씨도 상황을 눈치 챘는지 아무말 없이 나무만 심었다.

저녁을 먹고 누워 있는데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데이트 좀 하실래요?"

화장끼가 역력한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분 냄새가 슬며시 돋았다.

"어쩐일로?"

그녀는 윗목에 두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일 때문에 고민 되시지요?"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동네사람들에게 얘기를 잘 해 줘서 고마웠어요.신세를 졌네요."

"아니예요. 그래도 우리집에 밥먹고 지내는 식구인데 당연한거지요. 동네 양반들이 어른 구실을 못한거지. 여튼 그놈의 술만 먹으면.."

흘려만 보았던 그녀는  밤시간이라 그런지 낮에 보던 모습과 달리 도시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처음부터 궁금 했는데 이런 산골짝에 어떻게 사시는거예요."

"사연이 길어요. 혼자 사시는 아버지를 몰라라 할 수도 없고..여기 좋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결혼을 하셨나요?"

그녀가 느닷없이 물었다

................

이미 아이가 둘이었던 나는 결혼을 한 유뷰남이란  말을 얼른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제가 사람을 모아 볼께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녀는 짧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숨어 있었던 묘한 설레임이 일고 있었다.

야, 이놈아. 사내놈들이란...

 

이튿날 그녀는 아주머니 몇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도시락 싸왔어요.저도 심을께요."
빨간 모자를 쓴 그녀는 활달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녀의 밝은 표정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갑자기 또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저기요. 오늘부터 임금을 조금 더 올려 드릴께요."

나무를 심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만세를 불렀다.

"아니, 윤씨 , 갑자기 왜이래. 약 먹었어? 아직 개값도 그대로 남아 있다구."

고씨가 귓속말로 너분 댔지만 그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달아올라 있었다.

"저거 저거, 집에 가면 쫓겨나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걱정 붙들어 매시고, 아버지께만 입 다물면 되요."

"그나저나..총각이라고 했다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는. 누가 그래요?"

"누구는 누구야. 밥 해주는 사람이지. 딴소리는."

"뭐라고 그랬는데요?"

"뭐라고 하기는 ..난 모른다고 했지."

고씨가 입을 삐죽거리며 킬킬대고 웃었다.

"허허, 총각이 모두 얼어 죽었네. 저러다 험한 꼴 보지."

 

그녀는 나무심는 일을 열심히 도와 주었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을 데리고 다니며 미처 몰랐던 곳까지 찾아서 일을 해 주었다. 

4월 말이 다 되어서야 일이 대충 끝이 났는데 중간에 일을 쉰 걸 봐서는 아주 다행이었다..

그녀는 종일 일을 하면서도 정성을 다해서 식사를 챙겨 주었다.

산골짝에서 보기 드문 생선도 자주 올라왔고  저녁상을 물리면 커피잔도 잊지 않았다..

좀 거북스러울만도 할텐데 저녁을 마치면 가끔 내방으로 건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한달 가까이 이어진 나무심기 일을 마치고 그동안 일 한 품삯을 나누어 주던날 마침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무 잘 살겠네. 때맞춰 아주 잘 오네, 잘 와.."

품값을 받기위해 모인 산골동네 사람들이 나 들으라는듯 말했다.

천렵때 싸움판을 벌렸던 사람들은 미안 했던지 다른사람을 보냈다.

"옘병할..염치도 좋네. 나같으면 돈받으러 사람도 못 보내지. 그지랄을 하고도 품값은 챙기러 오는구만. 드런놈들."

고씨가 대신 돈받으러 온사람들 들으라는듯 투덜거렸다.

올려주기로 한 품삯을 계산하고 그녀에게 밥값을 치루었다.

생각보다 밥값이 적어서 일주일분을 더 얹어서 주었지만 그녀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나무를 심고 결산을 하자 큰 돈이 나갔다는걸 알게 되었다.

병원비를 합의해 주는 바람에 나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해야했다.

적금을 깨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통장을 털었지만 돈이 모자라 할수없이 가까이 알고 지내던 동내 형에게 상당 금액을 빌렸다.

郡 에서 지원된 금액으로는 턱도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 몇년간 풀도 깎아야 하고 가지치기를 하려면 지원된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올라오기 위해 옷보따리를 싸던날 그녀는 가져가서 먹으라며 주섬주섬 반찬거리를 싸 주었다.

"여름에 다시 오는거지요?"

여름에 다시  올거 같다고 하자 꼭 자기집에 들르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 올랐다.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바라보기가 너무도 미안했다.

그러나 생각한것과는 달리 그해엔 그곳으로 내려가지 못했고 어쩌다 들려오는 그녀의 소식만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누에를 반장 쳤는데 농협에서 누에고치를 수매하는 날이었다.

당시 농촌에서 변변한 봄벌이가 없어서 누에를 치는일은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일거리였다.

난 농삿일을 하면서도 아내와 틈틈이 뽕을 따다 날랐다.

누에가 막잠을 자고 소나기 내리듯 뽕잎을 먹으면 이내 솔가지를 쳐 주어야 했다.

누에들이 솔가지에 기어 올라가 실을 뽑기시작하면  하얀  고치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그걸 가만 지켜 보노라면 마치 마술에 걸린듯 몽롱해 졌다.

집을 지은지 일주일 쯤 지나면 누에고치를 땄다.

영양가 많은 논 밭 주변의 뽕잎을 먹고자란 누에고치는 크고 실했지만 억센 산뽕잎을 먹고자란 고치는 작고 볼품이 없어서 가격도 부실했다.

집집마다 몫돈을 쥐면 그달의 시골 오일장은 모처럼 장을 보러 나온 시골 사람들과 장사치들로 붐볐다.

들쩍지근한 아이스케끼와 자장면을 먹게 된 아이들도 신났고 오래 된 신발을 떠나 보내는달도 6월이었다.

단단이 한 몫 챙긴 어물전, 신발 장수들이 유월만 같았으면 살겠다고 했다. 

 

 

 

 

 

"집이 여기예요?"

마당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대문을 삐끔히 열고 들어왔다.

그녀였다.

"아이구, 오랫만이에요. 안녕 하시지요?"

난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에 적잖이 놀랐다.

"어쩐일로 여기를 오셨어요?"

"누에고치 내려구요. 끝났어요 지금."

그녀를 마루에 앉게 한 뒤 방안으로 들어 왔지만  다음 생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지? 뭐라고 해야하나..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따라 들고나가며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갑자기 더워 지네요.."

"더울때도 됐지요 뭐."

그녀는 음료수컵을 들고 여기저기 살폈다.

"집에 아무도 없네요."

"아..예.."

"부모님은 같이 안 사시나봐요?"

"나가셨지요 뭐. 그런데 누에를 쳤어요?"

내가 묻자  그녀는 집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짧게 말했다.

"네, 농사도 별로 없고 근처에 산 뽕도 많고 해서.. 그리고 아버지는 지난달에 돌아 가셨어요."

"아, 그랬구나. 연락이라도 좀 하시지 그랬어요. 거리도 가까운데."

"이곳에서 돌아가신것도 아닌데요 뭐. 포항에서 보내 드렸어요."

"저런..건강해 보였는데..그럼 혼자 계시겠네요?"

"네, 처음엔 좀 그랬는데 이제 익숙해 졌어요.

이곳에서 더 살아야 하나, 다른곳으로 가야하나 생각중이예요."

그녀는 앞산을 바라보며 날보고 어쩌면 좋으냐는듯 말했다.

"나무가 잘 살았는지 모르겠네 .8월 말경에 풀깎기 작업 때문에 가야해요."

"나물 뜯으러 가면서 보니 잘 살았던데요. 땅이 좋잖아요. 내려오면 또 오세요."

"그래야 할것 같네요.부탁 합니다."

"올 여름이 더울것 같다는데 일찍내려와야 되지 않겠어요?."

"마음대로 하는게 아니라서.. 내려가면 인부좀 구해 주세요. 지난번처럼요."

"알았어요. 또 싸우면 안되구요."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지만 다음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앞산을 바라다 보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녀는 얼른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瑜眞이가 불쑥 들어왔다.

"아빠, 우리 내일 발표회 한대. 아빠 엄마 오시래."

............

그녀가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아빠, 아줌마 누구야?"

그녀는 마시던 음료수컵을 슬며시 마루에 내려 놓았다.

"어머..아이가 크네요. 예쁘게 생겼네."

딸 아이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다 보았다.

나는 아주 이상한 자세로 서 있었다.

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마당으로 내려가 쪼그리고 앉아 키를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몇살이니? 학교에 다녀?"

딸아이가 손가락 여섯개를 펼쳐 보였다.

원주에 나가 사다준 500원짜리 티셔츠가 후줄그레한 딸아이 손에 그녀가 돈을 쥐여 주었다.

"이거 , 과자 사먹어."

딸아이가 돈을 받으며 나를 바라다 보았다.

마당에서 딸아이 손을 잡고 앉아있던 그녀가 얼른 일어났다.

"같이 온 사람들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 볼께요. 반가웠어요."

그녀는 작은 보따리를 챙겨들고  총총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뒤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난 마루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돈을 받아든 딸아이가 인사를 건네곤 돈을 들어 보이며 나를보고 웃었다.

 

"엄마, 예쁜 아줌마가 나 과자 사먹으라고 돈 주고 갔다."
"그게 누군데?"

"몰라 나두..아빠랑 있었어."

"얘가 지금 무슨 얘기 하는거예요?"

"나두 몰러. 무슨 말인지..."

"무슨말이 그래?"

 

"왜 이렇게 덥지? 더워 죽겠네."

곁눈으로 홀기는 아내의 눈초리를 피하려 나는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그해 여름이 또 오고 있었다.

 

 

 

 

 

 

 

 

310

 

 

 

실제 일어난 이야긴가봐요
약간은 슬프기도 하고
그후의 그녀의 행방이 궁금하기도 하고
암튼 참 기억력도 좋으시고 글솜씨도 좋으시고
언젠가 꼭 책을 한권 내시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선생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글을 읽다 보면
우리네 산골의 옛이야기 소롯하게 되살아서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합니다, 선생님!

이렇듯 정겨웁게 글을 써 내려 가기가
여간 어려움이 아닌데
진솔함이 가득 담긴 글을 쓰시는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수필가이십니다

이렇듯 정겨움으로 따스하게
쓴 수필을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 봅니다
어릴 때 산골에 살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
눈가에 이슬이 맺혀집니다, 선생님!

귀한 글 감상할 수 있음에 행복 가득 담아 갑니다
고운밤 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젊은 시절, 결혼을 했음에도 매력적인 여자가 결혼여부를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렸던 기억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 까닭 모를 슬픔을 느끼곤 했는데
둘 다 같은 원인을 갖고 있을 터입니다.

잘 쓴, 그러니까... 아주 잘 쓴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이렇게 쓰시기 까지 얼마나 문장을 갈고 닦았을지 그 노력도 짐작하게 되구요...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웬만한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 수준을 훨씬 넘겠다는 생각입니다.
바쁜 월요일 아침, 숨 죽여가면 열심히 읽었습니다.
좋은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위에 할미꽃이 예전에 산소에서 보던 할미꽃이네요.
참 오래된 옛이야기네요.
그 때만 해도 사모님이 젊어서 어수룩해서 모르셨지 .

남자들이란 다 그런가 봅니다.
나중에 마눌님에게 혼날 생각은 않고 ...
어째든 재미있는 추억입니다.
나중 이야기는 쓰시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많이 혼나셨겠지요.

그때 심은 나무가 많이 자랐겠습니다.
그 나무가 청솔모가 다 자신다는 잣나무인가요?.

재미있는 단편 소설 한편을 읽었습니다.
순수하고 재미 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유익한정보!!b
이게 지금 픽션입니까?
논픽션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그 뭐냐, 아주 난처한 얘긴데, 그 난처한 얘기를 들어주지 못할 분도 당연히 계실 것 아닙니까?
ㅎㅎㅎ 웃자고 하는 얘깁니다. 남의 얘기지만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열무김치님은 재미있는 소재가 어떻게 그리 많습니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 . . 알고 보니 도처에 염문을 남기셨군요.
부럽습니다.
핫핫핫
- 청청수 -
포스팅 구경 잘하고가요!r
방가워요.d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글솜씨가 수준이시네요...
80년대 산골의 정겨움이 묻어나는 한 편의 단막극이네요.
어쩌면 그시절이 좋았던 같기도 하지요.
지금처럼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도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당시 이장 지도 아래 울력으로 산에 나무를 심었는데 조림이 조금 특이한 경우였네요.
조림 중에 싸움 사건은 이후 인생의 행로에서 많은 지침이 되셨을 것 같네요.
일종의 일찍 맞은 매인 셈이었을 듯 싶습니다.교훈이 되어 같은 매를 두번 맞을 일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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