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은 언듯 가까이 다가 가기에 곤란한 학문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저 하늘에 있다는 神을 내곁으로 들이는 일을 막연하게 만들어 버린게 다름아닌 人文學 이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하게 본다면 인본주의 신학이 그 모태인데 알고보면 그 자체가 철학을 바탕으로 한 人文學이 뼈대이니 굳이 갈라놓을 필요도 없다.
인문학에 宗敎學이 포함되어 있다는건 참으로 넌센스다.
과연 哲學이 神學을 대변할 만큼 설득력이 있다는 말인가?
경험의 산물인 哲學은 신의 존재를 갖가지 모양으로 형상화시켜 버렸다.
인본 신학이 만든 갖가지의 신은 오늘날 우리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들이 세운 바벨탑은 이미 창세기의 바벨탑보다 더 높아서 또다른 성서를 써가고 있다.
예수님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기였다.
그들은 악압받고 있었고 지난날의 숱한 고난은 구약의 예언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또다른 빌미기 됐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여겼지만 예수가 무슨 구원자였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마저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처지에 관한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얼른 알아 들을 수 없는 비유로 당신의 나라에 관한 내용만 전했다.
그들은 그 나라가 곧 자기들의 눈에 보여지는 나라라고 믿고 예수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나라는 달라진것도 없이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버린다.
당시의 내로라 하는 랍비는 예수가 구약의 마침표라는데 대하여 극히 회의적이었다.
마침내 그들을 속사람을 보지 못하게 만든 신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그후에도 당신의 나라를 오래도록 오해했고 일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기독교인들이 질시의 대상이 되는건 그들이 말하는 핍박의 유무를 떠나 참으로 난해한 일이다.
추구하는바 성서가 말하는 내용으로만 간다면 왜 이리 시끄럽다는 말인가.
교회가 방대하면 곤란하다.
사람 생각이 아니라 성서가 그렇게 말한다.
신앙은 서클이 아니며 사교적인 집단도 정치적인 배경도 아니다.
역경에 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십자가에 매단건 겉사람만 보게만든 신의 뜻이었지만 그 댓가는 냉정했다.
성서엔 인문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신의 계시에 피조물인 인간의 학문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결국 무엇을 낳았는가를 살펴보면 그 대답은 더욱 확실해 진다.
사람들 머리에서 만들어진 곁가지 인본주의 신학은 기독 종교를 눈에 보여지는 온갖 형상의 실물 종교로 바꾸어 버렸다.
한국 기독교는 양적으로 분명 세계가 놀랄 엄청난 세력으로 자랐지만 성서의 오해는 한두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결과를 낳았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성서는 분명 하나인데 신학은 갈라져서 반목한다.
교회가 방대하여 정치적인 세력의 경계 대상이 된지 오래다.
여차하면 세상을 바꿀만한 얼굴로 커져 버렸다.
교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를 열망한다.
성서가 그렇게 말한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성서를 알기전에 세상 나라를 먼저 경험하며 막상 그 안으로 들어선 속사람들은 절망한다.
그것은 성서가 바라는 당신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리를 난무하는 기독인들의 자기 주장이 성서적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자.
도무지 집단 패거리 문화로 종교를 빙자한 시끄러운 소음은 모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교회의, 교회에 의한 , 교회를 위한 신앙은 성경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림자는 형체를 짐작할뿐 본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평안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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