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가을 이야기 3

*열무김치 2024. 10. 9. 09:15

 

 

시골 가는 길에 사과농원에 잠시 들렀다.
맑은 햇살아래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의 붉은 볼이 햇간이 얼굴처럼 상큼하다.
"사과색이 좋네요."
사과를 수확하던 농장주가 사과 바구니에서 큼직한 놈을 골라 건넨다.
"이 녀석은 꽃사과를 개량한 품종인데 크기도 제법 크고 아삭한 맛도 꽃사과보다 좋아요."
눈을 찔끔 감고 한 입 덥석 베어 물자 시큼 달큼한 사과즙이 입안을 가득 점령한다.
"어때요. 작년보다 나은 거 같은데요."
"올해 폭염이 심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예년 수준은 되었네요. 이곳이 해발 700이니 그 덕을 본 셈이지요."

 

 

 

"와~! 황금 사과도 올해 엄청나게 달렸네요. 몇 년 전만 해도 사과가 작더니 확 달라졌어요."
농장주가 느끼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흐흐..저 녀석들도 이제 연애를 할 나이가 된 거지요."
"에?"
"거시기, 사람으로 치면 방년 18세 아니겠어요.
가슴도 빵빵해지고 허리도 잘록하니 머스마들 눈 돌아갈 만한 나이가 됐다 요거지요. 뭐, 소비자들의 눈이 돌아가야 내 주머니가 빵빵해지지만."
"아이고 표현 한 번 쥑이는데요. 흐흐.."

시나노골드라는 품종의 사과는 일본에서 개발한 노란색을 띠는 사과로 황금사과로 불린다.
당도가 높고 식감이 뛰어나 빨간 사과에 비해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보급단계로 흔하진 않다.
해발 700 고지의 평창지역은 겨울이 길고 몹시 추워서 사과나 배 감 등의 과실농사가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90년대 필자도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밤나무 말고는 한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동사해버려서 큰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다.
한반도의 급격한 기후변화가 남도에서만 재배하던 사과나 배 감 등의 과실 농사를 북쪽으로 확 밀어 올렸다.
대신 남부지방의 사과 농사는 해답을 찾기 어려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경북 문경에 사과농사를 하는 큰 누님이 계시다.
벌초를 위해 9월에 들리면 해마다 사과를 몇 상자씩 주시는데 올해는 맛보기 말고는 사과가 없단다.
병충해가 심하고 수확량이 많이 떨어져 상당수의 사과나무를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사과 주산지의 지도를 바꾸고 있다.
중부 지방에 자리를 잡은 사과농사는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머잖아 북한지역으로 올라가고 중부와 남부지방은 사과맛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북한이 생산한 사과를 사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 작년 올해 사과 품귀현상이나 가격급등을 겪고 나니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위기의식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사실 무나 배추 사과나 배 등은 당장 없어도 살 수야 있겠지만 모든 곡류나 채소 과일 등이 생물학적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한 유기적 알고리즘(algorism) 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는 시금치나 상추 또는 수박 오이 고추 등 한 종류가 제대로 자라지 않거나 이로 인한 수확량 감소로 이어지게 되면 비슷한 기후대의 농사가 비슷한 패턴을 밟는다는 얘기다.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다.

 

 

붉게 화장을 한 요염한 얼굴들이 가을찬가를 부른다.
빨간 열매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다.
계절에 대한 분명한 선을 긋고 주고받아야 할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이렇게 정확한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그 증거를 받아 든 우리는 푸른 하늘과 가녀린 들꽃, 쓸쓸하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감성의 밭을 일구고 그 안에서 안녕과 행복을 덤으로 얻는다.
가을이 천고마비의 계절이 되는 것은 잊지않고 순환의 바톤을 건네는 변하지 않는 믿음때문이다.

 

 

 

내 것 아니어도 풍성한 열매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미 부자가 되었다.

가을....
나의 겉과 속을 꺼내 저울에 달아보고 한잎 낙엽에 내 나이도 함께 물들고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계절이다.
가을이 짧게 지나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릴케의 시어처럼 낙엽이 날리는 쓸쓸한 날에는 가로수 사이를 불안스레 헤메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