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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미니스커트

by *열무김치 2013. 10. 26.

 

 

 

 

초등학교 뒷쪽으로 창순이네 옥수수밭이 있고 그 옆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그 길은 순전히 나와 창순이가 만든 길이었다.

학교 정문으로 돌아서 나가면 집까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가 보려고 꾀를 썼는데  창순이네 옥수수밭 쪽으로 나가는게

지름길이었다.

길을 만들었다.

밭 가장자리를 적당하게 발로 뭉개면서 한사람 정도 지날 수 있도록 대충 다듬었는데 문제는 밭을 일구느라 캐 낸 돌멩이들을 모아놓은  돌무더기였다.

한참을 궁리하던 나는 돌무더기에 올라가 윗쪽을 평평하게 다듬어 사람만 지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돌무더기를 지나 현기네 밭으로 내려서면 현기네 집 뒷간이 있고 뒷간만 돌아서면 바로 고야나무 아래였다.

그런데 고야나무 아래엔 성질 고약한 개가 매여져 있었다.

뒷금치를 들고 깨금발로 살금살금 지나갔지만 현기네 개는 여지없이 달겨들며 짖어댔다.

처음엔 놀라서 줄행랑을 쳤지만 제깐놈이 목이 매였는지라 나중엔 무섭게 달겨들어도 약을 올리며 지나 다녔다.

학교가 파하고 운동장에서 창순이랑 놀다가 헤여지면서 난 재빨리 내가만든 샛길로 집으로 왔다.

내가 툇마루에 앉아있자 그제서야 돌아오던 창순이가 물었다.

"야,.너 언제 왔어 ? 가는거 못봤는데?."

"다 수가 있지. 갈켜 줄까?"

난 창순이를 데리고 샛길로 갔다.

"야, 이렇게 오면 되는구나. 그런데 여기는 길이 없었는데.."

내가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자 착하고 순진한 창순이는 나중에 자기 아버지한테 혼날건 생각도 않고 좋다고 박수를 쳤다.

 

고야나무가 꽃을 피우고 현기네 개가 새끼를 낳았다.

전에는 그리도 으르렁 대더니 얼마 지나지 않자 그 옆을 지나도 본체도 하지 않았다.

겨울동안은 큰 탈 없이 지나 다녔지만 밭에 부침이를 하고  나무에 물이 오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다니던 길 끝까지 모두 갈아서 옥수수를 심고나니 돌무더기 말고는 길이 모두 없어진것이다.

하지만 겨우내 샛길로 맛을 들인 나와 창순이는 학교 정문으로 나와 집까지 가는 거리가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창순이와 난 한창 크는 옥수수를 일렬로 뽑아 버리곤 다시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일은 얼마 가지 못하고 창순이 아버지께 들통이 났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돌무더기를 지나 우리가 만든 길로 들어섰는데 창순이 아버지와 현기네 어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눈치를 챈 창순이는 잽싸게 도망을 쳤지만 난 이내 붙들렸다.

"니가 강냉이 다 뽑고 이리로 다녔지?"

난 잔뜩 겁을 먹고 잘못했다고 손을 싹싹 빌었는데 창순이 아버지는 나를 붙들고 어머니한테 데리고 갔고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질질 짜자 어머니가 창순이 아버지한테 따져 물었다.

"우리 애만 그쪽으로 다녔대요?  애들이 그럴 수도 있는거지 ,무슨 죽을 죄를 진것도 아니고.."

누구랑 다녔느냐는 말에 난 창순이를 일러 바치진 않았지만 도망가는 창순이를 보았으니 소용이 없엇다.

결국 창순이는 빗자루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우리집으로 쫒겨왔다.

"나, 일르지 않았어. 가서 물어 봐."

 

그해 늦은 봄 초등학교에 예쁜 여선생님이 부임해 왔다.

우리반을 맡았으면 하고 내심 바랬지만 그 여선생님은 1학년 담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여선생님은 곧 동네에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 선생님이  입고 다니는 옷 때문이었다.

그때가 67년도였으니 흉악한 산골의 정서가 어땠을지는 보나마나였다.

그 여선생님은 아주 짧은 치마를 보란듯이 입고 다녔는데 이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키도 멀쑥하니 크고 체격이 보통이 아닌데다 짧은 치마를 입은 선생님의 허연 다리는 호기심 많은 나의 눈에도 아주 신기하고 별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그 여선생님이 세 들어 사는집이 우리집에서 조금 떨어진 인순이네 집이었다.

어느날 저녁 마루에 식구들이 모여앉아 수제비를 먹고 있는데 그 여선생님이 우리집 앞으로 지나갔다.

그날도 보니 그 선생님은 아주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위에 걸친 옷 역시 아주 짧은거였다.

"아니, 저게 뭐여..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나. 참..남새스럽네."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참을 바라다 봤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치마를 걸친 선생님의 허연 허벅지와 실룩거리는 큰 엉덩이가 유난하게 눈에 들어왔다.

 

창순이네 아버지한테 혼쭐이 났는데도 나와 창순이는 틈만 나면 밭 가를 비집고 몰래 드나들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혼쭐이 났다.

창순이는 발가벗긴 채 두들겨 맞았고 창순이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한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어느날 학교가 파하고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는데 창순이가 불렀다.

"야, 난 아무래도 도망을 갈까 봐."

"왜그래? 또 혼났어?"

" 소 꼴 베는것도 지겹고, 아버지 한테 혼나는것도  그렇고..

누나가 오랬어. 전학시켜 준다고."

"안돼. 너만 가면 어떡해."

창순이는 객지로 나가있는 누나한테 간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창순이가 괜히 해보는 소리라는 걸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동네 총각들은 그 여선생님이 지나 다니는 길쪽에서 멀거니 여선생님을 바라다 보았다.

선생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짧은 치마를 입고 육덕진 엉덩이를 들썩이며 보란듯이 걸어갔고 총각들은 선생님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주로 우리집 마루에 모여 앉았는데 그때가 저녁 무렵이어서 어머니는 영문도 모르고 수제비를 한 솥 가득 끓이는 날도 있었다.

난 그놈의 수제비가 정말 싫었다.

멀그레한 국물에 떠있는 밀가루 덩어리가 목구멍에 넘어갈때마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여선생님이 지날때마다 멀거니 바라보는 총각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어머니는 동네 총각들을 내 쫓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얼마 후 나와 창순이는 우리가 몰래 다니던 샛길로 그 여선생님이 지나 오는 걸 보았다.

우리는 그 모습이 우습다고 킬킬댔다.

그 뒤로도 선생님은 자주 그길로 드나 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현기네 아버지나 창순이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와 창순이는 그렇게 쥐잡듯 하더니 저럴수가 있나.

창순이 아버지는 골목을 지나가는 여선생님을 물그러미 바라다 볼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선생님이 우리집 모퉁이를 돌아 나갈때 까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딱지가 났다.

내가 왜 우리만 혼을 내느냐고 물었더니 욕만 바가지로 돌아왔다.

"이놈의 자식들 ..빨랑 소 꼴이나 베어와"

한번은 아버지와 창순이네 아버지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여선생님이 지나갔다.

그날도 역시 짧은 치마에 구두를 신었는데 두 양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선생님을  바라다 보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지금도 영화 제목이 생각 나는데 그날 밤 본 영화제목이 "지옥문" 이었다.

어머니께 떼를 썼지만 결국 돈을 타내지 못한 나는 창순이랑 몰래 가설극장 포장을 헤집고 기어들어 갔다.

만일 들키기라도 하면 혼쭐이 날 판이었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한참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옆을 보니 그 여선생님이 앉아 있는게 아닌가.

난 창순이를 쿡쿡 찔렀다.

나와 창순이는 영화를 보고있는 선생님을 한동안 바라다 보았다.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진 건 어린 마음에도 이상했다.

가설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던 선생님을 본 이후로 난 그 여선생님이 싫어졌다.

짧은 치마를 입고 허연 허벅지를 내보인채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고 가던 선생님의 신비로움이 하루 아침에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진속 아기의 고무신이 참 정겹네요.ㅎㅎ
글고 뒤에 장독대랑 펌프..ㅎㅎ

열무김치님의 어린시절은 참 소설같은 이야기들이 많은거 같아요.
어릴적 살아온 환경들이 다 비슷비슷한거 같은데..
지금까지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계신걸 보면
열무김치님은 남달리 감성이 무척 풍부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엔 수돗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때였고 기껏 펌프를 박아서 쓰면 아주 괜찮은 환경이었습니다.

소설같은 이야기라기보다는 제가 어릴때 부터 쓴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게 무대인셈이지요.
오래전 이야기니 생각이 많이 보태졌습니다.
시공자 아이들은 뒤잡듯 하면서 여선생님을 방치하는 것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반, 젊은 여자에 대한 용서 반.

그런 거 아닐가요? 글이 참 재미있습니다.

- 청청수 -
남자들 시선은 존경심 같은 건 애시당초 없었던것 같구요.ㅎㅎㅎ
세월 변해도 별로 달라질것 같지도 않습니다.
당시 제 기억에 뚜렷한 건 짧은 치마를 입고가는 여선생님의 뒷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아주 예쁘고 괜찮게 보였다는겁니다.
학교에 가서 그 선생님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했으니까요.
ㅎㅎㅎ 창수아버님과 아버님이 산골마을에서 신기한 모습을 보는 정경이 절로 그려지네요
그나저나 저런 것들을 어찌 다 기억하고 계신지 참 대단하셔요
엉큼한거지요. ㅎㅎ
한번은 이곳 아울렛에서 패션쇼가 열렸는데 그곳에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구경을 왔더군요.
늘씬한 아가씨들이 요란하게 차려입고 활보를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분들이 아주 넋을 놓고 보았다는겁니다.
오랫만이죠~ㅎ
요즘 가을날과 벗 하기에 바쁜 나날이네요..ㅎ
마치 단편 소설을 읽어내려가는거 같은 착각속에
빠지네요...
유년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았습니다
고야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갑자기 궁금증이
발동 합니다...ㅎ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갔었는데
음악샘이 참 세련되고 멋쟁이셨는데
남학생들이 수업은 관심이 없고 음악샘
치마길이에 관심을 갖는걸 보고 그땐 왜들
그러는지 이해를 할수 없었는데요..ㅋ
남자애들은 그 누구나 그리하였나 봐요~ㅋㅋ
오랜만에 들려서 정감스런 님의 글에 한창을
머물다 갑니다..
한주 고운날로 채워시길요...
네..
고야나무는 자두나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자두는 크지만 고야는 열매가 그리 크지를 않은데다 몹시 시어서 먹기가 좀 그랬지만 과일이 흔하지 않았던때라
그것도 없어서 못먹었지요.

선생님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한가지 쯤은 누구나 다 있지요.
요즘 가을을 스켓치 하시느라 바쁘시군요.
이제 얼마 남지않은 가을날 좋은추억 많이 만드시길요.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재미나게 올려주셨네에ㅛ...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 이쁜 여선생님의 존재는
그야말로 바람을 일으켰을거 같아요^^
마치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처럼요..
그러고보면 그렇게 싫던 기억만은 아니거같아요...
시골에서 나고 자라 학원도 변변한 책도 없었지만
마음껏 뛰고 놀던 그 어린시절의 기억이 제게도 있답니다^^
요즘은 정 반대가 되었지만 시골학교에 여선생님이 오는 일은 참 드물었습니다.
대부분 남자선생님이었지요.
제 기억에도 1학년때 빼고는 나머지 5년은 남자선생님이 담잉이었어요.
그러니 어린 마음에도 호기심이 강했던것 같습니다..

시골학교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정신적인 자산을 덤으로 얻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시 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재미있었던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십니다.
추억도 맣지만 어떻게 그 많은것을 기억해 내시는지
지금 바로 있었던 일처럼 쓰시네요.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저 아이는 절구를 썼네요.
재미있는 사진입니다.
일일이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계속 써 온 일기장에 제 유년시절의 일들이 거의 적혀 있습니다.
그걸 끄집어 내어 제 살을 보태는거지요.
일기장이 없었다면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자세한건 알 수가 없겠지요.
그동안 모아놓은 일기장이 세어보니 많기는 많네요.
제 보물 1호 입니다.

절구를 쓴 아이가 아들녀석 입니다.
아드님이 애기때도 영리하고 다부지게 생겼었네요.
검사아드님 정말 잘 생겼드라구요.

아드님 결혼하면 며느님에게 이 사진 보여주세요.
정말 재미있어요.
한편의 소설을 본듯
넘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오버랩되기도합니다
요즘 여기저기 다니시느라 무척 바쁘실것 같습니다.
덕분에 구경 잘 하고 있네요.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읽으며 감탄했습니다,
열무김치님의 글을 대하면 가슴이 참 따스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황순원님의 글을 읽는 듯 하여.

제게도 글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 예쁜 초임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한 겨울에도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출근하는 걸 고집하셨습니다.
교장 선생님께 불려 가 훈계를 들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 선생님은 미니스커트를 고집하셨지요.
제 중학교 때니 아주 오래 전 이야기 입니다.

좋은 글에 마음에 향기를 더해 갑니다.
통 넓은 나팔바지, 청바지, 통기타, 미니스커트...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친근한 단어지요.
규제가 있었기에 오히려 더 뜨겁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예쁜 여선생님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걸어가는 모습이 싫지 않았어요.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려도 남자의 본능, 본성은 숨쉬나 봅니다. ㅎㅎ
한편의 드라마 소설을 읽었습니다
짜임새가 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실감을 느낍니다
뭐든 쓰시면 잘 쓰실 것 같은데 장느를 만들어 쓰시면 좋겠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
모두들 드라마나 소설 같다고 하시니...

말씀하신대로 장르를 정해 글을 쓰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블로그에서 제 마음대로 쓰는 잡다한 신변잡기지요.
말씀 고맙습니다.
지금 아주 좋습니다
단편소설 손색없습니다
별이 시를 써도 몇번을 다듬습니다
그렇게 해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쓰면 됩니다

10월은 보람있고 알뜰하게 보내셨나요
세상이 온통 물들어갑니다
10월 마지막날 아름답게 보내시고 11월은 결실로 맞이하세요^^
알퐁스 도테의 단편 같습니다.
아름다운 얘기, 잘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단편'이 없다면 더욱 삭막할 것입니다.
긍정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아마도 픽션이었더라면 흥미가 없었을
열무김치님의 추억담이 맛깔스러워 실실 웃어가며
두 번을 읽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 광경을 훤히 바라보고 있는 듯
사실적인 묘사는 글을 읽는 내내 지루함 대신 즐거움을 선사해주었습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심리는 어른이나 아이나 같은가 봅니다.
그런데 창순이 아버지가 무서우셨나 봐요.
어떻게 그만한 일로 발가벗겨 매타작을 하신대요? ㅠㅠㅠ

절구를 뒤집어 쓴 아이~~귀엽습니다.
아이들의 재치는 어른도 못 따라가는데 어찌 저걸 머리에 쓰고......ㅋㅋ
창순이는 바로 이웃에 사는 눈만 뜨면 보는 친구였지요.
창순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당시 어른들은 왜 그리도 무서웠던지요.
일기장을 읽다보면 혼이 난 이야기가 많아요.

절구 쓴 아이는 제 아들아이 입니다.
당시 올림푸스 하프사이즈 필카를 한대 어렵게 장만 했는데 그걸로 몰카를 많이 했지요.
하지만 살던곳이 흉악한 산골이라 사진을 인화하지 못하고 있다가 먼 시간을 지나 근간에 스캔을 받았는데
세월탓에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것들이 대부분이고 그중 몇장을 건졌지요.
저도 오랜 세월뒤에 사진을 본 셈입니다.
그러셨군요
저 사진 속 아드님은 지금은 장성하여 외려 아빠의 모습을
도촬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ㅎㅎ
저도 처음 장만했던 필름 카메라를 지금도 가지고 있답니다
가끔 추억이 그리우면 그 사진기를 들고 나가기도 하지만
필름을 구하기도 힘들고 인화를 하는데도 시간이 걸려서
요즘은 보관만 하고 있네요
수정도 보정도 할 수 없는 필카 시대가 그립습니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웠네요 .저는 2키로 거리라 처음에는 부담스런 거리였다가 고학년이 되자 오히려 집에 올 때는 이것 저것 관찰할 것들이 많아 좋았죠.
당시에도 여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니 늘씬한 미인이셨네요.초등때 학생수가 남녀 2반씩이나 6학년까지 12반 .작은 학교는 아니었죠.
많이 바쁘시지요?
올해 거두미는 괜찮으신지요.

당시 어지간한 학교는 학급당 두 세반이 많았고 학생수도 1,000여명에 이르는 학교가 많았을걸로 추측이 됩니다.
제가 살던 깊은 산골 학교도 그랬으니 다른곳은 더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지금은 여선생님이 압도적으로 많다는데 그떄는 정 반대로 여선생님이 귀했지요.
남자 아이들은 상대성이라 여선생님을 더 좋아 했는데 미니스커트를 걸친 여선생님이 오니 물어보나 마나 입니다.
당시 제 일기장을 보니 그 여선생님에 관한 내용이 상당부분이었어요.
남자들의 본성입니다.ㅎㅎ
너무 바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네요.오늘도 고구마 마지막 수확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동네 수도요금 계산하려고 아직 집에 있다 로그인했네요.서리가 내릴 시기가 아니므로 고구마가 밭에 있어도 괜찮지요. 찰벼는 올해 풍년인데 ,고구마 풍년이라도 별 재미가 없네요 ㅎㅎ 고구마 2톤 이상 저장하는데 고구마 값이 많이 내렸지요.한가하면 고구마 다시 장사 시작하지요 ㅎㅎ

고구마 3천평 정도 재배하려면 홍수출하를 하지 않고 저장해야 하는데 문제는 저온저장시설 신축 비용을 무시할 수 없어 내년은 고구마 재배를 500평만 하려고 마음이 변하네요.500평은 하루에 수확해도 방에 저장할 양으로 아마 2톤정도일 것으로 짐작하네요.대신 절임배추와 태양초고추 소량 재배할 것으로 계획을 바꾸네요.
올해 고구마뿐만이 아니라 채소나 감자등 전 품목이 다 가격이 좋칠 않습니다.
풍년이 드는걸 걱정해야 되니 이게 잘하는 생각인지 헛갈리네요.
그래도 쌀독에 인심 난다는데 무엇이든 풍성해야 나라의 근간도 든든할텐데 조금만 과잉생산되면 바로 아웃이니
나라의 농업정책이 무용지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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