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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분교 (分校) 이야기

by *열무김치 2012. 12. 1.

 

 

 

학생수 감소로 폐교된 어느 분교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엔 잡초만 가득하다.

 

한 학급당 학생수가 70~80몀이 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들으면 남의나라  이야기 같지만  1960~70년도엔 시골 학교도 한 학년당 보통 3~4반이나 되는 학급이 흔했고 웬만한 학교는 학생수가 1,000명을 넘었다.

난 초등학교 2학년 2학기때 오후 수업이란 걸 받아 본적이 있다.

당시 충주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왔는데  전학을 온 학교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교실이 부족했다.

해서 학교에서는 오전과 오후로 반을 나누어 수업을 했고 난 오후에 편성이 되어 그해 겨울까지 수업을 받았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로 가면 오후 1시부터 수업이 시작 되고 오후 5~6시쯤 수업이 끝났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먹고 자기 바빴다.

어떤때는 오전에 아이들과 놀다가 학교에 가는시간을 까먹는 바람에 어머니께 빗자루 몽둥이로 매타작을 당하기도 하고 지각을 하는 바람에 의자를 들고  벌을서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시골학교로 전학을 간 건 3학년 초였다.

그곳에도 학생수는 많았지만 오후수업을 받는일은 없었다.

산골 여기저기 화전민도 많이 살았고 골골마다 집들이 많아 아이들이 참 많았는데 워낙 거리가 멀어 학교를 다니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그 근처를 중심으로 분교(分校)가 생겨난 건 그무렵이 아닌가 한다.

서울 근처에 위성도시가 있 듯  OO초등학교  OO분교 로 명칭된 학교들이 전국에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분교는 근래에 와서 영화나 소설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 선생 김봉두) 란 영화도 산골 분교를 무대로 한 영화였다.

지금은 거의 폐교가  되어 마을회관등 다른 용도로 사용을 하는곳도 있지만 아무런 사용도 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방치된 곳도 있다.

 

 

 

 

 

 

4학년 무렵 우리집에 선생님 한분이 이사를 왔다.

나에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주고 간 예쁜 누나가 살던 방이었다.

그분이 선생님이란 걸 학교에 가서 알았다.

분교 아이들이 내가 다니는 학교에 왔는데 그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몸이 너무 말라서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나갔는데 자전거 뒤에는 책보따리와 도시락이 실려 있었다.

분교까지 30리는 족히 되는데다 산골 자갈길이 너무 좋지 않아서 늘 아침 일찍 나갔다.

"엄마, 저 선생님은 왜 여기서 먼데까지 다녀?"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물어 보렴."

궁금증을 참다가 그 선생님께 물어 보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우리집으로 이사를 온 뒤 한달 쯤 지났을때 웬 아주머니와 여자 아이가  보따리를 들고 왔다.

방이 크지 않아서 가지고 온 보따리 일부는 집 뒤란에 가져다 놓았는데 난 그게 궁금해서 몰래가서 자꾸만 훔쳐 보았다.

어느날 학교가 끝난 뒤 또 뒤란에 가서 보따리를 보다가 살며시 풀러 보았다.

별난게 있을줄 알았는데 옷가지와 그릇등 살림살이였다.

같이 따라 온 여자 아이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그 선생님을 따라 멀리 떨어진 분교를 다녔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그 아이는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내가 물었다.

"야, 넌 왜 가까운데 놔두고 멀리로 다니니?"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바라다 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마음에도 화가 났지만 그 후로도 그 애는 나를봐도 모른 척 했다.

그 여자애는  몹시 말라서 얼굴이 마치 남자아이 같았다.

어느날 찌그러진 툇마루에서 그 애 가족과 밥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난 그때서야 그 여자애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대화중에 그 아이가  말대신 손짓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도 그 선생님 가족은 1년여를 함께 살았다.

난 그 애와 가깝게 지내진 않았지만 언젠부터인지 손짓으로 그애와 대화를 하고 있엇다.

하지만 그아이가 왜 멀리 떨어진 분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뒤 우리는 아랫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형편이 좋아서 이사를 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잘못되어 빚쟁이들에게 집을 내주게 되어서였다.

아버지 말씀에 살던집을 당시 17,000원을 주고 샀는데 이사를 가고보니 이사간 집은 살던 곳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초라했다.

이사를 오고 자연히 그애와 멀어졌다.

아버지 사업이 조금 나아진 뒤 다시 살던 곳 근처의 괜찮은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때까지도 그 아이는 그 곳에 살고 있었다.

가끔 그 애한테 놀러를 갔는데 그 애 엄마는 나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가을 운동회를 할 무렵 난 그 애가 다니는 분교에 가 보았다. 

너무 멀어서 몇 번인가 쉬어서 갔는데 생각보다 학교도 크고 학생수가 많아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애는 운동장에 나가서 뛰지도 않고 한쪽에 앉아만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같은집에 살았었다고 그 애 옆으로 가서 아는체를 했다.

그 애는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김밥을 건넸다.

산골 분교의 가을 운동회는 동네 잔칫날이었다.

 

지금도 그 분교를 지나 다닌다.

물론 폐교된지 오래고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모두 떠났지만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를 들여다 보노라면 마치 그때 아이들이  다시 뛰어 나오는 듯 하다.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그 시절이 아름다운 건 추억이란 놈 때문이다.

그녀석은 지난날들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치장해서 우리들 앞에 내려 놓으니까.

학생수가 급격하게 줄면서 이제 웬만한 농촌이나 산골은 분교는 옛말이고 본교도 폐교를 염려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오후 수업을 해야 할 만큼 콩나물시루였던 도시 학교들도 사정이 반대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십 오륙년 뒤에는 학생이 지금 학생 수의 반으로  줄것이란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인구가 줄고 학생수가 주는게 사회적인 현상이고 또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은데 왜 비관적으로만 보느냐 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줄면서 미래를 밝게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학생 수 감소에 따른 학교들의 장래도 그렇고 이에 따르는 각종 산업도 존폐의 위기를 맞을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동력원이 줄어 든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들어 긍정을 한다고 해도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책임이어서 명쾌하지 않다.

옛날과 비교도 되지않게 누리고 살면서도 어려웠던 시절보다 행복지수는 낮다고 말한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합리화 하면서도 모두의 가슴엔 앙금이 남는다.

 

폐교는 학교가 문을 닫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닫힐지도 모른다는 책임감으로  바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곳도 작은 분교들은 통폐합되고 시골엔 점점 버려지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그럴 땐 좀 답답하지요
그곳도 그렇단 말인가요?
예상밖이네요.

농촌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동네 잔치 한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농촌에 많이 들어가니 잔차를 할 날들이 많아질거 같네요.
이곳이 한국보다 더 심화됐지요
예전에 번화하던 마을이 집이 하나둘씩 비어서 나와있기는 한데 누구도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동네가 황폐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제가 시골동네 학교들로 순회를 다녀서 많이 봤거든요
예전의 영화가 사라진 그 마을들에 귀농하는 사람들도 없고
후손들이 있어도 그 집이나 땅을 물려받아도 팔리질 않으니 사람이 안 사는 집은 금방 못 쓰게 되더라구요
저도 오후반 수업을 받은적이 있읍니다...국민학교 일학년때만 학교를 세군데 전학을 다녔는데요 마지막 다니던 학교에서 오후반에 편성 되었죠.
정말 그때는 한반이 60명은 기본 이었는데 요즘은 한학급이 서른명을 넘기지 않는것 같아요...
댓글을 쓰며 두번째 다니던 강원도 함태초등학교를 찾아 보았는데 올해 졸업생이 열여섯명 뿐이 되지 않는군요..
그때는 꽤 큰 학교였던것 같은데 말이죠...
한학년에 전학을 세번이나..
저보다 한수 위신데요.ㅎㅎ
아..
강원도에도 오셨었군요.
함태초등학교면 어디쯤 되나?
16명이면 양호한 편입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사정은 비슷 합니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폐교가 된 학교, 분교를 많이 보았어요.
제가 어릴때 다니던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500~1600 명이었어요.
한반에 족히 70 명은 됐었고 4개반이 있었지요.
요즘에 비하면 그때 교실은 콩나물 시루 같았지만 추억의 그림이라 그런지 그때가 훨 따스했던것 같습니다.
인구감소가 여러모로 사회적 영향을 끼친다는게 안타깝습니다.
열무김치님 덕분에 추억의 타임머신을 탔습니다.
재밌게, 그림을 그리며 읽은 좋은 글이었습니다
1,500명이나 되었으면 큰 학교지요.
저는2개반이 있었고 희한한것은 남녀로 반을 갈랐다는..
분교가 없는곳에서는 30리가 넘는곳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왔는데 당시 어떻게 다녔는지 신기한 일이지요.

어릴때 그렇게 크게 보이던 학교가 어쩌다 가보면 이렇게 작았나 하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폐교된 학교를 그냥 방치하는곳도 있더군요.
귀신이 나올것같은 흉물스런 모습이 보기에 좀 그렇더군요.
국가 재산인데..
초등학교 5학년에 처음으로 남녀 구별반을 만들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때 처음 여학생반에서 공부한 기억이 제게도 있습니다.

폐교가 방치되걸 보면 가슴이 퍽퍽하죠.
폐교를 다른 시설로 이용하는 좋은 사례가 많던데 보기 좋았습니다.
정말 시골에 가보면 분교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십네요
무엇보다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진 마을의 적막함이
마음 쓰입니다
저도 오후반 수업 기억있는데
시끌 벅적하던 그시절 친구들 그립네요...
어떤 마을은 한 두명이 다니는 학교를 살려 보겠다고 애를 쓰는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야 정상인데..
제가 농사를 짓고 살때만해도 동네에 아이들이 참 많았어요.
지금 가보면 거의 노인들 뿐이예요.
돌아 가려고 준비 중인데 저도 그들 중 한사람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후수업을 받은 분들이 많네요.
초등학교의 오전반,오후반 얘기가 나오니
아(!) 그런때가 있었지하고 미소가 나옵니다.
충주에서 초등학교 2학년1학기까지 다니셨군요.
젊을때 직장때문에 약5년정도 충주 교현동에서 머무른적이 있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ㅋ)(ㅋ).(^^)*
그런 경험을 하신분들이 의외로 많네요.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전설의 고향쯤으로 듣겠는데요.(ㅎㅎ)
제 블로그엔 충주분들이 많으십니다.

아이들이 너무 줄어 고민이 많은데 막상 또 그런시절이 온다면 좋아 할까요(?)
동갑내기 조카가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한적이있어
아주 오래전에 가본적이 있었습니다..열무님 글을보니 그학교가
지금은 어찌되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그당시 뻐스도 안다니던 산골이었으니 아마도 지금쯤은 폐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지금도 그앞으로 지나다닙니다만 아파트가들어서고
인구가 많아지다보니 운동회때 달리기하던 운동장은 없어지고 교실수 늘리느라
운동장 빼꼭히 교실만 늘었더군요..

그때 달리기할때면 한교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50M 달리기였구요 한바퀴돌면 100M 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네비게이볼때 그거리감으로 짐작을합니다....(ㅎ)
반대로 가는곳도 있군요.
운동장에 온통 교실만 지어 놓으면 아이들은 어디서 논답니까.
극과 극을 보네요.
제 근처의 초등학교는 한반에 10명정도가 수업을 받는답니다.
학교는 남산만 한데..
지금도 아이들이 자꾸 줄어서 고민이 많다네요.

전 서울갈때 말고는 네비 잘 안보는데 가끔 딱지를 떼어서 그게 탈입니다.(ㅎㅎ)
날씨가 무척 추워질듯 합니다.
따스하게 입고 나가세요.
한편으로 추억 드라마 같은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자꾸만 윤초시댁 손녀딸이 생각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ㅎㅎ
님의 추억에 편승하여 행복하게 읽었습니다..
제가 살던 시골에도 분교는 벌써 없어졌고 남은 학교도 학생수 감소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1,000명이 넘던 곳인데 말입니다.
다시 그런날이 올까요?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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