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소의 봄
흐흠...
뜨끈한 쇠죽에 배 깔고 누워 되새김질이나 하던 겨울이 좋았는데.
또 지겨운 봄날이 오는구나. 내 팔자여...
*올 봄부터 비탈밭을 갈아야 할 처가의 예비 일소
봄이 찾아온 강원도 산골의 외양간.
보구레를 끌고 강원도 비탈밭을 갈아야 하는 팔자 사나운 일소의 표정이 거시기하다.
한우를 먹자.
신토불이 한우가 진짜 쇠고기다.
농촌의 머슴노릇을 하던 한우는 어느날 부터 일 대신 질좋은 고기를 생산해야 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띠게됐다.
산야초나 농산물 부재료를 섞어서 끓여낸 쇠죽 대신 배합사료와 암모니아 볏짚을 상시 복용한 한우는 논이나 밭을 가는 일꾼신세를 면하고 잘 정돈된 우사에서 눈 지그시 감고 오수를 즐기며 되새김질이나 하는 억세게 팔자좋은 신세가 됐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중에 억세게 운이 나빠 주인 잘 못 만나는 바람에 봄 내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죽어라 쟁기를 끌어야 하는 소가 있다.
다름아닌 산골의 일소다.
전에는 소를 기르는 목적이 본디부터 달랐다.
거의 1년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된일에 시달려야 하는 노예신세였다.
사람이 하기 힘 든 일을 소가 맡으면서 소는 가축이 아닌 궂은 농삿일을 도맡아하는 농부였고 새경없는 머슴이었다.
소가 자라면서 덩치가 커졌다고 농삿일을 할 수는 없어서 1~2년은 수업을 받았다.
일정한 밭고랑을 타기 위해서 똑바로 가기, 좌 우 방향 바꾸기,밭고랑을 올라타고 내려타기, 뒤로 물러서기,빨리 가고 천천히 가기등의 소를 다루는 농부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채찍을 맞아가며 제식훈련(?)을 받아야 했다.
개중에 성질 사나운소는 두들겨 맞으며 쟁기를 끌다가 그걸 참지 못하고 산비탈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사람에게 길이 난 소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이내 붙잡혀서 매타작을 당하기도 했고 외양간에 들어와서 저녁을 굶는 등의 학대도 받았다.
다방개 3년이면 스타벅스도 안다고 했던가.
처음엔 모질게 매타작을 당하던 소도 반복학습이 이어지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제 팔자를 아는것이다.
그러나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것도 있기 마련이다.
모진 노동뒤엔 따끈따끈한 쇠죽과 함께 질 좋은 간식이 제공되었고 간혹 소의 보약이라는 콩을 얻어먹는 기회도 생겼다.
어느정도 길이 든 소는 계속 농삿일을 거들어야 했으므로 여간해서 우시장으로 팔려가지 않고 어느정도 생명을 보장받는 보증수표도 얻었으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요즘말로 사람과 동물이 윈윈하는 계약 시스템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있었던 셈이다.
사진에 보이는 산골의 비탈밭은 농기계가 들어가기 곤란한 곳이다.
농기계 발달과 보급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농촌에서 농기계를 빼고 농사를 얘기할 수 없을정도가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농사를 짓는 농부의 대부분이 노인인데다 그들의 육체적 노력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농기계가 없으면 한국의 농사는 사실상 아웃이다.
그럼에도 저 비탈진 밭은 기계대신 소가 쟁기질을 해야 한다.
경사도가 심한 밭에 경운기나 트랙터가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자칫하면 농기계가 전복되어 인명피해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어느정도 세월동안은 소가 그 책임을 져야한다.
내가살던 마을에도 비탈진밭에서 무리하게 일을하던 트랙터가 전복되어 농부가 사망하는 일이 여러건 있었다.
그렇다면 환경이 좋지않은 비탈진 밭에 농사를 왜 할까?
농사의 질 때문이다.
고추나 채소,특용작물이 자라는데 어느정도 경사도가 있는 밭은 물빠짐이 좋고 병충해가 덜해서 이를 외면하기 어려운것이다.
특히 고랭지 채소농사는 표고가 어느정도 되고 물빠짐이 좋은 경사진 밭이 고품질의 채소를 생산하는데 유리하다.
높은 지역인데다 경사도가 있는 밭은 특히 병충해에 유리한 환경을 지닌다.
하니 저런밭을 묵히기는 아깝고 농기계를 쓰려니 위험하다.
그 틈새일꾼인 일소가 나서야 한다.
아지랑이 이는 나른한 봄 날.
진달래 소롯이 핀 산바탈에 구성진 가락이 울려퍼진다.
"이러 이러.. 아, 올라서라, 워디워디.."
좌회전 우회전 깜박이는 소 코뚜레로 연결되는 농부가 잡은 낡은 밧줄에 의해 결정된다.
오른쪽으로 돌려면 소 오른쪽으로 밧줄을 당기고 , 왼쪽으로 돌려면 밧줄을 소 등으로 옮겨 왼쪽으로 잡아 당긴다.
물론 줄을 옮겨 당기며 후렴이 뒤따른다.
"내려서라, 돌아서고..후워이~"
비탈진 장이랑의 밭을 종일 갈려면 소의 입에서 허연 거품이 벅벅 일고 농부의 허리도 자지러진다.
큼직한 눈을 껌벅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는 가끔씩 기침을 해댄다.
둘 다 지치면 참을 먹는데 소 역시 커다란 함지박에 담아온 여물로 허기를 달랬다.
방아를 찧고나면 등겨가 나왔는데 힘들게 일하는 날에는 쌀가루가 듬성한 등겨에 콩을 섞어서 먹였다.
식 후 나른한 오후는 더욱 힘드는 시간이다.
내가 알던 이웃은 소를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일소를 부리면서 구성진 노래를 불렀다.
"이러이러..내리고..아, 올라서라. 간다 간다 내님이 간다.."
그님이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특정한 리듬이 없는 제멋대로의 구성진 노래는 산비탈 계곡을 타고 흘러 내리며 묘 한 여운을 남겼다.
처음엔 아니었겠으나 그 농도가 짙어지면서 쟁기를 끄는 소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혼연일체가 되는 듯 보였다.
밭 이랑을 올라서고 내려서는 소가 눈 지그시 감고 졸면서 쟁기를 끌었고 노래를 하는 그 양반도 막걸리에 취한 듯 보였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런일이 둘 다 은연중 마취제가 되어 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봄날의 노랫가락을 짐승이 즐겼다면 소가 웃을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 양반도 나중에 그렇게 문학적으로 말했으니까.
그 뿐만이 아니다.
아침에 일을 나설때는 소도 자신이 끌려가는 곳을 아는지라 발걸음이 여간 무겁지 않다.
하지만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때는 탭댄스를 추 듯 발걸음이 경쾌하기 짝이없다.
제놈도 퇴근시간을 아는 게다.
게다가 비가 꾸죽하게 내리는 날에는 소의 면상부터 달랐다.
쟁기를 끌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야말로 경사가 나는 날이다.
경험상 그렇게 느꼈다.
하니, 소가 어디 짐승만이겠는가.
세월이 가면서 일소가 나서야 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들었다.
경사진 밭을 파내고 농기계를 이용해 농사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일전에 찾아간 깊은 산골의 경사진 고랭지 채소단지는 대형장비를 투입한 덕분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제일 반가워 할 상대는 일소다.
아무리 짐승이지만 이래저래 한세상 살다가는 소 팔자에 매년 비탈진 밭에서 쟁기질이나 하는 신세가 뭐가 좋을까.
짧게 살다 죽더라도 잘 지어진 넓은 우사에서 편하게 사는게 장땡이다.
다만, 수많은 봄과 가을 겨울을 보내며 인간세상에서 한세상 누려보는 장수의 기회는 모두 날아가 버렸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최고라니 우선 편하고 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쥐구멍에도 볕이 든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쇠죽을 킁킁거리면서 우걱우걱 씹어대던 시골 큰아버지댁 소가 생각납니다.
큰아버지께서도 큰 솥에다가 쇠죽을 듬뿍 끓여서는 소에게 많이 먹였거든요. 그 냄새가 하도 구수해서
나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시골에 가도 소 보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냄새가 진동하는 대형 우사라고 하나요? 미간을 구기는 모습만 보게 됩니다.
구수한 시골 이야기가 한편의 단편 소설같기도 하고 수필같기도 합니다.
나도 길었으면 ᆢ 하고 그 속눈썹만 부러웠더랍니다 ㅋ
일소 ᆢ일소가 몬가 했더니만 일하는 소 였네요
단편 소설을 읽는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글에 빠져들었지요
고단한 소의 일생이 참으로 가엾단 생각에
마치 내가 소인양 ᆢ서글프니 ᆢ고달픈 인생이라ᆢ
맘이 아펏어요
이젠 그도 보기힘든 풍경이라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나 그 풍경을 짐작해보겠지요
어려서본 저의 외가도 수원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외양간에 소 한마리도 들어앉았었죠
방학 어느날 운좋게도 소가 새끼낳는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어제본듯 잊혀지지가 안구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뿐 눈은
소의 눈이라고 생각듭니다
성형외과 의사가 벤치마킹을 하면 대박을 떠뜨지리 않을까..ㅎㅎ
부러워 할 만 해요.
일소, 정말 힘들게 살다 갔지요.
소농은 모르지만 대농(농사가 많은 집) 은 거의 1년 내내 죽어라 일을 해야했으니까 어찌보면 불행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도 죽고나면 참 알뜰이도 사용했습니다.
소와 사람이 곧 잘 비교되는것도 우연은 아니지요.
저 커다란 몸집의 집승이 아이의 손에 이끌려 가는걸 보노라면 신이 허락한 일임에 분명 합니다.
참..
국화향님의 눈도 참 예쁘시던데요.
뭐..쓴 커피라도 없나?
닭의 수명이 15년에서 20년인데 치킨용으로 키워지는 닭은 35일 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15년 살 놈을 35일만 살도록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인간을 조물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틱낫한 스님이 쓴 '화(anger)'에 의하면 갇혀 살다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짐승의 고기를 먹으면
그 짐승이 가졌던 분노(화)가 그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몸을 아프게 한다고 합니다.
소도 강제 도축하지 않으면 20년은 산다고 들었는데요...
육우로 키우면 2년 이상은 키우지 않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열살도 되지 않고 죽는 것으로 계산됩니다.
현대인들에게 병이 많은 것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짐승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젊으셨을 때 소장사도 하셨고
집에도 일소가 있었지요.
어머님이 소풀을 베어다 쇠죽을 끓여서 먹이곤 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경기도 연천으로 참깨농사를 지으시려고 가셨는데
그 곳에 가서보니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다보니 산비탈의
경사가 심하다 보니 일소 두마리가 쟁기를 끌더라고요,
지금의 우사에서 길러지는 소들이 행복할까요.
군시절에 늘 부대안에서 집체교육만 하였었는데 외부로 훈련이라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편안한 날 되세요.
가슴에 가장 깊게 와 닿은 말입니다.
어릴 때 소를 지켜보며 자라서인지 소는 짐승 같지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가 아니더라도 '윤회'를 생각하면 소가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걸 보면 저도 죽어서 소가 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과분한 기대일까요?
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소와 함께 일한 그 농부는 생활철학이 깊은 분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멋진 분이었겠지요.
참 좋은 글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수많은 블로그에서 이런 소재를 다룬 글을 찾기는 생각보다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쌍해요
더군다나 식용으로 쓰기위해 단명하다는 것을 소도 알아버린다면
소는 뭐라할지...
암튼 고생을 면한건 다행으로 알 거에요
말이 그렇지 그 강제노동 또한 너무나 힘이 들 거임.
ㅎ~
요즘 소가 너무 비싸서 소를 별로 안잡는다는군요.
한우가 귀하답니다.
한우..지금 비싸지요.
소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작 생산자들은 높은 사료값 때문에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사실 소는 초식동물이니 풀을 먹어야 함에도 그 마블링 이라는 함정 때문에 인공사료에 의해 길러지다보니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농촌에서 농사용으로 기르던 한 두마리의 소는 여물을 끓여 먹이는 등의 사료공급이 가능했지만 대량사육에는 초식사육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볏짚이나 옥수수 부산물의 사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풀 한포기 먹지 못하고 1년 내내 사료만 먹는 소들이 대부분입니다.
마블링을 기준으로 하는 쇠고기의 등급이 바뀔 것 같은데..소비자의 선택에 시간이 오래 걸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흠..
일소 얘기에 쇠고기 타령을..
좋은 하루 되세요.
- ★ 미다스 kan7ry
- 2016.04.01 15:47 신고
- 수정/삭제 답글
소의 한가한 일상에서 꼬리를 흔들때가 가장 인상이 깊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어릴적에 살던 곳에서 보았던 풍경들입니다.
외양간이 있었고 할머니께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죽을 끓이셨지요.
소들이 여물을 먹는 시간엔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한참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선 소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실제로 큰 재산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글 읽으며 잠시 어릴적일들을 떠올리게 되었었네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소풀 캐러 싸리나 대로 만들어 물에 넣어도 되는 채이 비슷하게 생긴 소쿠리를 들고 가서
소풀을 캐어서는 봇도랑에서 소쿠리채로 넣어서 일렁 일렁 씻어서 왔고,
참 들고 들로 나가기도 했었고, 어른들께서 바쁘시면 쇠죽도 끓였지요.
이 글은 어쩌면 사람이 쓴 글이 아니고, 일 소들에게 들은 것을 열무김치님께서 옮겨 적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하
유명하다면 그나마 좋지만, 높으신 분들의 자서전을 적어 준다는 말은 들었지만, 동물의 이야기를 듣고 대필 하는 작가는
아직은 없지 싶은데, 최초의 그 이야기의 작가 이십니다. 하하
아! 열무김치님께서는 글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신 듯 합니다.
가끔씩 옛 고향 생각이 나면 이 글을 찾아서 읽어야 겠습니다.
저가 2년전 초등학교 고학년 3년을 지냈던 아버지 고향으로 찾아 갔을 때는 산입 층계논은 있었지만, 잔 중턱을 잘라내어서
우리 논 윗 쪽에는 4차로 길을 마무리 짓고 있었고, 아파트도 있었고, 그야말로 사람도, 들도, 세경 없는 머슴이었던 소도
온 들에 없었습니다.
비탈진 밭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는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암반데기에 갔을 때도 배추 농사 지어 놓은 밭들이 다 경사가 제법 나는 밭이였습니다.
지방마다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소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 보았지요.
지금은 아니지만 소도 주인을 누구를 만나는냐에 따라 일생이 결정되었지요.
소나 사람이나 고단하게 살았던 때니까 소가 더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사에 수십마리가 갇쳐서 살을 찌워야 하는 지금의 소들도 소의 입장에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겠지만 무거운 쟁기를 끌고 농삿일을 해야했던
옛날 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꽃들이 우르르 피어납니다.
짧은 봄이지만 좋은시간 많이 만드세요.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네요.
아주 오래전 제 기억으로도 봄이 되면 사람이나 일소나
바뻤던 시절이 이 시기였던거 같아요...
눈을 감은 소가 정말 고뇌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밭가는 소도 생동감이 넘치구요.
농촌 물정 모르는 저는 이 글을 읽고 많은 것을 배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뭔가 씁쓸하고 서글픈 기분은 어쩔 수 없네요.
사진을 잘 찍으면 글을 못쓰거나 글을 잘 쓰면 사진을 못찍거나 해야 되는데
열무김치님은 사진도 글도 최고입니다.^^
한분 한분 올리신 댓글들도
모두 소설입니다 고전에 속할듯 한 ...^^
피난시절 이삼년이 시골생활의 전부인 나는
문외한이라 끼어들 자격이 없슴입니다
일소
이십여년에서
이년으로 줄어든 생명 ....
비탈진 땅들이
여러가지로 자연적 환경이 좋군요
물빠짐과 해충 방제 ...^^
사월입니다
기분좋으신 일
가득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
제겐 로마병정님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이런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음은 농촌을 고향으로 둔 세대들의 희미하게 남은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세대가 지고나면 모두 잊혀지겠지요.
사실 그래야 하구요.
다만, 요즘 집단으로 사육되는 소들이 비록 힘든 농삿일에 시달렸지만 꽤 오랜간 삶을 지킨 일소들에 비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 마당에 놓아 길렀던 닭들도 알을 낳으며 대접을 받고 살았는데 생명이 너무 짧지요.
그 어떤 유명한 사람이 쓴 글보다 더 리얼리티 합니다.
책 한권 내십시요
더 많이 모아두셨다가 ...
건필 하시기를 바랍니다
깨끗하고 영양도 좋아보입니다.
순천생활 9개월로 접어드는데
오늘은 손님이 왔는데도 비가 내려서 방구들 지고 있습니다.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야겠군요.
- 청청수 -
몇년은 고달퍼야 지대로 된 일소가 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순천이 한참 남쪽이나 여름이면 정선 생각이 나겠습니다.
삼복때는 올라오셔야겠군요.
소가 가만히 눈 감은 모습이 너무 매력적입니다!^^
'명상 중이니까 건드리지 마!'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ㅎㅎ
- Captain Lee
- 2016.04.04 08:32 신고
- 수정/삭제 답글
올해도 대풍 되시길 기원 합니다
치악 에도 봄의 소식이 만연 하지요
구룡사
국향사
모두 봄꽃으로 가득 할듯 합니다
건강 하세요
소는 그냥 가축이나 짐승이 아니라 우리 식구죠..
소가 아프면 온집안이 근심이고 아버지는 입맛도 잃으셨어요...
밭갈이 논갈이 할때는 이집저집 불려다니며 힘들어하는모습에
같이 안쓰러워하고 잘때 된 숨소리 들으면서 아버지 가슴도
무너져 내렸어요...
봄되니 눈두렁 밭두렁 쏘다니고 싶어서
눈이 자꾸 밖으로만 돕니다. ㅎㅎ
읽다가 일어서고
중간 즘 읽다가 일어서고 ㅎ
끝부분 거의 다 읽어가다가 또 일어서고 ㅎㅎ
이제야 겨우 마지막 줄까지 읽었네요.
한우요 ...요즘 우사 하시는 분들 모두 큰 돈 만지시던데 ...
윤택한 밥상을 위해 소고기값 내리면 좋겠어요 ~ ^0^~
누우렁소도 보구요
밭가는 모습도 보구요
한우는 역우였지요
제가 시간을 내어 일본에 역시기행을 가려고 하는데 바로 한우의 일소로 흔적을 찾아보기위함이죠
불과 60년전만 해도 한국에서 일소가 배로실려 일본에 가서 밭갈이를 하다
늙어 힘이 빠지면 다시 배를 태워 한국으로 보냈다 하네요
신의 소라고 밭갈이용으로 한우가 최고 였고 일본소는 사나워 일을 못했다 하네요
지금도 흔적이 있고 증언을 해줄 분이 돌아 가시기전에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네요
마블링을 하려고 수입되는 사료가 8통차로 서울서 부산까지 400번을 왓다 갔는 량이라던데
소비자님들이 맛의식이나 생산자들의 생각이 마불링에서 벋어났으면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것 갔습니다.
한우와 굴레 멍에를 보니 반갑네요
강원도 산골엔 아직도 소가 밭을 가는곳이 더러 있습니다.
경사도가 심하니 별 방법이 없어서지요.
그러나 고령의 농부들이 많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일들은 모두 전설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한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한국문화를 전수받은 문화의 속국이나 마찬가진데 그동안 우리가 많이 당하고 살았다는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쇠고기의 마불링에 관한 우리국민들의 신앙과 같은 현상은 외국인들에게는 별스럽게 보인다고 하는군요.
외국인들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건강이 우선이겠지요.
좋은 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