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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상여집

by *열무김치 2015. 3. 9.

 

*오래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파란편지님의 글을 읽고 갑자기 생각이 나서 다시 옮겨 보았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곳에 있는 상여집 ..

곳집 또는 고새이 집으로도 불렸다.

어느 마을이던 한곳은 꼭 있었다.

주로 산 아래나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위나 밭 주변에 지었다.

지방에 따라 모든 상여기구를 한곳에 보관 하기도 했지만 상여집이 좀 크면 상여틀을 보관하는 큰 헛간과 상여를 꾸미는데 쓰이는 소품과  장신구를 따로 보관하는 작은 헛간으로 나뉘어 있는 곳도 있었다.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장례를 치르는 날 아침 일찍 상여집에 보관하던 상여틀과 상여를 꾸미는 소품을 가져다 망인을 운구할 상여를 만들었다.

상여를 메는 사람들을 상두꾼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장례식 내내 후한 대우를 받았다.

장례가 끝나면 어둑해질무렵 상여를 곳집에 가져다 놓았는데 이때는 서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마을이던 상여집이 있었지만 상여집에 대한 인식은 과히 좋지 않아서 상여집을 지나가는 일조차 꺼려했다.

귀신을 보았다거나 누가 그곳에서 목을 맸다는 둥의 소문도 많아서 마을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언제 사용했는지 짐작조차 가지않을정도로 방치된 상여기구들..

한때 동네사람들이  정성으로 망인을 운구했던 상여는 이제 기억의 뒷편으로 사라지는 듯 하다.

장례문화가 바뀐탓도 있겠지만  이제 농촌에서 상여를 메고 갈 젊은이들이 없다.

농촌의 고령화는 농사철에 농주 마시며 농삿일을 나누던 품앗이 문화도 앗아가 버렸다.

한때 마을의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던 상여집이 이제는 동네의 흉물로 방치되면서 점차 애물단지로 변해간다.

장례문화가 화장으로 많이 바뀌더니 이제는 수목장이나 가족 공동장으로 변해간다.

한때 온 국토가 묘지로 덮여 간다고  걱정들이 많았는데 그런 쪽으로만 본다면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농촌이 고령화되어 상여조차 멜 젊은이들이 없다는건 시대탓으로만 핑계를 댈 수 없는  암울한 일이다.

 

이제 서서히 우리의 이런 모습들이 세월의 뒤안길로 숨어든다.

무엇이든 새로운것이 좋은지는 세월이 더 흘러봐야 되리라.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힘겨워 보이는 상여집

마을의 흉물로 변한지 오래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촌은 빛바랜 상여집만큼이나  쓸쓸하다.

 

 

 

 

 

 

 

 

 

 

 

 

16명이 메는  꽃상여 

*평창 

*삼성폰 

 

 

 

 

망인을 모시고.. 

이마을은 다행이도 상여를 멜 젊은이들이 더러 있었다.

이제 이런 꽃상여를 타고가는 망인은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 가는길에 정들었던 사람들이 메어주는 꽃상여를 타고, 그동안 정 주고 살았던 

앞마당, 개울가, 논과 밭, 언덕, 그리고 먼지나는 자갈길을 돌아 영원히 쉴곳으로 떠나가는

꽃상여의 발길은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세상을 뜨기 무섭게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연이어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현대의 장례문화를 보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자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아릿한 앙금이 남는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노인세대와, 복지와 의료 등, 이를 뒷받침 해야 할 젊은이들과 국가의

부담이 그동안 고단한 세월을 살아온 실버세대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분명, 오늘을 이루어 낸 희생의 세대임에도 자식세대들에게 정치,경제적으로 부담을 안긴 세대로

굳어져 가는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평면적으로 본다면 저렇게 꽃상여라도 타고 바람에 구름 가듯 훠어이~ 떠나갔던 옛 조상들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보이지 않는 익명의 인터넷 공간이라고 하지만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한다는 소리를 대놓고 하니 해보는 소리다.

 

 

 

                             회닫이

 

 

 

 

 

2000년 선친 상을 치를때만해도 상여를 사용했었는데
요즘은 우연히라도 마주할 일이 없어진 듯 합니다.
농촌에서 웬만하면 병원의 장례예식장으로 갑니다.
상여는 있지만 운구할 사람이 없다보니 자연히 상여가 사라지는것 같습니다.
어릴 적...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산 언덕 낮은 곳에 있었는데...
다들 겁을 주더구만요...그래서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었습니다...ㅋㅋㅋ
상여나가는 모습들이 언듯언듯 떠오를 때면...
분명 슬픈 일이건만... 그리운 맘이 드는 게 참 요상스럽습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들이 우리가 오랜간 지녀온 모습이어서 그럴겁니다.
상여를 메면서 동네사람들의 화합심이랄까요..그런 것들이 좋았는데..
아직...
그대로 두고 있군요....
왜...치우지 않았을까요?...
혹...귀신 나올까바...ㅎ
군에서 저런건 치워주면 좋을텐데...
깨끗하게 꾸며 주는가...ㅎ
동네사람들이 치우지 않으면 누구도 관심을 갖는이가 없지요.
또 선뜻 치우기도 애매한 상태랍니다.
그 안에 들어가 사진을 다 찍으시고 ㅎㅎ
용감하십니다
정말 을씨년 스럽네요
왜 없앱버리지 않을까요
아무도 말을 하는사람이 없으니
나라에서도 신경을 쓰지않는것이겠지요?
그 근처에 뭐가 들어선다고 하면 금방 치워지지 않을까요? ㅎㅎㅎ
하하~
그게 용감한건가요?
관심이 없는데다 또 얼른 치우기에는 무언가 껄쩍지근한 미련이 있나 봅니다.
왜 이런걸 함부로 치우기는 좀 뭣한거 말입니다.
지금도 제가 자라난 마을 어귀에 저런 모양이 상여집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곳집이라고 하며
해질 녘에 지나가면 무서워했던 곳.^^

맞습니다.
활기도 없이 쓸쓸한 농촌의 모습을 봅니다.

아마 어느 동네든 거의 있을겁니다.
사람이 나고 죽는건 하늘의 이친데 이런곳을 두려워 함은 역시 사람은 죽는게 싫습니다.
어릴땐 어스름해지기만해도 상여집 근처를 지나기가 무서웠어요,
왜 그리 상여집이 무서웠던지...
세월을 느낍니다. 꽃상여 모셔두고 가신이를 천국으로 보내주던 집...상여집...
지금은 보기도 흔치않지만 사진속 모습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정말 귀신이 나올것 같더군요.
마을에서 멀찌기 떨어져 더 외로워 보였습니다.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쳤을텐데도 상여집을 두려워한건 사람이 죽음을 맞이 한다는게 두려운 일임에 분명 합니다.
역시 사람은 복잡한 동물입니다.
어릴적에는 동네 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놈 곳만 지나갈라면 무서워서 뛰어갔던 생각이 나네요..
즐감합니다
그래도 동네 처녀와 총각이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지요?
아마 스릴 만점이었을듯 합니다.
게다가 동네사람들이 잘 보지도 않을테니..

음...
경험담이구만.

옛날 이야기..
장례문화도 많이 바뀌었지요.
지금도 상여를 하지만
상여가 많이 바뀌었네요.
현대식으로...ㅎㅎ~
상여틀이 나무에서 프라스틱이나 알미늄으로 바뀌었더군요.
지난번 상가에 갔었는데 상여를 멜 사람이 없어서 이사람 저사람 닥치는대로..
덕분에 저도 메고 왔습니다.
제가 어렸을땐 귀산불이 나온다고 멀리 멀리 돌아 다녔는데요~ㅎㅎ
하하~
귀신불..
모처럼만에 듣는 말이네요.
해서 누군가 이런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무서워 했는지..
동네 어귀에 상여집이 있어서
밤길엔 무서워서 그곳을 지날땐
꼭 뛰어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맞습니다,
멀쩡이 가다가도 이곳 근처에 오면 100m달리기를 했던기억이 나네요.
아마 기록을 냈을걸요.
어렸을 때 집 뒤 야산 골짜기에 상여도가가 있었습니다.
골짜기인 탓도 있지만 그 주변은 늘 어둑했고 산에 애들기리 몰려가도 가급적 그 앞은 안지나려 했습니다.
우리 동네는 이미 오래전에 몽땅 정리되었지요.

저 현역시절 담력코스로 화장터(시립 화장장)에 두번 들어갔고요,
전 다른 일로 빠졌지만 상여도가도 한번 다녀왔더랬지요. ㅎㅎㅎ
지금부터 서울 본가에 가서 쉬다 올 생각입니다.
아..
담력코스에 상여집도 포함이 되었군요.
상여를 꾸미는 알록달록한 치장물이 공포를 자아냈지요.
근데 그곳에 가면 무서운생각도 잠시뒤면 사라졌는데..
제 고향마을에서는 상여는 1회용이라 장례가 끝나면 불에 태워 상여집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상여집의 모습이 곧 사라져 갈 풍물의 기록사진으로 채록되었군요.

사진 전문가는 아니지만 저 역시 사진이란 이런 모습처럼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사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보다 문자 대신 뭔가를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이죠.

사진에 기록을 중시하다 보니 디지털 사진은 믿을 수가 없더군요.
노무현대통령의 장례 모습을 많이 찍었는데 몆장 안남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록용 사진은 필름으로 찍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필카를 이번에 샀네요.
야시카50mm RF도 가지고 있는데 색감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완전기계식인 그래서 강추위에도 끄덕없이 작동한다는 미놀타 srt super MC rokker 50mm f 1.7을 하나 더 샀습니다.
출시된지 50년이 지났는데 운좋게도 흠집이 거의 없고. 먼지도 녹도 없는 완벽한 필카를 구했습니다.
하하 이제 다시 아나로그로 돌아 가네요.

** 제 블로그에 올릴 내용을 여기에 적었네요.
1회용도 있었군요.
전 처음듣는 말입니다.
매번 상여를 마련하는일이 수월찮았을텐데 신기한 일입니다.

저역시 사진은 가록물이라는데 동감을 합니다.
사진의 목적이 그것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용도가 바뀌는듯 합니다.
아직도 기록을 하는일에 충실하지만 이제는 상업적인 면으로 예능적인 면으로 바뀌어 가는것 같습니다.
더구나 포토샵이 일반화 되면서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도 사진을 변형하고 꾸미고 탈바꿈하여 나름대로의 미 를 추구합니다.
저같은 사람은 그럴만한 기교도 없을뿐더러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아서 취미로 하는 선에서 그칩니다만 주변을 보면 그렇지 않더군요.

그래도 사진은 아름다움의 추구라고 봅니다.
다양하고 기능이 뛰어난 렌즈가 출시되면서 자연색을 최대한 구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펜탁스를 쓰는데 필름카메라에 쓰이던 리밋렌즈군들이 있습니다.
이 1:1 바디에 쓰이던 렌즈들을 디지털 카메라에 쓰면 그 기능들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는 단점이 있어 지금도 필름 카메라레 이 렌즈를 물려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은 역시 이 렌즈가 표현하는 아름다움의 극치에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사셨다니 축하 합니다.
저도 니콘 65d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올림푸스pen을 갖고 있었지요.
미놀타는 여러번 썼었지만 잃어 버렸습니다.
말씀대로 아나로그가 불편하지만 사진 본래의 목적을 위해서 확실한 대안입니다.
디카로 남긴건 자칫 사라질수도 있으니 더 그렇습니다.
야시카가 70년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갖고있었는데 ..대중적이었지요,
지금도 펜탁스 중기급을 고집스레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디지털 사진은 아예 사진취급을 하지 않는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듯 합니다.
가끔 필름카메라를 들고 나갑니다만 이제 인화를 할수있는곳도 많이 줄었고 불편한 점이 많네요.
사신 카메라로 좋은 기록물 많이 남기시고 블로그에도 많이 올려 주세요.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상여는 읍내의 상여집에서 꽃상여를 주문하는데 정말 화려하여 보기가 좋았습니다.
한지와 색색의 종이꽃과 관을 안보이게 하는 마차와 같은 것은 화려한 칼라의 인쇄한 종이로 감쌌습니다..
망자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최대한 아름다운 꽃상여 태워 상여를 매고 소리꾼의 상여소리에 맞추어 장지로 갔지요.

재미있는 관습으로 상여가 가는데 마을앞 신작로 중간에서 차를 만나면 비켜주지 않고 배짱을 부렸습니다.
운전자는 속이 탈 일이지만 관습이라 노잣돈이라도 내놓지 않는한 상여가 통과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던 시절이 약 40여년전에는 흔했지요.

상여를 매는 밑의 틀은 왕대로 만들어 상여와 함께 불태웠습니다.
마을에 왕대가 많아 가능한 일이었죠.

요즘은 저의 고향에서도 상여를 매는 청년이란 60대를 의미하기에 상여를 매는 문화도 이제는 사라질 것으로 봅니다.
60대 이하가 마을에 없다고 봐야 합니다.
완전 평야지대인데도 그렇습니다.
저도 10여년 전에 고향에 들렀다가 마을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우연히 상여를 매어 본 것이 이제 마지막이 된 듯 싶습니다.
당시에 저도 젊은이였는데 이제는 고향 어르신을 위하여 상여를 매 볼 일도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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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탈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언제 디스크가 고장나거나 훼손되어 사진이 사라질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사진도 아닌 개인적인 사진을 인터넷에 모두 올려 놓을 수도 없어 필름으로 보관하려고 필카를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사진이 사라지니 조금 허망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필카로 찍어 두면 아무래도 보관기간이 더 길 것 같다는 소박한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용사진은 똑딱이로 앞으로도 계속 찍을 생각입니다.
디카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멋지게 편집하는 것에 지금도 관심은 있습니다.
용도가 다른 사진이죠.

미놀타가 사용자층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미놀타 다이낙스5d를 통하여 수동기능을 익히고 보니 같은 미놀타 필카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인화비용 문제도 있는데 그렇게 많이 찍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보관할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닉을 바꾸기 전에 제가 달았던 댓글을 다시 보니 기억이 새롭습니다 ㅎㅎ
저와 동일한 거북이 별명을 아고라에서 어떤 분이 먼저 쓰고 있어 지와건으로 바꾸었습니다.
필카는 잠자고 있고 연습용으로 몆롤 찍어 현상해서 둔 필름은 쥐가 갉아서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놈의 쥐 때문에 필카를 안 찍는다는 것은 핑계이고 편리함 속에 디카에 머물게 됩니다.

자동 필카도 하나 더 샀는데 이것도 장롱신세입니다.
언제인가 필름을 다시 사용할 날이 오겠지만 빨리 오지는 않을 것으로 보네요.

농사일에 너무 매몰되어 있습니다.
올부터 물려받은 농지 전체 경작에 들어갑니다.
그래봤자 5천평이지만 힘든 날들이 오고 있네요.
상여를 진적이 있는데...
상여집은 무서워요
앵 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이 글을 읽으며 떠올린 시입니다. 아마도 글 속의 변화에 대한 생각 때문에 어느 농가 풀 많은 마당에 들이닥친, 빨간 화이버 쓴 그녀가 등장하는 이 시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상여집이 없어서 늘 이웃마을에서 빌려왔고, 우리 큰집 마을에는 시장에서 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기슭에 그 상여집이 있어서 드나들 때마다 게름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좋은 곳이었구나 싶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지나가기에 얼마나 섬찟했겠습니까?

어쩌다가 상여집이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하나가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올려주신 글은 전에도 본적이 있어서 친근 합니다.

얼마전에 처가에 들렀는데 이제 상여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모두 철거를 했다고 하더군요.
조상 벌초도 힘겨워 하는 세상이니 앞으로 묘지를 쓰는일도 자취를 감출 것 같습니다.
어차피 흙으로 가는 것이니 자연보호차원에서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뭔가 아쉽군요.
44년전 제아버님 상 치를때 연동교회 묘지에 모셨는데.. 산 초입에 상여집에 있드라구여..
저희야 영구차로 모셨지만.그이후에도 종종 상여나가는걸 보곤했습니다..
헌데 요즘은 못본지 꽤 오래되었지요.요즘은 어느집이나 리무진으로 고인을 모시고..
병원 장레식장에서 고인운구할때 손자가 차렷자세로 거수경례하는모습도 보았습니다..
이젠 티비 드라마나 박물관이나가야 상여를 볼수있지 싶습니다..
하긴 사라져가는게 어디 상여뿐이겠습니까?

봄이 오는가 싶더니 오늘아침엔 한파 주의보까지 내렸다네요.
꽃샘추위에 건강유의하세요..
소리쟁이가 그렇게 빨리 자랐는지 몰랐습니다.
저도 한번 그 나물을 먹어보고 싶습니다.

후손들이 조상묘를 돌본다거나 벌초를 하는 일들이 자꾸 버거워지다보니 이제는 뭐든 쉽게 갑니다.
노인들을 싫어하고 나라에서도 부담으로 여기는 듯 싶어 마음이 개운치 못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 같습니다.
지금을 가장 즐겁게 사는게 현명한 삶 같습니다.

오늘 상당히 추웠는데 막상 다녀보니 칼바람은 아니어서 봄이 오기는 했구나 싶더군요.
감기 환자들로 병원마다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한번 걸리면 여간해서 낫지도 않으니 예방이 최선입니다.
전에 지나가면서 한 번 본 포스팅인데
오늘은 맞춤법 띄어쓰기까지 정리할 정도로 꼼꼼히 읽어봅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병원 장례식장에서 2박하고 익일 새벽에 출상하면 그걸로 끝이지요.
장점도 있어보입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어찌 그리 많은 조문객들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며칠 전 모 종편방송에서의 대담프로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주는 밥과 술을 먹지 말고
장례식장 앞에 있는 일반 식당을 이용해라고 하더군요.
일단 조문객이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면 인당 3~4만원의 비용이 유족에게 청구된다고 했습니다.
그외에도 상업화된 이익집단들이 구석구석 자신의 영리를 취하는 구조가 보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계속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저도 그 이야기를 들었지요.
보통 그정도의 비용이 나올겁니다.
결혼식장에 가도 그정도 나오니까요.
하여 좀 나은 결혼식 피로연에는 일반적인 축의금을 내고 밥을 먹기가 좀 그렇습니다.

아파트에서 조문객을 받을 수야 없지요.
장례식장은 도시민들에겐 필요한 공간입니다.
공간이 충분한 농촌이나 산촌에서도 예외없이 장례식장으로 가지요.
조상 벌초도 힘들어 하는 세상이니 이제 장례문화는 완전하게 모습을 바꾼것 같습니다.
파란편지님 방에서 발자국 보고 왔습니다.
참 의미 있는 글 보고 갑니다
찾아 주셔서 감사 합니다.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자라선 시골에는 특이하게도
동네 중앙에 큰 사과 과수원이 있었고
그 옆에 상여집이 있었고 거기서 얼마되지 않는 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느해 인가 학교를 갔다오는데 상여집 앞을 지날 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서 엄청난 소낙비가 쏱아져서
달리 피할곳이 없어서 상여집에서 잠깐 비를 피해 가려고
기다렸는데 비가 쉽게 그치지 않고 교회로 달려갔더니
문이 잠겨서 다시 상여집으로 와서 비를 피하는데
점점 더 오더라고요.
그래서 상여집안으로 들어가 어느 곳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밤새도록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무언가 뼈가 부딪치는 소리같은게 들리고 그래서 그곳에서
한숨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은 밝았고 비는 그쳐서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 학교에 등교를 하는데 누군가에게
밤새도록 두둘겨 맞은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우스스 춥더라고요.
지금은 그 상여집이 없어진것 같더라고요.
예전 시골에서 상여지나가는 것을 많이 구경 했었지요.
좋은날 되세요.
초암님은 아마 이런것에 관한 기억이 참 많으실것 같네요
더구나 비가 내리는 으스스한 밤에 곳집에서 하룻빔을 보내셨다니 용기가 대단하셨네요.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이제 과거세대의 이런 일들도 모두 추억속으로 갑니다.

요즘은 조상묘를 관리히기 좋은곳으로 이장을 한다던지 유골을 화장을 하는 경우도 많아 졌더군요.
벌초하는일들이 해가 가면서 점점 어려워지니 나오는 고육책 같습니다.
상여를 본지가 언제인지~~
웬지 숙연해 지는데요
오늘은 글뿐만이 아니라
사진도 참 멋진걸요!!
이제 웬만한 시골 동네엔 저런곳이 없어요.
용도가 없어졌으니 폐기된거지요.
모두 옛 이야기로 묻혀 갑니다.
아직도 건물이 남아있는 저곳도 곧 사라질것 같습니다.
대신 장례식장이나 호장장이 부족해서 곤역을 치루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다니는동안 상여집 옆으로 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5학년때 할아버지 집에서 제금을 났는데 그 전까지 상여집 옆을 지나 다녀야 했었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지나다녀도 그곳을 지날때면 늘 머리가 쭈뼛쭈뼛 서곤 했습니다.
아침에 학교 갈때는 언니랑 친구들이랑 함께가니 그래도 괜찮은데 집에 올때는 가끔 혼자여서 얼마나 무서웠던지요.
산 꼭대기로 멀리 돌아오는 길을 택하거나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졸졸 따라가곤 했습니다.
지금 가보면 상여집은 없어지고 그곳에 멋진 펜션이 들어서 있습니다.
산으로 둘러쌓여 있던 그 마을은 펜션들이 차곡차곡 들어서서 다른 마을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였던 제가 50이 넘은 아줌마로 변해 있으니 주변 모든 것들이 변해가는건 당연한 거겠지요?
아나로그 세대들은 이런 추억을 지니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특정 목적물에 두고 그를 신앙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우리 조상들이 정작 그 산물을 무서워 했다는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성황당이니 상여집 등을 왜 그리 으슥한곳에 지었는요.
말씀처럼 그앞을 지나올때 오금이 저리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이런 모습들은 모두 숨어버려서 찾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찾는 사람도 없으니, 모처럼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기억을 잃은 셈이 됐습니다.
상여집...
우리 시골마을에도 위와 똑같은 상여집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엔 무서워서 얼씬도 못했던 곳이지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상여의 기본틀은 나무가 아닌 철로 만들어져 사용 중입니다.
요즘도 저는 울 시골마을의 상여꾼의 한 사람입니다.
상여를 멜 때마다
고인을 바로 옆에 두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깊게하게 되지요.

상여...
시대엔 낯설지만
제겐 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남아 현재진행형이라 가깝게 느껴집니다.
반갑습니다.

아..
아직도 상여를 메어 장례를 치르는곳이 남아 있군요.
전 제 살던 마을이 마지막이지 싶었습니다.
말씀처럼 나무가 아닌 가벼운소재의 프라스틱이나 알미늄 등의 소재를 이용하여 상여를 만들더군요.
옛 어른들이 메던 상여는 정말 무거웠어요.
저는 시골에 살면서 많은 상여를 메었지만 정작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땐 제가 돕던 사람들은 한사람도 볼 수가 없었지요.
모두 돌아가신 탓이었습니다.
저도 어릴적 낚시를 좋아했는데 인천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밤낚시를 갔었는데 이때 아마도 중딩? 이었던걸로 기억이 납니다.
밤에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비를 피하려 상여집에서 하루밤 신세를 진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못할거 같은데 그때는 별로 두려움이나 무서움같은게 없었던 시기 였던거 같네요.

상여집을 들어가니 별의별 상여가 다있더군요. 지금도 기억에 어렴풋이...
너무 추워 돌을 구워 바닥에깔고 누워 잠을 청했는데 잠은 잘 잘듯합니다.
가끔 부시럭 소리가 나긴했지만 별 무서움은 없었던거 같네요.

아마도 동네 어른신들이 알았다면 저 무척 혼이났을겁니다.
그래도 어케하나요 춥고 비는오는데 어려서부터 낚시를 좋아해서 혼자 그렇게 다닌 기억이나네요.

지금요? 낚시 안해본지가 20년이 넘어요.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멀리까지 오셨네요.
상여집에서 주무셨다면 당시로서는 간이 큰(?) 사람에 속했네요.
동네사람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해 본 사람이 없을걸요.
더구나 비오는 밤에. 으흐흐..

어쨌든 대단한 추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평안한 연말 보내십시요.
좋은 공부를 했습니다
무언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이라도
알것은 알아야지요 ㅎ
돌무덤이 있는 칠성당이나 상여집은
장례 문화가 바뀜에 따라
점차적으로 전설처럼 사라 지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옛 풍습이고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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