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누님들이 많았던 탓에 어린시절에 심부름을 참 많이도 했었다.
그 뿐 아니라 동네 총각들과 사연도 많았다.
그런 사연은 비단 우리집 뿐만이 아니라 과년한 처녀나 껄렁껄렁한 총각이 있는 집은 비슷했다.
오뉴월 동네 보리밭이 괜히 수난을 당했을까.
동네 보리밭이나 으슥한 산과 들은 역사와 운명을 결정짓는 곳이었다.
하도 딸만 낳아서 딸 그만 낳고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에서 내 밑에 동생이름을 끝순이라고 지었지만 끝순이라는 이름이 신통력이 별로였는지 어머니는 또 딸을 낳으셨다.
동네에서는 딸부잣집으로 통했다.
내 위로 여섯, 아래로 둘이나 더 있어서 당시 웬만하면 집집마다 대여섯씩은 있었다고 해도 줄줄이 알사탕으로 딸들이 있는 집은 드물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샛말로 한창바람의 아가씨들이 집에 있었으니 동네 총각들이 아무 관심도 없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교회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뒷집 노총각이 나를 통해 세째누님에게 편지를 전해주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혼쭐이 났고, 결국 세째누님은 쫓기다 시피 살고 있던 서울로 가버렸다.
참 이상했던 것은, 한창바람의 청춘들이 연애를 하는데 아버지가 왜 그렇게 무섭게 대하셨는지에 대한 의구심이다.
아버지는 체격이 장대하신데다 힘이 장사여서 당시 웬만한 동네 청년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요즘말로 작업을 걸던 총각들이 아버지에게 얻어 걸리면 땀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나곤했다.
한 성질 하던 넷째누님도 아버지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그런데 왜 나는 체격도 그렇고 키도 요모양인지 알수없는 일이지..
언젠가 아내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고백하듯이 중얼거렸다.
"당신 처음 만날 때 내가 눈이 멀었지. 지금만 같아도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을텐데.
눈은 와이셔츠 단추구멍 만 하고, 키는 거시기만 한데 왜 그걸 보지 못했을까나.."
.............
우스개로 들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스며드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거울앞에 서서 요모조모 뜯어보고 깨금발을 해가며 없는 키를 늘려 보았지만 아내의 말에 딴지를 걸만한 게 없었다.
아무리 남자의 노년이 아내에게 의존해 가는 유아기같은 신세라지만 여간해서 그런말을 하지 않았던 아내에게 그런 농담조의 말을 들은 후 맨날 유니폼이나 입고 다니던 옷차림에 신경을 좀 쓰기로 했다.
용감하게 카드를 쭉 긁어서 제법 귀티나는 옷을 한 벌 해입고 미장원에 들러 폼나게 머리손질을 한 뒤 아내에게 다가 가 물었다.
"어때요? 쓸만하지 않소?"
물그러미 나를 바라보던 아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더니
"당신 요즘 다른 여자 만나? 왜 안하던 짓을 해요. 그냥 하던대로 하라니까. 머리는 또 그게 뭐예요."
나는 맥이 탁 풀렸다.
누님들이 많았지만 그 중 서울물을 먹은 세째누님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가장 세련되어 보였다.
누님들이 모두 나를 예뻐했지만 왈가닥 네째누님은 아예 나를 종 부리 듯 했다.
난 되도록이면 넷째누님을 피해 다녔는데 내가 간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찾아와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식구들이 많다보니 마치 모내기 할 때 일꾼들이 들판에 모여앉아 모밥을 먹 듯, 마루나 방안이 가득차게 식구들이 모여앉아 밥을 먹었다.
쌀과 보리, 감자 옥수수 등을 섞어서 지은 밥은 투박하기 그지 없었지만 모두들 달게 잘도 먹었다.
쌀을 섞었다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했다.
그래도 내가 아들이라고 어머니는 내 밥그릇에 쌀이 많이 섞인것을 퍼 주었는데 가끔 이에대한 시비가 붙었다.
다른 누님들은 모르는 체 했지만 넷째누나는 내 머리를 쥐어 박으며 심통을 부렸다.
"이게 뭐라고 쌀밥을 골라 퍼 줘.얄미워."
나보다 일곱살 위였던 누나는 심부름을 잘 하지 않으면 귀를 잡아 당기고 볼이니 엉덩이를 꼬집는 등 나를 못살게 굴었지만 먹을게 생기면 제법 통 크게 인심을 썼다.
하지만 나를 때렸다고 어머니에게 일러 누님이 어머니에게 혼쭐이 나면 영락없이 허벅지에 멍이 시커멓게 들도록 꼬집히기 일쑤였다.
난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것 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지금이야 농촌에 가면 처녀 총각을 만나기가 꿈에 떡 맛 보기보다 힘이 들지만 당시 동네엔 총각들은 물론 처녀들도 무척 많았다.
산업화 바람이 눈을 뜨기 시작하던 60년대의 농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로 나가는 경우보다는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더 많았다.
좀 괜찮게 산다는 집의 자녀들이 도시로 나가 상급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일개 면이나 군에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장성한 처녀들 역시 객지바람을 쐬면 바람이 든다고 하여 집에서 살림이나 돕다가 시집을 가는 식이었다.
사실 마땅한 대안도 없던 그저 밥술이나 먹으면 괜찮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자기 먹을 건 타고난다고 하여 스스럼 없이 아이를 낳았고 오늘에 이르러 베이비부머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이 되었다.
학벌, 경제적 바탕이 거의 바닥이었던 그들에게도 젊은날의 꿈과 희망은 오늘과 다르지 않았겠지만 탈 농촌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전의 농촌 청춘들의 삶은 보기에 따라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60년대 후반에 산업화 바람이 불면서 농촌의 젊은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밀려 나오게 된다.
한국의 경제를 이만큼 키우는데 기초석을 놓은 사람들이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은 오늘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해타산이 아닌 가난을 벗고자 했던 처절한 정신이 이 세대들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젊은이들은 예전보다 더 고단하다.
밥이나 먹고 살면 그만이 아닌 아주 복잡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헛..
연애편지 이야기를 하다말고 얘기가 삼천포로 간다.
동네에서 논마지기께나 가지고 있는 김부잣집이 거드름깨나 피웠는데 그집 아들이 요즘으로 본다면 날건달이었다.
머리에 기름을 반드르르하게 바르고 몸에 꽉 끼는 바지에 하얀 구두를 자주 신고 다녔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도 멋지게 보였다.
어느날 그가 학교에 가는 나를 부르더니 손에 얼마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야, 꼬맹이. 너 이거 두리누나에게 전해줄래?'
두리는 집에서 부르는 넷째누나 이름이었는데 본 이름은 그게 아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 어머니는 그렇게 불렀다.
어쨌든 돈을 받았기에 난 신이 났고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가겟방으로 달려가 그 돈으로 모조리 과자를 사서 집 뒤란에 숨겨두고 몰래 꺼내다 먹었다.
그가 전해주라는 머리를 땋 듯 접어준 종이를 넷째누나에게 주자 종이를 펴서 읽어보던 누나가 내 볼을 잡아 당기더니 주먹으로 내 등짝을 마구 때렸다.
"쬐끄만게 ..너 이거 어디서 받았어?"
두들겨 맞은 부위가 너무 아파서 눈물을 짜고 있는데 마침 편지를 준 총각이 우리집으로 왔다.
난 기회가 이때다 싶어 정지깐으로 얼른 들어 갔는데 잠시 뒤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넷째 누나가 뭐라고 욕을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며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겁에 질린 나는 아무래도 여기 있다가 또 매타작을 당할 거 같아서 얼른 뒤란으로 돌아가 숨겨둔 과자를 들고 냅다 튀었다.
저녁 어스름 해서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오니 다행이 넷째누나가 없었다.
" 야, 꼬맹이. 너 두리누나한테 뭐라고 꼬아 바친거야?"
그 총각은 내 멱살을 잡더니 눈을 부리리며 욕을 했다.
"너, 요번에 또 그러면 가만 안둔다. 이거 잘 전해. 알았지."
그는 또다시 꼬깃하게 접은 종이를 내손에 쥐어 주었다.
혹시 또 돈을 주지 않을까 싶어 눈치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난 그 편지를 누나에게 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겁을 주는 그가 얄밉기도 했고 또 종이쪽지를 전했다간 무슨 벼락을 맞을지 몰라 책가방에 쑤셔 넣었다.
" OO아, 이게 뭐니?"
나를 부른 어머니께서 종이쪽지를 내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내가 가방속에 쑤셔 넣었던 그가 전해 주라는 종이였다.
어머니가 낡은 책가방을 꿰매 주면서 가방을 털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겁이 난 나는 얼른 그 종이를 빼앗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뭔데 그러냐. 이리 내 봐라."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계속 쭈뼛거리자 어머니는 수수빗자루로 내 등짝을 후렸다.
기겁을 한 나는 얼른 종이를 꺼내 어머니앞에 내어 놓았다.
"이게 뭐여? 어디서 난거냐?"
주춤거리다 등짝을 한 번 더 얻어걸린 나는 할수없이 그 총각이 넷째누나에게 주라고 한 걸 가방속에 넣어 두었다고 일러 바쳤다.
"뭔 글씨가 써있는 거 같은데 어디 읽어 봐라."
수수빗자루 몽둥이가 무서웠던 나는 더듬거리며 종이에 쓴 글을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디서 만나자..어쩌구 ..하여튼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종이쪽지를 읽자 듣고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셨다.
"두리야, 두리야 , 이 지지바가 어디로 갔나."
어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셨다.
어머니의 표정으로 보아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안그래도 겁에 질려있던 나는 책가방과 읽고있던 종이쪽지를 팽개치고 뒷문으로 36계 줄행랑을 놓았다.
뒷동산으로 도망을 간 나는 해가 뉘엿 하도록 내려오지 못하고 바위에 앉아 있었다.
땅거미가 밀려 와서야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넷째누나가 아버지에게 혼찌검이 나고 있었다.
"요놈의 지지바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레 이따구 편지가 아 가방에서 나와"
넷째누나의 자지러지는 소리를 듣자 난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말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나가 우는 소리를 듣고나서 난 다시 도망을 쳤다.
"너, 잡히기만 해 봐.죽었어."
어머니 뒤에 숨었다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치자 넷째누나는 도끼눈을 뜨고 벼르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소를 끌고 개울가로 나가 풀을 뜯기면서도 난 가재미눈이 되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걸려서 된통 두들겨 맞을것만 같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 총각도 다시는 나에게 그런 쪽지를 주지도 않았고 나를 봐도 모른 척 했다.
도망을 다니고 눈치를 보던 어느날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샛길로 들어섰는데 강냉이 밭 가운데 두 남녀가 서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넷째 누나와 그 총각이었다.
그냥 갈까 하다가 호기심이 생겨 살금살금 그 옆으로 기어갔다.
두사람은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곤 무슨 이야기인지 소곤거렸다.
무섭던 누나가 저럴줄이야.
왜 저래..
난 침을 흘리며 멀거니 그 모습을 훔쳐 보았다.
두사람은 손을 맞잡고 얼굴을 부비더니 꼭 껴안고 강냉이 밭에 아예 드러 누웠다.
그 모습을 보자 저사람이 누나를 때리는게 아닌가 싶어 겁도 났고, 이러다 들키면 죽도록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기어들어가긴 했는데 나오기가 힘이 들었다.
최대한 살금살금 기어 나오느라 애를 썼지만 난 기어이 들키고 말았다.
"누구야."
총각이 황급히 쫓아와 나를 잡아 일으켰다.
"OO아. 네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
나를 알아본 총각이 황급히 뛰어 나가자 얼굴이 벌개져서 토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 보던 누나는 얼른 내입을 틀어막고 나를 끌고 강냉이밭 복판으로 들어갔다.
"야, 너 어떻게 알았어?"
또 두들겨 맞을거 같은 생각에 난 아뭇소리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너, 쓸데없는 얘기 하다간 알지. 나한데 반 은 죽어. 엄마가 물으면 모르다고만 해 알았지?"
입이 틀어 막힌 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요상한 일이 자주 생겼다.
심부름을 잘 시키지도 않았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달달한 사탕도 더러 얻어 걸렸다.
나를 바라보는 넷째누나의 시선이 봄바람 같았다.
거, 아주 희한한 일이었다.
그러나 넷째누나는 그해 늦가을 한양으로 가버렸다.
서울로 가던 날 내가 물었다.
"반지르름한 아저씨랑 안 만났나?'
"쬐끄만게. 너, 끝까지 입 다물어야 해. 알았지?"
연서를 쓰면서 밤새 누군가를 그리워 하고 가슴 태우던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던 날이었나.
불러주는 이, 관심 가져주는 이 없는 , 지나간 날이나 들추어 보는 날이 누구라도 도적같이 오고야 만다.
청춘의 꽃은 누가 뭐래도 연애다.
그건 그렇고..
지금 안성쪽에 살고있는 넷째누나는 아들 딸에 손자까지 보고 잘 살고 있으니 이쯤에서 어머니께 일러 바쳐도 상관 없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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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에게도 다섯 여동생이 있고 그 가운데 남동생이 이름이 나빠서
그 이름대로 물에 빠져 죽어서 딸만 여섯 있으니까요.영직이란 이름이
물에 퐁당 빠져 죽을 이름이라고, 지나가던 중이 이름을 고치라고 했는데,
교회 다니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중 말을 안들었다고 하데요.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사람 이름은 잘 지어야 하겠어요.
누님많고 여동생 많은 집에는 미녀들이 많이 있지요.
다들 인물들이 좋으셔서 중간에 만만하게 심부름시키기 좋으니까 그 바람에
누님들 청춘사업에 쏠쏠한 재미도 보시고 또 수난도 겪으시고...이제 다
지나간 추억이니 아름다운 얘기로 기억이 나시나 봅니다.
누님들은 연애도 잘하시는데,중간에서 열무김치님도 많이 배우셔서
젊은시절을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하기사 잘못 쓰셨다가는 부인께서 보시겠네요.ㅎ
연애편지 심부름을 어린아이들 한테 시켰지요.
또 시골이 아니고, 도시에서는 문장력 좋고, 필체 좋은 사람에게 연애편지 대필도 부탁해서 전해 주기도 하였지요. 하하
이야기가 재미나서 그 때 그 시절로 돌아 가 봅니다.
그 시절에는 연애 하면서 숨을 곳도 많았습니다. 우리 동네는 물레방아는 없었지만, 그 때만 해도 대마 농사도 지었고,
키 큰 담배 밭도 있었고, 목화밭도 사래 긴 밭 저 반대편 끝으로도 숨을 수 있었으니 그 때 아가씨 고모들, 아가씨 큰 언니야들이
우리동네는 다 친척이니 다른 동리 총각들이 왔었지요.
연애을 하다가 들키고, 맞고 해도 못 말리고 했던 - 연애 잘 하던 아가씨들이 결혼을 해서도 잘 살던데요.
아무래도 재치와 지혜가 더 있었지 싶습니다. 하하
다 지난 추억이지요.
아직 시간이 없어서
잠시 읽고 가지만
참 재미있고 쉽게 쓰셔서
저는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기대하고 다시 올께요
"너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사실은 예뻤기 때문에 그런 편지를 더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이 글에도 나오듯이 부모님들은 대개 그렇게 나무랐지요.
그때의 그 청춘남녀들이 지금 노인이 되어 있기도 한데, 어떻게 중고등학생들의 '청춘사업'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저는 좀 의아스러워하는 편입니다.
그 태도를 보기 싫어하는 것이라면 아이들이 어른들 보기 좋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하는 걸까요?
사촌 누님이 세 명인데 초등학교 때 큰댁인 향리에 가면 누님들방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았습니다.
한번은 동네 구판장에 갔었는데 평소에는 텅 빈 곳이었는데
고등학생인 누님과 친구 몇 명, 그리고 같은 수의 남학생들이 모여있었지요.
소주랑 사이다, 과자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야외전축을 틀어놓고 노는 중이었습니다.
그 누님, 좀 노는 편이었는데 어떻게 결혼은 엄격한 얼굴을 가진 초등학교 교사와 하게되었고
지금은 은퇴한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되어있습니다.
글에 나오는 뒤란. ㅎㅎ 또 돈을 줄까. 손을 바라보는것 과자사다 감춰 놓고 몰래 먹는것 ㅎㅎㅎ
얼마나 귀한 아들인데 그리 몰래몰래 꼬집고 부려먹엇을까요 ㅎㅎ
그 옛날 브라자가 처음 나왔던 그때 연애하던 큰 언니가 브라자를 햇었는데.
울 할머니가 망측한것을 하고 다닌다고 아궁이에 집어 넣었던 일도 있었지요..
지금처럼 전화니 핸드폰이니 그런것 없어도 연애도 잘했지요? ㅎㅎㅎ
손 편지를 읽고 또 읽어 닮아 너덜너덜 해질때 까지 읽던 낭만도 참 좋았던 시절입니다.
그속에 제 생각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참고 하소서 ....^^ ^^ ^^
연애해서 결혼못한게
두고 두고 한이 되었습니다
못생겼어도 사람들이 따랐는데
호랑이 오빠 둘이 얼마나 무섭게 굴었던지요 ...^^
그시절 가난했지만 살만했고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누이가 그렇게 많은데 용감하게 결혼을 하신 것을 보면
ㅎㅎㅎ 지금도 잘 하시지만 좀 더 잘해주셔야겠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