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묵
*사진출처 (http://cafe.daum.net/happyhomefeel)
충주 달천에서 2학년 1학기 까지 초등학교를 다녔다.
달구지 겨우 다니는 시오리길은 흙보다 돌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산골 아이들은 귀신같이 돌부리에 채이지 않았다.
검정고무신은 1년 내내 신고 다니면서 갖은 푸대접으로 학대를 해도 좀처럼 구멍이 나지 않아서 저놈을 어떻게 하면 새신발로 바꿀 수 있을까 를 늘 궁리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발을 접어서 기차놀이도 하고 시냇가에 나가면 고기를 잡는 도구로 변신을 하던 고무신에 실증이 나던 나는 기어이 신발을 팔아먹고 말았다.
한달에 서 너 번 마을을 떠도는 엿장수에게 신발을 넘기고 그 댓가로 엿 한 가락을 받은것이었다.
당시 고무신발은 물론 머리카락, 양은, 숟가락 등 웬만한 물건은 모두 엿이나 나이롱과자로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
양지쪽에 앉아 엿 한 가락을 게 눈 감추 듯 먹어치운 나는 엄마에게 다가 가 징징 짜는 얼굴로 개울을 건너다 넘어지는 바람에 개울물에 신발을 떠내려 보냈노라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즉시 수수빗자루로 매타작을 당했다.
개울물에 넘어졌으면 옷이 몽땅 젖었어야 했는데 미처 거기까지 계산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바람같이 엿장수에게 달려갔고, 어떻게 하셨는지 원수같던 꺼먹고무신은 별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어머니손에 들려 있었다.
그러나 몰래 숨어서 먹던 가락엿의 달콤한 맛은 수시로 고무신을 팔아먹으라고 충동질을 했다.
학교를 오가는 시오리길은 그리 간단한게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잘도 다녔다.
막상 수업종이 울리면 학교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지각을 맡아놓곤 했다.
등짝에 대각선으로 둘러맨 책보엔 후즐그레한 교과서가 나오곤 했는데 그럴것이 비나 눈을 예사로 맞은 까닭이었다.
집으로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면 책보를 가슴으로 안긴 했지만 그게 온전 할 리 없었다.
뜨뜻한 아랫목에 푹 젖은 책과 공책을 말렸지만 아침 등굣길까지 마를 리 만무여서 사정을 자세히 알 리 없는 선생님은 교과서를 우습게 아는 놈이라고 수시로 손바닥을 때렸다.
길동무 하나 중 입성이 좀 괜찮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당시엔 구경하기도 힘 든 운동화 비슷한 신발을 신고 다녔다.
우리들은 흘끔거리며 그 아이 신발을 훔쳐보았고 내심 부러워했다.
어느날 그 아이는 부러워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꺼먹고무신을 연필깎는 칼로 들키지 않을만큼 찢어놓는 방법이었다.
"빙신아, 이렇게 하면 간단 하잖아. 얼마동안 신고 다니면 구멍이 나잖아. 그래야 다른 신발을 사주지. 안그래?"
" 그래도 안되면 어떡하냐?'
"돌멩이로 박박 문지르라니까."
우리들은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내 시키는대로 칼자욱을 냈다.
그러나 어디든 가롯유다는 꼭 있게 마련이어서 어느 녀석이 꼬아 바쳤는지 며칠을 못 가 나는 어머니에게 귀를 걷어 들렸다.
안그래도 엿을 바꾸어 먹었던 전력이 있는지라 팬티바람으로 종아리에 줄이 가도록 회초리 찜질을 당한 나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거리방으로 쫓겨났다.
꼬아바친 녀석이 짐작은 갔지만 그녀석이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지라 설사 증거가 있다고 치더라도 달겨들어 분풀이를 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쫓겨난 녀석이 나만이 아니었다.
두 집 건너에 사는 봉선이는 웃통까지 홀랑 벗긴 채 쫓겨났는데, 봉선이 등짝이 벌건 것으로 미루어 호되게 매타작을 당한 게 틀림 없었다.
밤이 늦도록 집으로 들어가지 못 한 나는 결국 봉선이와 봉선이 형네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자다가 들으니 어머니가 와서 나를 찾으셨고 자는 척 하는 나를 보시더니 방문을 닫고 나가셨다.
이튿날 아침을 한 술 얻어먹은 나는 봉선이와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학교로 갔다.
칼로 찢으라고 일러준 동무를 만나 너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푸념을 하자 녀석은 넉살좋게 말했다.
"빙신아, 쬐끔만 째라고 했잖아. 멍충아"
물이 질겅이며 올라오는 고무신을 신고 가을을 나자 이내 추위가 몰려왔다.
벌이가 시원찮던 아버지가 객지로 돈을 벌로 나가시자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하셨는데 그게 아주 고된일이라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그러나 그 보따리장사로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어머니는 동지섣달 무렵부터 시골 오일장날에 생선을 떼어다가 팔았다.
나는 가끔 조퇴를 하고 어머니를 따라 오일장에 나가서 생선파는 일을 거들었다.
친구들이 보면 어쩌나 싶어 안가겠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불호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추운데 쪼그리고 앉아 생선을 마분지에 싸주는 일을 했는데 추운 날씨에 손가락이 곱아서 포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시장에서 생선장사를 거든 덕분으로 어머니는 아주 괜찮은 신발을 한 켤레 사 주셨다.
난 그 신발을 신고 보란듯이 뻐기고 다녔는데 이상하게도 새로 산 신발은 꺼먹고무신과 달리 금방 헤졌다.
시장에서 파는 생선은 산골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라 서 너 종류에 불과했다.
소금에 바짝절인 고등어와 아지, 그리고 임연수라고 불리는 새치였는데 그 중 유독 많이 팔렸던 생선이 있었는데 바로 도루묵이었다.
겨울철 두어 달 반짝 나왔던 도루묵은 동해안에서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산골 오일장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 정도로 양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격도 헐쯤했고 사가는 사람도 아예 바가지나 자루로 사갔다.
지금도 눈에 선 한것은,한 두마리가 아닌 커다란 도루묵 무더기에서 작은 삽으로 그릇에 마구 퍼담아 팔던 모습이다.
근래 이와 비슷한 광경을 딱 한 번 횡성장에서 목격했는데, 알배기가 아닌 숫놈 도루묵을 만원을 받고 커다란 바가지로 가득 퍼담아 주고 덤까지 얹어주는 광경이었다.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여자들은 들지도 못 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그 생선이 제맛을 낼 리 만무다.
사람 입맛은 간사하기 그지없어서 음식의 양에따라 입맛이 변덕을 부린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삽으로 마구 퍼담던 도루묵은 입성이 좋지 않았던 그때에도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난 팔다남은 도루묵으로 끓인 찌게나 국을 몇 번 맛을 본 뒤 여간해서 입에대지 않았다.
시레기나 김치를 넣고 들크름하게 끓여낸 도루묵 찌게는 와드득 거리며 씹히는 알도 그랬고 물러빠진 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그 양이 많다보니 시각적으로도 이내 실증을 불렀다.
그렇거나 말거나 별다른 반찬이 없었던 우리 식구들은 커다란 솥으로 가득 끓여낸 도루묵 찌게를 저녁이 끝나기 무섭게 모조리 먹어치웠으니 먹을 거 시원찮았던 그때에 도루묵이 구세주 노릇을 한 셈이다.
그리 달갑지 않았던 도루묵이 근간에 고급 생선으로 팔자를 고치더니 이제는 가격으로도 거들먹거리는 양반 생선으로 등극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 듯, 그야말로 시골 장바닥에서도 찬밥신세였던 생선이 축제를 벌릴만큼 귀한 대접을 받게 된것이다.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지만 설마하니 도루묵을 쫓아갈까.
피란을 가던 선조가 피란길에 먹은 도루묵이 너무 맛이 좋아 묵이라고 불렸던 이 생선을 은어라는 고급말로 부르라 했다가, 후일 궁으로 돌아와 그맛이 그리워 찾아 먹었더니 영 그때맛이 아니어서 다시 묵, 그러니까 도로 묵이라고 하라 했대서 도루묵이 됐다고 한다는데 요즘 가격이 만만찮아서 일까 .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도 좋다.
살이 물러서 허당이라고 했던 것이 담백한 맛과 함께 지방질이 적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라는 극찬으로 바뀌었고, 잡히는 양이 적다보니 도루묵에 대한 칭찬은 가히 귀가 간지러울 정도다.
예전에 돈으로 양반을 샀다지만 그렇게 구한 양반 신분으로 살기에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하지만 도루묵의 신분상승은 힘들 것도 없겠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몸값을 추어주니 그야말로 누워 식은죽 먹기 아닌가.
한때 그리도 괄시를 하더니 이제 깨춤을 추는 처지가 됐으니 이만한 팔자가 어디 있을까.
툭하면 써먹던 오뉴월 개팔자는 도루묵 앞에 이제 전설의 고향이 되어 버렸다.
**겨울비 내리던 날
오전에 그런대로 괜찮던 날씨가 가랑비가 슬슬 내리더니 이내 굵은빗방울이 쏟아졌다.
"참..무슨 겨울날씨가 이모양이람."
비닐을 덮어쓰고 연탄을 집어주던 회장이 입을 내밀었다.
"다음에 하면 안될까요?"
"이봐, 지금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잖아. 저기 잔뜩 쌓인 연탄은 누가 나르고? 시간들이 없을텐데 언제 또 모이나."
회원들은 할 수 없다는 듯 비닐을 뒤집어 쓰고 연탄을 날랐다.
비가 제법 내렸으므로 되도록이면 연탄이 젖지 않도록 날랐지만 그바람에 몸 전체가 검정색 투성이였다.
나는 차에서 여름에 쓰던 밀짚모자를 꺼내와 쓰고 연탄을 날랐는데 비를 피하는데 아주 요긴했다.
비가 내리는데다 바람까지 불어 그야말로 우울모드였지만 모두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 중 몇사람은 넘어져서 들고가던 연탄을 깨트리기도 하고 푹젖은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기도 했다.
"에고..힘들어라. 집에서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아마 마누라에게 상 받았을거야."
농담을 잘하기로 소문난 총무가 연탄이 잔뜩묻은 얼굴을 문지르며 큰소리로 웃자 엉거주춤 연탄을 집어주던 회장이 허풍을 쳤다.
"오늘 저녁은 근사한 곳에서 내가 쏜다. 2차 3차도 다 쏜다."
"근사한데 어디요? 또 닭발 집 가려구요? 이젠 안 당합니다."
여성 회원들이 혓바닥을 내밀자 회장이 나를 보더니 말꼬리를 올렸다.
"어이, 尹형, 어디 괜찮은데 없어?"
'왜요. 그래놓고 또 덤탱이 씌우려구요? 괜찮은데 없습니다."
웃고 떠들다 보니 힘들게 보였던 연탄이 연탄광에 수북하게 쌓였다.
수돗물에 손을 씻고 비닐을 벗어 정리하는데 할머니가 우리를 불렀다.
"저기, 국수를 좀 삶았는데 먹고 가시우."
" 괜찮아요. 모두 밥먹고 왔구요. 집에 가서 먹으면 되요."
사양을 했지만 이미 국수를 삶은 솥이 낡은 마루위에 놓여있었다.
모두들 어떡하나 하는 눈빛으로 회장을 쳐다보았다.
회장은 어르신을 힘들게 할 수 없다며 빨리 내려가라는 눈짓을 했다.
회원 몇 명이 마당을 나서자 할머니가 국자를 들고 가로막았다.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기껏해야 국수인데."
모두 눈치를 보며 서 있는데 내가 얼른 국수그릇을 받아 들었다.
"어 , 얼큰하니 좋네."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수국물을 마시자 그제서야 회원들이 국수그릇을 받아 들었다.
"오, 비내리는 언덕에서 먹는 국수맛이 죽이는구만."
"하여튼 저 인간은 먹는거라면.."
회장이 눈을 희멀그레 치켜 올렸다.
우리들은 겨울비 내리는 좁은 마당에 둘러서서 큰 그릇에 퍼주는 국수를 달게 먹었다.
"참, 2차 3차는 여전히 유효한거지요?"
"국수 배터지게 먹었는데 무신.. 이걸로 그냥 때워."
댓글을 주신분들께 이해를 구합니다.
- ┗
- ★ 미다스 kan7ry
- 2015.12.02 19:08 신고
- 수정/삭제
지금은 옛날 그맛이 않나
입맛도 가버리고 에고에고 ㅎㅎ
모두들 핸드폰으로 밴드나 카 스토리를 하니 이제는 불로그를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네.
너 때문에 엠파스때 블로그에 입문했는데..
12월 한달 잘 보내시게나.
난 여전히 도루묵을 좋아 한다네.
국민학교 시절로 되돌아갑니다.
어쩌면 이리도 감칠맛나게 글을 쓰시는지요!
댕큐입니다
검정 고무신!
참 추억이 많습니다
동네에 나가 뻐길만큼 이뻤지요
나룻배타고 학교 갔다 오는 길 뱃전에 발담그고 장난치다 그만 한짝이 흘러내려가 어린 마음에 강물로 풍덩, 그래도 물살에 흘러가는 슬리퍼를
잡기란 어린 나이에 불가능했지요. 무심히 배를 저어 건너편으로 건너간 어른들이 어찌나 야속턴지
그날밤 엄청나게 서럽게 울었습니다. 오늘 또 추억에 젖어 어린 시절로 돌아가네요
양미리던가요 말린 생선을 머리에 이고 장사를 가곤 했던 친정엄마 생각이 나서 또 눈물 훔치고 갑니다
어디인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추억은 많은시겠어요.
지금 영화의 한 장면같은 생각이 스쳐 갑니다.
비슷한 경험이 많으셔서요.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 말고도 이런저런 장사를 많이 하셨는데 형편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습니다.
프리스틱 슬리퍼 저도 생각 납니다.
다시 와서 찬찬히 볼께요
이렇게 좋은글 올려주심에 감사드려요
얘기가 너무 살갑고, 아름답고, 사람사는 정이 물씬 풍겨집니다.
그리고 단숨에 읽혀지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릴적 얘기들을 소상하게 들려주셔서
그 자리에서 저도 서서 보고 있는듯 했습니다.
전혀 녹슬지 않은 마음으로 기억해 내셔서
저도 기억나는것 무엇 없나 생각해 봤는데,참 편리한 생각으로 살아 왔더라고요.
제게는 지금 부터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그 생각만 하고 살아서
뒤를 별 미련없이 징검다리 건너듯 폴짝 폴짝 뛰어서
내일로만 건너뛰며 살아온것 같더라고요.
물론 제게도 추억은 있지만 무슨 추억이 저를 붙잡고 있는지 멍청해서 생각이 잘 안납니다.
항상 비우고 살아서 무엇을 남겨두지 않아서 멍하다면 이해를 못하시겠지만 저는 그러고 삽니다.
저를 괴롭히는일도, 스스로를 고문하듯 달굼질을 하는일도 없이 (젊어서는그러고 살았지요)
빈머리로 멍청하게 사는것이 습관이 되어서요.
발바닥과 발등이 금새 시커멓게 되곤 했지요.
어릴 적 기억에 어머니는 굉장히 자식들에게 엄격했는데
필요 이상의 매를 심하게 때려서 제가 어디서 줏어온 자식은 아닐가 의심 속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무신을 엿바꿔 먹을 발상은 아예 하지를 못했지요.
강원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산이니까 동네 시장에 가면 으즈음에는 양미리와 도루묵이 지천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요즘 제철이라는 멸치횟감도 오천원 주면 한 보따리나 주지요.
이래서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못가는 모양입니다.
,
그런생각은 저도 했지요.
엣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매를 자주 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지금같았으면 모두 자녀 학대죄로 고발을 당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도 별 탈 없이 잘 자란 걸 보면 시대마다 사는 방식이 달랐던거지요.
부산에 도루묵이 지천인가 봅니다.
이곳만 해도 내륙이라 그리 흔하게 보이지 않고 가격도 쎈편입니다.
동해안에 나가도 잠깐의 철 말고는 결코 헐 한 가격이 아니어서 선듯 손이가지 않습니다.
본래 비싸야 맛이 좋지 않습니까.
멸치횟감이 오천원에 한보따리라니 구미가 아주 동합니다.
이번에 고향에서 행사가 있어 다녀왔는데 저의 그 '시오리길'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측정해 봤더니 2킬로미터가 조금 덜 되었습니다.
그런 길을 아득하게 걸어다녔으니 온갖 짓을 다 하며 걸었겠지만 배도 고프고 하니 힘든 것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요, 온갖 일이 다 있었지요. 충주(충주였군요! 전 또 문경인줄로만 알았지요)나 상주나......
그렇긴 하지만 멀쩡한 고무신으로 엿을 바꾸었다니, 그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전 또 어리셨을 때도 당연히 품행상 감이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도루묵 숫놈이 표가 나지 않는군요. 알배기는 척 보면 다 알 것 같은데, 그게 아니군요.
여기서는 춘천만 가도 그런 종류는 제대로 된 걸 사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냅니다.
"괜찮은 데 없습니다."
그 대답은 명답입니다.
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네요? 그 할머니댁 국수를 먹었으니 "괜찮은 데 따로 없는 것"이 됐고, 회장은 회장대로 생색 다 냈고......
어렴풋한 옛 기억을 살려내 글을 쓰려니 어렵습니다.
시오로리면 제 생각으로는 6km가 된다고 보는데 ..제가 뭘 착각하고 있는건지.
해서 검색을 다시 해보니 十五里...십리에 오리를 더한거리 로 나오네요.
당시 그거리면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지요.
친구들 중에는 이십리가 넘는 거리에서 학교에 나오는 아이도 있었지요.
그러다보니 날씨가 좀 시원찮으면 등교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아이는 6학년때 몇 달만 다니고도 졸업장을 받았지요.
제가 살던 충주 달천의 만적리라는 동네엔 엿장수 말고도 나이롱과자( 그기억밖에는 안 납니다) 를 파는 아저씨가 가끔 왔는데 신발은 물론 각종 쇠붙이를
몰래 가져다가 바꾸어 먹는일이 많았어요.
품행상은 그만두고 두들겨 맞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ㅎㅎ~
어쩌다 가뭄에 콩나기 식으로 봉사활동을 나가는데 처음과 달리 갖은 핑계를 대며 활동 인원이 자꾸만 줄어듭니다.
살기가 힘드는거지요.
도루묵은 연탄불(드럼통) 위에 석쇠를 얹고 그위에 도루묵 대여섯 마리 올리고 굵은 소금을 탁탁 뿌려가며 구워
즉석에서 먹어야 담백하면서 고소한 제맛이 나지 않았던가 새록새록 합니다
돌아보는 그 시절이 결코 달콤하지는 않았을진데 추억을 떠올리는 님의 글은 달달합니다
왜일까요.. 그시절 너머를 함께 공유한 이유를 부침해볼까요 ㅎ
이렇게 장문의 글줄 보기가 쉽지 않은 블~..
한때는 섬 역시 오지게 풀어내던 시절이 있었던지라 빙그레 웃습니다만^^:
참 순수하신 분을 뵙게 되는구나 합니다
가끔 들러 인사 여쭙겠습니다
검정고무신
그리고 옛 기억속의 테마의 글들
자주 읽고 보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동지를 만난듯하여
속으로 어머나 어쩜 어머머 세상에 ... 하며 웃어봅니다
많지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 기억속에 꽃처럼 피는 추억들이요
소중안 인연같습니다
60세 회갑 기념으로라도 뭔가 이름 하나 작게나마 남겨야지 않을까 ?
그런 의도에서 60 편의 소재를 찾았었고
깊게는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60 송이의 기억의 꽃을 더듬어 써놓은 초고가 있는데
그 소 제목들이 열무김치님과 많이 닮았습니다
(지금이야 시중에 그런 내용의 책들이 이미 많이 나와있기는 하지만 ...이제 70 칠순 기념으로라도 꼭 책을 만들어볼까 생각 중인데 도대체가 문장도 그렇거니와 배움이 부족해서 영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오래전입니다만 그 원고를 들고 어느 출판사를 찾아갔는데 마침 필요한 소재라면서 내용만 빌리고(물론 수정을 맛깔나게 하겠지만), 저자는 인기있는 작가를 저자로 하고...글 도움주신 분으로 내 이름을 쓰면 어떻겠냐고 ... ) 그래서 원고를 다시 들고 온적이 있습니다
하이고 점심시간이 되었네요
식사부터 하십시다 ㅎㅎ [비밀댓글]
감동하며 푹 빠져서 읽고 갑니다.
이 재미난 글을 읽다가 일어나고
또 처음부터 읽다가 일어나고
열차타고 버스 타고 이동하며 읽다가 전화 받고
문자 답하고 ㅎㅎㅎㅎ
이제야 커피 한잔이 식도록 뉍두고 다 읽었씁니다 ㅎ
오늘 이곳에 5일장입니다
오후에 틈사이 시간 생기면 재례시장 나가서 도루묵 한 삽 퍼 와야 겠어요
이 곳은 아직 싸던데요 ㅎ
검정 고무신 말고 하얀 백고무신 여러컬래 신발장에 모셔두고 몇 년이 흐르네요
저 백고무신을 언제나 신을려는지 모르지만
지난번 이사 할대 버릴까 하고 들여다 보니 아직도 낡지 않고 빳빳 했습니다 ㅎ
이 글 읽으니 지금에라도 엿 바꿔 주는데 있으면 들고 가고 싶네요 ㅎㅎ
모처럼 유년시절 옛 얘기로 잼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