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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回想

by *열무김치 2014. 11. 28.

 

 

 

 

 

요즘 군대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으로  몹시 시끄러웠다.

피끓는  젊은날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갔으면 성실히 군복무 잘 하고 건강하게 귀가 하는게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분단 국가에서 병역의 의무는 피할 수 없는 의무다.

지금이야 복무기간이 많이 단축되어 2년 정도면 전역을 하지만 내가 군복무를 할때만 해도 3년 가까이를 복무해야 했다.

지역이나 생활 반경이 한정된 공간에서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몇 년씩 갇혀 지내는 일은 사실 많은 무리수가 뒤따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 기간을 잘 보내고 무사히 전역을 하는데, 근간에 들어 부쩍 군대에서의 사고 소식이 자주 들려와서 부모들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 만든다.

언론의 통제가 심했던 과거엔 군대에서의 사건 사고가 지금처럼 잘 드러나지 않은면도 있어서 작금의 군부대 사건이 조금은 특별해 보이는 면도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과거완 성격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전이라고 폭행과 폭언이 없었던게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규율과 원칙이 있었다.

군대 민주화를 부르짖은지도 꽤 됐고, 병영생활의 질이 과거완 판이하게 달라 졌으리란 판단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구타와 집단 따돌림,언어폭력 등의 괴롭힘으로 자살을 하거나 같은 동료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여전하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그동안 폭력 게임이나 무한 경쟁등에 장시간 노출된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가슴이 없는

세대로 자라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출산 기피로 가정마다 하나,기껏 둘 정도인 아이들은 자유분방한 환경속에서 대부분 자기 위주로 성장했고, 부모들 역시 성적지상주의에 목을 매다보니 공부 외의 다른 부분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현실에 나타나는 상식 이하의 결과에 이땅의 부모들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은 자의 든 타의 든 간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 준 까닭이다.

 

1979년 10,26 사태가 나기전 7월, 내가 복무했던 군부대의 훈련 모습이다.

당시 포병으로 병과되어 배치를 받은 부대는 105mm, 155mm, 4.2inch의 전투OO중대였는데  내가 소속된 전투OO중대는 4.2 inch 박격포와 105mm 무반동 직사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동안 세월이 꽤나 흘렀으니 생각엔 군 현대화에 따라 모두 다른 무기로 대체가 되었거나 운용을 한다고 해도 운용 방식이나 체계가 크게 바뀌었을것이란 생각이다.

4.2inch 박격포는 구경이 105mm 포 보다 약간 더 큰 그기였지만 보병이 지니고 있던 60mm나 81mm 박격포와는 달리  부피도 크고  총300kg이 넘는 무게로인해  인력으로 운반 하기엔 무리가 따랐으며, 이에 소속부대에서는 포를 운반하는 트럭과 운전병이 함께 복무를 했다.

105mm와  4.2inch 가 크게 달랐던점은 같은 곡사포였지만 상당히 직선형으로 타켓을 공격했던 105mm와는 달리  발사된 포탄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에 도달 했다는 점이다.

하여 사격후 곧바로 결과를 알았던 105mm와는 다르게 포탄을 발사하고  한참을 기다린 뒤 타켓의 명중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있었다.

모든 박격포가 그렇듯 포탄의 장전도 포신입구 투하 방식이어서 단순했지만 4.2inch 는 고폭탄의 무게가 13Kg에 달해 사병들의 숙련을 요했다.

사격지휘소의 지휘를 받아 가늠자를 통해 포신을 정렬한 뒤 장약을 장착한  포탄을 포신에 투하하여 발사하면 , 원하는 타켓에 명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포탄이 날라간 방향을 애타게 바라보던 그때가 떠오른다.

마침내 폭발음과 함께 타켓에 먼지가 일면  나와 동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짜릿한 기쁨을 맛보았지만, 좌표 수정을 통한 포구 좌우 상하 조정및 장약 수정을 여러번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타켓을 벗어나 폭발하는일이 반복되면  그날은 모두 난리가 났다.고폭탄 한발값이 비싸기도 했고, OP(observation post) 병이나 무전병,FDC(Fire Direction Center 사격지휘소 계산병) 이 제역할을 하지못한 결과가  되었기에 그런날은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포대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계산병들이 여기저기서 정강이를 까이고  각 포를 지휘하는 선임병이 사정없이 얻어 터졌다.

그러다 보니 사병들은 바짝 얼어서 포신에 포탄을 장전하는데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포대원들끼리 훈련을 할때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대대 ATT (Army Training Test) 훈련이나 RCT (Regimental Combat Team) 측정 훈련시에는 거리및 시차를 두고  105mm,155mm 등과 함께 합동훈련을 했기에 연대장이나 사단장 , 군단장이 참관하는 일이 많아서 이때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그야말로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당시 부대원들의 훈련 강도는 상당해서 일주일 교육시간 반 이상을 포를 다루는 훈련으로 채웠는데 주로 하절기에 집중 되었다.

그외 다른 시간은 이론교육 을 하거나 진지를 구축하는등의 사역으로 대부분 보냈다.

M16 소총이 전군에 지급되었던 당시 사격훈련 또한 주요 훈련이었지만 내가 소속된 부대는  소총훈련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을무렵,  마지막으로 나간 포사격 훈련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모습 함께했던 동료들은 지금 어디서 늙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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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3월

팀스프리트에 참가한  우리부대는 강원도 양구와 춘천쪽에서 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불만이었던것은 팀스프리트 훈련을 왜 날씨도 춥고 어설프기 짝이없는 2월 말에서 3월에 하느냐는것이었다.

남녁은 몰라도 북녁의 3월은 겨울과 진배 없어서 춥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다  툭하면 쏟아지는 폭설이나 진눈깨비로 야외에 있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나마 우리부대는 포병이랍시고 대대 보병들처럼 군장을 지고 행군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 포별로 트럭이 한대씩 있어서 트럭에 포를 싣고 부대원들은 모두 편안하게 앉아서 이동을 했다.

하지만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 훈련장소의 도로 사정은 형편이 없어서 안그래도 빌빌거리던 트럭은 툭하면 고장을 일으켰고, 자칫 트럭이 수렁에라도 빠지게 되면 그야말로 개고생을 해야만 했다.

미군이 쓰던것을 물려받은 2~4톤짜리 트럭은 휘발유를 사용 했는데 워낙 오래된 차들이 많아서 정비를 수없이 해도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새로 전입한 초보 운전병은 물론 선임 운전병들도 정비 문제로 사흘이 멀다하고 두들겨 맞고 얻어터졌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를 받은 운전 선임병들이 회식만 하면 타 병사들을 구타 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는 당시 병을 차출해 일정기간 교육을 시킨 후, 하사 계급장을 주어 자대로 복귀 시켜 초급지휘관으로 복무하게한 제도와 맞물려 극심한 갈등을 낳았다.

어끄제까지 동료로 있던 사병이 갑자기 초급지휘관으로 돌아와 행세를 하니 말년 병장이나 고참들과의 갈등은 계급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대립을 일으켰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훈련을 나가면 훈련의 피로 보다는 이런 일들로 인해 더 괴로웠다.

그때 왜 그랬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개봉 되었던 월남전을 다룬 플래툰이라는 영화 끝머리에 비슷한 내용의 독백이 나온다.

참혹한 전쟁의 공포도 괴로웠지만 동료 상호 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서로 싸운 게 더 힘들었다고.

 

팀스프리트 훈련중에...혹여나 이 사진을 당시의 동료들이 보려나 모르겠다.

사진에서 보듯 신 무기인 m16 소총을 모두 소지 했지만 당시 사병들이 입었던 군복은 형편이 없어서 깡통만 차면(?) 여지없는 거지꼴이었다.

군화도 훈련이나 휴가등 특별한 경우 말고는 평상시엔 넉넉히 신을 수 없었다.

지금의 사병들은 옛날 모습과 비교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보급품 질이 좋아지고 풍부해 졌다.

당시 훈련중에 만난 미군들은 차량이나 옷차림, 하다못해 포진지 위장막이나 급식등이 우리와는 현격한 차이가 나는 걸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미군들 중에는 자국에서 날라온 편지를 읽을 줄 몰라 우리에게 부탁하는 흑인이나 백인 병사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문맹인 병사들이 많다는걸 후에 알았다.

일부 젊은이들은 군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지만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아도 이제 군복무는 허송세월속에 객적은 고생이나 하는 시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팀스프리트 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우리에게는 아주 불행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연대 병력이 야간을 이용해  이동을 하고 있었다.

저녁무렵부터 보슬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 했는데  자정쯤 지나자 진눈깨비로 변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포대원들은 진눈깨비를 피하기 위해 차량에 가림막을 치고  모두 차량에 탑승하여 이동을 하고 있었는데 밤시간이라 추위가 몰려왔다.

그러면 안되었지만 차량안이니 보는 사람이 없겠다 싶어 모두들 모포를 몸에 둘렀다.

좁은 산악도로를 덜컹거리며 이동을 하는데 중간에 행군을 하는 대대 병사들을 만났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진눈깨비속에  길 양옆으로 걸어가는 판쵸우의를  걸친 병사들 어깨위로 허연 수증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짖궂은 날씨에 하필 야간행군을 하는것도 그랬고, 말없이 걸어가는 축 늘어진 병사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됐든 우리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차량으로 이동을 하는데다  춥다고 모포까지 두르고 앉아 있었으니.

행군대열 복판으로 우리 차량들이 지나가자  병사들이 차안의 우리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다 보았는데 그 말없는 시선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일이 벌어졌다.

행군중 낙오한 병사나 부상을 당한 병사가 생겼는지  중사 계급장을 단 지휘관이 차량으로 오더니 몇사람을 차에 태우라고 말했다.

내가 상병이었고 내 위로 분대장격인 하사 한명이 있었는데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상급자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 포, 둘 포, 삼 포, 오포등  포를 실은 차량과 무전병과 계산병들이 탄 차량등 우리보다 앞서가는 차량들이 멀찌감치 뚝 떨어져 있는바람에  무전으로 소대장에게 이를 알렸지만  제대로 상황파악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불가하다는 연락이 왔다.

할수없이 안된다고 말하자 사태가 험악해졌다.

몇 번 실랑이가 오가더니 결국 험 한 욕지거리가 나오고 태우라고 말하던 그 중사가 일방적으로 차에 뛰어 올랐다.

우리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었는데 분대장이 이를 제지 하면서 몸싸움이 났다.

이를 바라보던 우리들도 제지하게 되었고 결국 그 중사는 차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생각엔 불편 하더라도 낙오한 병사를 태웠으면 싶었지만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야, 이 XX들아..너네가 포병이면 다냐.  이 XX 같은 새끼들.."

차에서 미끄러진 그 중사가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해대자 가만 있었으면 좋았을 분대장이 불필요한 말을 한게 화근이었다.

"에라..이XX 야... 그렇게 꼬우면 진작에 포병으로 오지 .병신 같은 놈.."

차량이 다시 이동을 시작했는데  얼마 뒤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 짚차가 헤드라이트를 요란하게 번쩍이며 우리포차 에 다가왔다.

차에서 내린 그 장교는 지휘봉으로 우리가 탄 차를 후려 갈기더니

"어떤 새끼들이야.  너네야?"

순간 우리들은 움찔하고 놀랐다.

장교옆엔 아까 몸싸움을 하던 중사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고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걸 알았지만 우리들은 차안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햐..이새끼들 봐라. 아주 모포까지 두르고  자빠져 있네. 모두 차에서 내려."

장교는 지휘봉으로 우리들 머리를 마구 내리치며 내리라고 큰소리를 쳤다.

분대장 눈치를 보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수경례를 붙인 분대장이 차에서 내려 상황설명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군홧발로 정강이를 까이고 나동그라졌다.

"내려 이새끼들아.."

우리들은 겁에 질려서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잠시 뒤 포대장과 소대장이 우리차량으로 왔는데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했던 소령과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분대장이 포대장 앞으로 불려가고 큰소리가 났다.

한참동안 대화가 오가더니  다시 차에 타라고 했다.

그동안 얼차려 자세로 밖에 서있던 우리들은 판쵸우의도 없이 진눈깨비를 맞는 바람에 온몸이 푹 젖었다.

분대장과 다시 차에 올랐지만 공포스런 분위기와 추위로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려왔다.

"에이 XX..지가 내 직속 상관도 아닌데 왜 지랄이야."

 

그게 이유가 되었는지 어쨌는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그 이튿날 우리부대는 갑자기 행군으로 자대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춘천 쪽에서 경기도 양평까지는 직선상으로는 그리 먼길이 아니었지만 도로가 아닌 산악행군으로 가기엔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거리를 걸어서 가라고?

우리들은 귀를 의심 했지만 포를 적재한 차량들이 우리들을 남겨둔 채 필수 인원을 태우고 먼저 떠나는 걸 보자 거짓말이 아니라는걸 알았다.

이런 이런...

행군이 시작 되었다.

처음엔 그런대로 씩씩하게 걷던 부대원들은 이내 탄식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부대배치를 받고 지금까지 이렇게 먼 거리를 장시간 걸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군가를 부르며 왁자지껄 행군을 시작한 부대원들은 이내 조용해 졌다.

도데체  걷고있는 이 산과 동네가 어딘지..왜 하필 산길로만 이동을 하는지 행군 이틀째가 되자 여기저기 낙오하는 병사가 속출했다.

산속이라 보통 추위가 아님에도  우리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조느라 바빴다.

행군을 하면서도 졸음이 쏟아 졌는데 걸어가면서  잘 수도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소대원들끼리 밀고 당기며 얼마를 걸었는지 용문산을 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때서야 발에 통증이 심하게 느껴져서 신발을 벗고보니 물집이 여기저기 잡히고 발 뒤꿈치는 벗겨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찌 됐든 우리부대원들은 그 먼 거리를 산을 타고 밤낮으로 행군을 한끝에 자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대에 도착하자 포를 싣고 먼저 와있던 일부 동료들이 박수를 치며 맞아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건 처음엔 입을 내밀고 불평을 하던 나와 동료들은 막상 강행군을 통해 자대로 복귀하자 불평대신 희열감을 느꼈다.

아..내가 이렇게 강인하고 끈질긴데가 있었구나..라던지,못할게 없구나 등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강행군을 하게 된 이유는 그 후로도 알 수 없었다.

부대장이나 소대장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고  우리들도 더이상 그 일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때 그일로 인해  예정에도 없던 산악행군의 빌미가 됐을것이란  추측은 하고 있었다.

그 후 전역시까지 행군을 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대신 10,26 사태가 나고 서울로 진입한 우리들은 착검을 하고 서울시내를 행군했고,  광주사태를 거치면서 다시 자대로 돌아오기까지 끊임없는 데모진압 훈련에 시달려야 했다.

 

 

 

 

 

 

군대도 다 인간사회니까 복잡한 일이나 어려운 인간관계가 없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대문학> 10월호에는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한 기가 막히는 소설이 있어서 포스팅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하필이면 군대를 소재로 한 소설을...' 싶었던 것입니다.

엉뚱한 얘기나 보태겠습니다.
1966년 여름에 대천해수욕장에서 지낼 때인데, 놀만인가 하는 병사는 정말 이름도 제대로 못쓰는 녀석이었는데, 제가 쓴 영어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그런데 회화는 왜 못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더니...
마음 편한 나날이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군대이야기는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얘기랍니다.
한데 남자들은 무슨 물만난 고기처럼 몇 명만 모였다 하면 이 이야기로 혈압을 올리지요.
그것도 뻥이 한 반 쯤 섞어서 말이지요.
그런것으로 생활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만 있다면야 굳이 말리지 않아도 될것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감사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을 했군요...
저는 요즈음 말도많도 탈도 많았던.. 28사단... 수색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 때.. 사건이 참 많았지요...
그래서 비상도 많았었고요...
10.26.. 12.12... 5.18.. 최규하 하야.. 전두환 등장.... 등등...
군생활이 긴장의 연속이었던 걸로 생각이 납니다... ㅎ
줄여 말한다면 고생을 많이 했지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특히 광주사태때 겪은 일은 쉬 잊혀지지 않습니다.
동생도 조카가 군대가니까 면회갈 때 그러대요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니라고 ㅎㅎㅎ 예전에 군생활이 이렇게나 힘들었는데 말이죠
Welcome back!
반갑습니다.
요즘은 면회시 아예 내무반까지 들어가더군요.
옛 군생활 했던 저러서는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아버지 군대 사진에서 많이 봤던 모습입니다. 가장 위의 사진은 왜 저 흰색 속옷만 입고 사진을 찍었는 지 궁금했는데,,
국방색..
반가워요~
겨울이나 여름이나 같은옷을 입었는데 여름엔 팔을 걷고 입었지요.
훈련시 더우니까 윗옷을 벗고 런닝차림으로 훈련을 했습니다.
참..무엇이든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군대생활에 대해선 아는게 별로 없는데
여중,고시절 위문편지를 주고받다 결국엔 연애편지로 발전했던 추억이(~)(~)(ㅎ)
물론 추억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만 그때 휴가나왔다며 만났던 군복입은
그 오빠의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요...(ㅎㅎ)
음...전에도 이 얘기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위문편지가 연애 편지로..
추억으로 끝난게 어찌보면 아름다웠는지도 모르지요.
군복입은 그 오빠의 모습이 그리도 멋졌는데 어찌해서 더 진행이 되지 않았을까요(?) (ㅎㅎ)
30년이 넘은 과거보다 역사의
사진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전, 그렇게 고생을 했어도 모두가 병역을
맞추었지만 오히려 국가를 관리하는 고위직은
무직과 병역 면제와 탈피와 병으로 골골하다 아직도
안죽고 나라를 관리한다니..세금이나 올리면서..
힘을 가진 자들은 군에 가지 않으려 했던 시절이니 오늘의 군면제 문제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합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이런 양반들이 애국에 관한 이야기엔 혈압을 더 올리게 마련입니다.
아직도 그 꼬리가 여전하게 길어서 무슨 일만 벌렸다하면 군면제 이야기가 나오니 맥빠지는 일이지요.
79년 군번이시니 저 보다 위 기수시네요.
그당시 군대는 얼차려도 많고 기합도 많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정은 남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속칭 윤일병사건처럼 링게르를 맞히면서 구타를 하는 잔인함은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덕분에 추억의 한토막을 꺼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반갑습니다.
아..
전 77년 이예요.
광주사태를 겪은뒤 바로 전역을 했지요.
오늘의 군대가 몸고생이 많았던 전보다 더 삭막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팀스프르트란 훈련이 참 오래된 훈련이군요
군대 이야기를 하니 만리장성을 쎃습니다
비오는 날 그것도 야간행군 참 힘들었겠습니다
말한마디 잘 못하여 전 대원들이 고생을 하였습니다
고생담 추억담 잘 잘들었습니다 ㅡ열무김치님
참 오래된 훈련입니다.
그런데 왜 꼭 추운시기에 하는지 그게 영 불만이었지요.

춥고 배고프고..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니 오래되긴 했네요.
관료제라는 용어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막스 베버가 사용하면서 알려진 이 단어는 대규모 조직이 자기부처 이기주의를 주장할 때 발생하는 병폐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단점으로 이기주의, 형식주의, 복지부동 등을 이야기하는데
정부조직, 공기업조직, 군대조직 등 인원이 많은 인간조직에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습니다.
그래서 경영학이나 행정학에서 '조직 소통'이나 '경영 원활화'를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다친 전우가 있는데 내 조직의 명령이 없으니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고
그쪽 입장에서는 담요까지 걸친 포병들이 적군처럼 보였을 법합니다.
지옥의 묵시록이란 영화에서도 플래툰과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평안한 연말이 되셔야 할텐데요...
사실 제가 배치된 부대는 당시에 소위 빽이 좀 있는 애들이 많이 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빽은 그만두고 찢어진 가방조차 없었던 제가 왜 그리로 갔는지는 부대배치를 받고 몇 달이 지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기가 막히더군요.
군대이야기를 쓸때 한 번 더 써볼까 합니다.
당시로 봐서는 그나마 괜찮은 군생활을 했던걸로 압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쥐를 몰아도 구멍을 남기라더니 . . . 말이 좀 심했군요.
"X 같으면 포병으로 오지" 이말은
"X 같으면 군대 일찍 오지." 또는
"X 같으면 장교로 오지." 하던 말과 똑같은 거 같습니다.

저희도 저런 상황을 자주 겪었는데 . . . 참 입맛이 쓰지요.
결국 첫눈이 왔는데 첫조심 하십시오.
눈이 오면서 녹아 다행입니다.
첫 눈 치고는 많이 내렸습니다.
함박눈으로 날리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 겨울이 언제나 지나갈까..하는 생각에.

정선은 이제 겨울 복판이겠군요.
올해의 마무리를 잘 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소식 있기를 기재 하겠습니다.
잘 지내시지요.하하하 저는 요즘도 간혹가다가 가끔 군대에 대한 악몽을 꾸고 합니다.
꿈속에서 군대제대를 해서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다시 군입영통지가 와서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전에 제가 근무를 하던 그 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제 밑에 있던
후임병으로 들어가 생활을 하는 꿈을 간혹 꾸곤 하는데 꿈깨고나서도 개운 하지가 않고
뭔가 떨뜨름한 맛입니다.
군생활을 어려운 시기에 하셨네요.
군 생활 하면서 포병들을 부러워 한적도 많지요.
편안한날 되세요
군대의 악몽을 꾸신다니 초암님의 군생활이 그리 편하지 않으셨던것 같습니다.
하긴 저보다 위시니 군생활이 편했을리 없지요.
다시 입영하는 꿈은 개운할리가 없지요.
이제 그런 꿈에서 벗어 나셧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제법 내렸습니다.
겨울 복판으로 가는군요.
어르신의 건강을 빌어 봅니다.
선생님 제가 한참 아래 입니다.
저는 군부대가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부대에서
생활을 했는데 부대원들이 대부분 사고를 쳐서 영창을 다녀온
문제사병이 많은 부대였습니다.
툭하면 집체교육이고 외부로 나가는게 아주 극한적 이었습니다.
구타와 체벌이 얼마나 심했는지 저는 군대서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엄청난 폭행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군대를 간다면 되도록 안갈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않가는게 좋다고 말을 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아..그러시구나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담배 피지 않는다고 폭행을 당하고 술 마시지 않는다고 혼 난 건 저도 같습니다.
전 술이 몹시 약해서 군생활동안 툭하면 벌어지는 회식문제로 정말 고역을 치루었지요.
그바람에 담배는 많이 피웠는데 이제는 끊었습니다.
대신 사회생활을 하려니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게 되구요.
그바람에 주량도 좀 늘었습니다. [비밀댓글]
저도 담배를 군에서는 두들겨 맞으면서도피우지 않았는데
직장생활을 하다가 형편상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건축현장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일 하다보니 저는 땀흘려 일하는데 모두들 담배피우느라
쉬곤 하더라고요 .어쩔수 없이 담배를 피우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다 담배를 끊은지 10여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술은 끊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고요.
선생님 시간 되시면 13일날 서울시 중구 구민회관에서 현대문학사조 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해 인사도 나누시고 함께해 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편안한 날 되세요.

[비밀댓글]
ㅎ 105mm, 155mm 곡사포, 8 in. 자주포,
부산 병기학교에서 교육 받던 생각이 나네요.
막상 독립 병기대대에 가서는 책상에 앉아서
군단 병기 통계나 뽑는 게 일이었지만요.

군대 생활이 '필요 이상'으로 힘든 건 결국
사람들이(물론, 몇 사람이지만) 나빠서란
생각이 들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여러사람이 모이다 보니 개성이 강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 강한 개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지요.
특히 문제사병 하나가 끼치는 가혹행위나 폭언은 군생활 내내 고역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곳의 날씨는 어떤지요.
아....이 박격포도 보병의 화력이 아니고 ...
포병에서 운영하였습니까.

저희 여단은 155견인포가 아니라 자주포로 바뀌여서...
견인포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니 군시절이 좋았다는 생각도 조금 드내요.
할때는 괴로웠지만....
아..이 박격포는 구경이 105mm보다 더 크고 무게가 300kg이나 나가서 보병이 지니고 다닐 수 없습니다.
고폭탄의 무게도 무척 무거운데다 살상반경도 넓어서 포병이 운영 했지요.
이 포를 운영하는 부대가 연대직할로 따로 있었습니다.
이동은 차량에 싣고 다닌것 인가요.
넵~
포를 운반하는 차량을 각 각 운영 했지요.
군이 다르다 보니 군대는 다녀왔지만 낯선 장면들입니다.
졸병때는 내무반 건물의 2층을 사용했어요.
1층이 수송대였는데 군기가 엄청나게 세다고 들었습니다.
육군을 나온 형의 얘기를 들을때는 포병이 보병보다 훨씬
힘들다고 했습니다. 화기를 어깨에 메고 다녀야했기에~~~
선생님의 글을 보니 양상이 많이 바뀌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
반갑습니다.
아..어깨에 화기를 메고 다니는것은 60mm나 81mm박격포를 말하는것이구요.
보병에서 운영했지요.
하지만 윗글에서 소개한 포는 사람이 등짐으로 져서 운반이 곤란한 무게가 많이 나가는 대형 곡사포였지요.
저도 제대를 한지 오래라 아마도 지금은 양상이 아주 달라졌을거란 생각입니다.

군대 이야기는 많이 하면 펑이 좀 보태져서 여자들이 아주 싫어 합니다 .ㅎㅎ
(^^)
(안녕)하세요(~) 블친님
멋지네요(~)
햇살 좋은 금요일 오후입니다(~)
입춘도 지났는데 바람은 여전히 쌀쌀 합니다.
잠시들려 좋은 글에 잠시 쉬어 갑니다
행복한 금요일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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