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사금
"야, 너 교실에 드가 봐라. 니 이름이 이따마하게 써있더라."
무슨 일인가 싶어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가 보니 칠판에 내 이름이 커다랗게 써 있었다.
월사금 안 낸 사람, 아무개 아무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교탁 앞으로 불려나가길 수차례, 기어이 내 이름이 칠판에 내걸린 것이다.
난 분하고 창피한 마음에 조퇴 허락도 받지않고 집으로 내달렸다.
집으로 가는 내내 계속 눈물이 나왔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복슬이가 꼬리를 치며 달겨 들었다.
신경질이 나서 발로 냅다 걷어차자 복슬이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하며 나가떨어졌다.
"니가 이 시간에 우엔 일이고? 핵교가 하마 끝났나?"
마당에서 조리질을 하시던 어머니가 물었지만 난 코대답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시커먼 이불에 머리를 쑤셔박았다.
휭하니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이상하게 보셨는지 어머니가 방문을 확 열어 제꼈다.
"니, 오늘 무신 일 있었나? 우에 이렇큼 일찍 온긴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머리를 박고있자 방으로 들어온 어머니가 나를 잡아제꼈다.
눈물 자욱이 난 것을 본 어머니가 다그쳐 물었다.
"와 이라나. 니 어데서 뚜들기 맞았나?"
대답하기가 싫었다.
말 해봐야 해결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난 입을 꾹 다물고 천장만 쳐다보았다.
"야가 아늙은이가 될라나 와 말을 안 하노. 니 공부 하기 싫어서 글카제? 그렇키 하기 실컬랑 그만 치와라."
그 말을 듣자 난 나도 모르게 벼락같은 소리를 내 질렀다.
"월사금은 왜 안 주는근데. 챙피해서 핵교에 가기 싫어."
꽥 하고 소리를 내지르자 놀란 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시더니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방안으로 차려준 저녁밥상이 서늘하게 식도록 방구석에서 늘어져 있었다.
문창호지에 아침햇살이 분홍색 그림을 그리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된다카더노?"
"올게 한 칸도 내지 않았으이 셈해보소."
마루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무신 아들한테 코 묻은 돈을 글게도 받는다카더노. 고까이 몇 푼이나 된다고."
"하이고야.그 말이 입으로 나오요. 땡진 한 푼도 주지 몬 하민서"
"기냥 문때고 나가라 하그라. 국민핵교 졸업장만 받으민 되제. 설마 내 쫓기야 하긋나."
"내사 모르겠소. 어제도 반나절도 안차서 울민서 왔습디다."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밖을 내다보자 아버지가 곰방대에 연초를 말아 뻑뻑 피우고 있었다.
"광산게 미칠 일한거이 받으면 준다케라. 돈 나올 구석이 거 밖에 더 있노."
아버지가 간드레를 챙겨 나가자 어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야야, 그만 일나서 퍼뜩 핵교 가그라. 아버이가 미칠 있으면 해준다카더라."
며칠 뒤면 해결해 준다는 아버지 말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미칠만 참고 댕기라. 지금 나부대야 없는 돈이 어데서 나노."
비로서 마음이 풀린 나는 보리밥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우고 기분좋게 학교로 갔다.
여전히 칠판에 내이름이 커다랗게 써있었고 영락없이 교무실로 불려갔지만 며칠 뒤면 해결해 준다는 아버지말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교무실로 불려온 아이들이 족히 열 대여섯은 되었다.
"너그 아버이는 뭐 하시노?"
"농사 하시는데예."
"너그 아버이는?"
"암 것 두 안 하십니더."
"암 것 두 안 한다꼬?"
"야, 기냥 집에서 왔다갔다 하십니더."
머리통으로 갑자기 작대기 세례가 날아왔다.
"근데 와 월사금은 안 내능긴데. 야, 윤OO, 너 네 부모는 얭심도 엄다카더나. 우에 엄캄시 한 번도 안 내노?"
"미칠 있으면 준다고 했습니더."
"미칠 있으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다카더나?"
"광산에서 돈 받아온다고 했습니더."
후질근하게 서있던 우리들은 머리통을 한 차례씩 쥐어박힌 뒤 교무실에서 쫓겨났다.
그러고 보니 월사금을 한 번도 내지 않은 건 봉선이와 나 둘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난 봉선이와 붙어 다녔다.
작년 겨울에도 그랬다.
집집마다 난로에 땔 화목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나와 봉선이네는 장작을 내지 못했다.
누구네 집은 한 짐만 내는 장작을 몇 짐이나 냈고 그 집 아이는 난로 불 옆에 책상을 옮겼다.
아이들도 눈치가 있는지라 나와 봉선이는 난로 불 옆으로 쉬 다가가지 못했다.
난로 불 위에 도시락을 얹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운동장에 나가서 놀다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면 바짝 언 손과 발을 난로에 녹여야했지만 괜스레 교실 구석으로 나 앉았다.
장작을 반으로 자르지 않으면 난로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봉선이와 난 장작을 반으로 잘라오는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아이들도 그러는 나와 봉선이를 그러려니 했다.
학교에 낼 장작은 고사하고 겨우내 집에서 땔 화목을 구하느라 어머니와 난 산비알을 오르내렸다.
봉선이는 자주 매타작을 당했다.
봉선이가 늘 시커먼 막걸리주전자를 들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봉선이 아버지가 주태배기였다.
"난, 아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 외상술 받아오는 것도 지겹고.."
"고런 말 하지마라. 글카다 디지게 맞는다."
"니가 뭘 안다꼬 그라나. 거이 아니라도 맨날 팬다."
봉선이는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길거리에 주저 앉았다.
"에이 씨, 이거이 무신 맛이 있다꼬.."
봉선이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셨다.
"맛이 우때? 야 야, 니 갠찮나."
그날 봉선이는 땅바닥에 시커먼 막걸리 주전자를 패대기쳤다.
나와 봉선이는 뒷동산에 올라 팔베개를 하고 반나절이나 뒹굴다가 느즈막히 사랑방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잤는데 봉선이 엄마가 봉선이를 찾느라 난리가 났다.
"야, 그만 가봐라."
"싫다. 지금 드가면 난 디지게 맞는다. 서울로 내뺄기다."
그날아침 우리 집을 나선 봉선이는 달포가 되도록 보이지 않았다.
봉선이가 사라지자 난 학교에 가기 싫었다.
더구나 봉선이 어머니가 봉선이가 어디로 갔느냐며 나를 닥달하는 통에 더 가기 싫었다.
나중에 들으니 봉선이는 읍내 쌀집에서 배달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물어 물어서 봉선이를 찾아갔는데 봉선이는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봉선이가 나를 시장에 데려가더니 손바닥보다 더 큰 호떡을 쥐여 주었다.
"함 먹어봐라. 아주 달다."
"서울로 내뺀다카더니?"
"그칼돈이 어딨노? 밥 먹기도 힘들다."
시무룩하게 쳐다보는 봉선이는 바짝 야위어 있었다.
"집으로 안 갈꺼나? 학교 안 댕기고?"
"싫다. 집구석으로 드가봐야 또 막걸리 주전자나 나를낀데..학교도 안 갈끼다. 월사금 소리도 지겹고.."
"나도 여서 돈이나 벌까?"
"그딴 소리 말고 얼렁 끼가라. 이거이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봉선이는 형같이 말했다.
봉선이가 쥐여 준 호떡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먼지나는 신작로길은 너무도 멀었다.
그 뒤로 몇 달이 더 흘렀지만 내 월사금 문제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광산에서 돈을 받으면 준다던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학교에서의 닥달은 계속되었다.
난 학교에 가기 싫었다.
가끔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곤 뒷동산이나 개울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학교가 파할 쯤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두 번도 아닌 이 일을 어머니가 모르실리 없었다.
어느 날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나를 찾으러 오셨다.
"핵교에 가자. 월사금을 냈으이 걱정하지 말고."
"월사금을 냈다꼬?"
"오야, 그동안 밀링거 오늘 다 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도리질을 하다가 어머니를 따라 학교에 갔다.
교무실로 불려간 나를 보고 선생님이 빙그레 웃었다.
"이 자석아, 월사금 못 냈다고 결석을 고로큼 자주 하노? 어머니가 다 냈으이 앞으로 빠지지 말그라."
혼쭐이 나리라 여겼던 나는 갑자기 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교실로 들어온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을 붙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야, 나도 이제 교무실로 안 간다. 칠판에 쓰지 않아도 된다 안카나. 내도 월사금 다 냈다꼬."
"야. 이게 웬일이노. 느네 아버이가 돈 마이 벌었나부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져서 교실 여기저기를 설치고 다녔다.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키질을 하고 있었는데 복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요게 마실을 나갔나? 어무이요. 복실이가 없네."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않고 계속 곡식을 까불렀다.
몇 번 복실이를 불렀지만 보이지 않았다.
방안에서 숙제를 하다가 선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방안이 컴컴해져 있었다.
복슬이가 왔을까 싶어 방안을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는지 큰 소리가 들렸다.
"야는 뭐하노?"
"잠들었나 보제. 가만 두소. 오늘 핵교에 갔다 왔으이 맴이 편해졌을끼요."
"그래, 월매를 받았노?"
"그까이 중강아지 한 마리가 월매나 가겄소. 개장사가 후하게 쳐 줍디다."
"그래, 월사금은 해결 했더나."
"간싱기 됩디다. 아가 알면 생 지랄을 뻗을낀데.."
두런거리는 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난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그 지랄같은 월사금...복실이..
소리를 지르고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난 방구석에 머리를 쳐박고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았다.
복실이가 갔구나.
덩치라곤 내 팔뚝보다 조금 더 큰 복실이가.
초등생활 한 일주일 학교가기 싫어 놀이터에서 논것 빼고는
착실히 다녔던 시절입니다 너무나 오래 지나온 세월이라 가끔
그 시절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좋아했던 계집아이 경화, 연숙이 단짝 친구 길선이...
어찌 그리 맥없이 연락없다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고 무심합니다. 다시 만나기엔 또 어렵다
포기하고맙니다. 가난이 아주 사무치지는 않은 어린시절이라
삐딱하기도 맘이 여렸던듯 싶습니다 이리 흥 저리 흥 그저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라 글이 맘 짠하게 다가옵니다
저도 가난한줄 알았는데,저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아버지께서 영어선생님이셨지요.
그당시는 전쟁후라 가난한 집에서 계모에게 쫒겨나 길에서 울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집에 데리고 오셨어요.
십대 가장인 국자언니가 저희 집에서 오래 같이 살았지요.
나중에 미국에서 한국에 나가셨던 어머니께서 시집가서 잘살던 국자언니를 만났었다고 하셨지요.
많을 때는 3명이나 집에서 일을 해주고 아기들을 봐주고 같이 살았지요.
그땐 제가 너무 어려서 아버지께서 퇴근길에 언니들을 집에 데리고 오시면,언니들이 많아서 좋아 했었지요.
아무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나라가 가난하니 국민전체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요.
월사금 못내는 집안이면 그래도 굶지는 않은 집안이었겠지만, 오죽하면 자식을 길로 내쫒는 부모가 있었을지 상상이 안갑니다.
그 어렵던 시절이 다 지나가고 대한민국이 이제는 경제성장이 세계 11위라니 더이상 그런 아픈 동심은 없는 나라가 되어 있겠지요.
월사금 못 내어서 이름이 저렇게 칠판에 늘 적혀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수업 시간에도 집으로 쫓겨가곤 했습니다.
집에 가면 어머니는 일 나가고 안 계신데
눈물이 날 정도로 스스로가 불쌍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시대가 그러했고,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그 시대는 참, 폭력적이었다는 판단을 하게됩니다.
선생님들한테 불려가고 혼나고 했다는 얘길 하더라구요.
저랑 3년 차이인데 그렇게 다른 시대도 아닌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반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던거 같아요.
항상 불려가서 혼나고 뒤에서 손 들고 있고.. 그땐 어려서 그 아이맘을 헤아리지 못했던거 같습니다.
근데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독립심도 강하고 힘든일도 잘 버텨내 잘 살고 있더군요.
남편이 가끔 어릴적 얘기를 할때면 마음속에 큰 상처로 자리잡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침 조회가 끝나면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교과서가 없어
이교실 저교실 돌아치면서 빌려 보았구요
그 후로도 가난은 계속이었지요
아버지가 이북으로 납치 당하셨으니요
그전엔 사친회비를 안내면 결석으로 간주 하셨고
삼일을 결석하면 1점씩을 깎았습니다
돈내라는 용지는 가방 옆주머니에서 나달 나달 다 닳아 빠지도록 내놓질 않았었습니다
소용없는 일이었으니까요 ...
에구
지금은 내가 공주던가 왕후던가 합니다
배부르게 먹고
따순방에서 자고
더운물 찬물 나오는 수도에 .......
춥습니다
건강 챙기셔요 열무님 ...^^
육성회비였을 때도 있었고, 기성회비였을 때도 있었던 그 돈을 저도 거두었습니다.
어떤 교사는 잘도 거두어 교장으로부터 칭찬을 독차지했고, 늘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잘난 체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늘 꼴찌 근처에서 맴도는 반 담임이어서 아이들에게 자주 잔소리를 늘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많이 부끄럽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다만 병든 부모님이 계시고, 동생들이 일곱이었고, 제 아이들도 막 태어나고 했는데 월급은..........
우리가 그렇게 모두 살았나 봅니다
다행히 저는 논이 많은 곳에 태어나
월사금, 쌀밥은 먹었는데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먼 훗날
제가 월사금 안내서 교무실에 자주 불려갔는데
이해가 안됐다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는 기억이 안나는것 있지요
나중에 아버지께 여쭈어보니
일부러 돈 귀한줄 모르고
그리고 공부 안할까봐 빨리 안주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마도 은연중에 상처가 있었는지
우리 아이들 대학등록금도 제일 먼저 내게 했던 그것도 첫날 꼭 내야 했던 기억 납니다
지금은 다 추억이 되었네요
수학여행비를 제대 안주시고
보내준다 했다 못보낸다했다..하시던 아버지의 장난으로
저는 늘 기분이 올라갔다 곤두박질 쳣다 그랬지요
그래서 저는 거짖말 시키는 사람을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지금도 그러셧던 아버지 생각을 하면 참,,.
그리고 여전히 그러셨고요..
아버지에 대한 씁쓰레한 기억은 참 많지만
그와 반대인 어머니의 귀한 추억으로 이만큼 성장했지 싶습니다.
그럴때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수업 하는데
교실 밖으로 등 떠밀려 집에가서 월사금 받아 오라시던 엄한 음성.
친구들 입 가에 하얀 우유 흔적
나와 상관 없는 하루 한개 급식빵 냄새..
이 글을 읽는내내 어릴 적 시골 초등학교의 풍경이 그려지며 웃음이 스밉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몰래 대신 내주시기도 하셨었지요.
중2 때 부터는 남의집 일을 다니기도 했었습니다.
참 가난하고 마음아프던 시절이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네요.
따뜻한날 되세요.
어머니 혼자 오남매를 키우시느라 저희집도 늘 가난했지요.
이 글을 읽으니 저도 옛날 생각이 납니다.
실감나게 참 잘 쓰셨네요.
단편문학전집에 실린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