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어디선가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이내 끼익 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노인은 기차를 타고갈 때 나는 그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을음을 뒤집어 쓴 벽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미 깨었던지라 아까부터 무심하게 돌아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윗목에 신문으로 덮어 두었던 국수그릇을 당겨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자 이내 한기가 몰려왔다.
어제저녁 입안이 깔깔하여 몇 술 뜨지 못하고 밤참거리로 가져온 국수는 반 그릇이 한 그릇으로 불어 있었다.
아무래도 간장을 좀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 방바닥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 노인이 국수 그릇을 들고 발바닥을 끌며 부엌으로 나갔다.
난방이 되지않는 부엌은 며칠간 날씨가 지정거린 탓인지 음습한 냉기가 감돌았다.
대강의 손끝으로 간장그릇을 찾아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는 어림잡아 한 숟가락을 떠 넣었다.
한 숟가락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동이 틀때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오려고 손으로 벽을 잡자 발끝이 둔탁해지더니 이내 구부정한 몸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질펀한 국수국물이 얼굴에 척 감기자 이내 전등불이 켜졌다.
"또, 왜 그래요. 아침까지 쥐죽은 듯이 자라고 했잖아요.지겨워 정말."
기석이 무릎을 꿇고 바닥을 대충 훔쳐내자 노인이 엉거주춤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을 가르는 짜증섞인 소프라노음이 방문을 따라 들어가기 바쁘게 전등불도 이내 꺼졌다.
"오늘 늦어요.찾아 먹고 덮어 놓으라구요."
삐끔이 열린 방문틈으로 부시시한 머리카락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닫쳤다.
새벽까지 미지근하던 방바닥이 두껍게 깐 요 밑으로 자꾸만 기어들어왔다.
노인은 벽시계가 적어도 30분은 늦을거라고 생각했다.
배불뚝이 텔레비젼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요 밑에 쑤셔넣은 게 효자손이라 걸 알았다.
꿈속에서도 온 몸을 쑤석거리는 통증에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할멈을 불렀는데 할멈은 한군데만 계속 주무르고 있었다.
융통성이 전혀없는 할멈이니 돌아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돌아 누워도 할멈은 계속 그곳만 주무르고 있었다.
에잇, 효자손이 더 낫지. 인정머리 없는 할멈하고는..
요밑에 깔린 효자손을 꺼낸 노인이 그것을 들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다 보았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들어서자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비릿한 약냄새가 풍겼지만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 힘으로는 어차피 닫지도 못 할 창문이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변기에 걸터앉은지 한참동안 확성기 소리가 서너 번 요란하게 지났다.
문틈이 맑지 못한 걸로 보아 바깥날씨는 보나마나였다.
꾸둑하니 마른 명태를 몇 두름 사고싶다고 생각했다. 명태장수가 부르는대로 값을 주리라.
빨랫줄에 몇 코 씩 달아매고 싸 한 가슴으로 욕심없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재작년 봄이었나, 복사꽃이 그믐달처럼 내려앉을 때 가슴에 응얼진 세월이나 삭여 보겠노라 이층 계단을 내려간게 끝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면 딸래미 가자고 했을 때 못이기는 체 따라나서야 했다.
변기에 걸친 엉덩이가 지릿하니 감각이 둔해지자 몇 번을 들썩거려 보았지만 시원치 않았다.
그 영감, 잘 갔는지 몰라.
몇 해전, 날 찾아 왔을때 지자식 자랑 엄청 하더니 곱게나 갔는지 모르지.
메주틀 같은 창문으로 손바닥 만한 하늘이 빼꼼이 얼굴을 들여밀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앉아 하늘을 볼 수 있다니 살아있는 게 분명한거지.
노인이 쿡쿡거리며 웃자 그제서야 엄지손가락 만 한 변덩어리가 빠져 나왔다.
가스불을 켰지만 잠깐 불이 붙었을 뿐 이내 꺼졌다.
신 김치를 넣고 끓인 청국장에 밥 한 덩이를 놓고 숟가락으로 으깼지만 쉬 풀어지지 않았다.
모내기가 끝나고 유월 냇가에서 천렵을 할때는 얼큰하니 장 풀어서 끓여낸 민물고기 매운탕을 동네에서도 알아 주었는데.
과수원집 일순이가 그거 하나만 믿고 시집온다 했을 때 못이기는 체 들어주었어야 했다.
사주가 좋지 않다는 서당훈장의 말 따위는 개 방귀만큼 여겼어야 했는데.
늦팔자가 늘어질거라던 각시는 각다귀처럼 모질게도 붙어 살더니 갈때는 소리도 없이 가버렸다.
내 그 서당 훈장 놈을 저승에서 만나면 반드시 요절을 내리라.
텔레비젼의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웃기만 했다.
이봐, 나를 좀 보고 웃으라구.이보게 나를 좀 보라니까.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본지 오래라고 생각했다.
아내도 무뚝뚝했지만 심성은 살가운 여자였다.
없는 살림에 그만하면 감지덕지였다.
남쪽에 살고있는 딸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여자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지만 아무래도 딸자식 보다는 나이가 한참이나 어렸다.
등을 잔뜩 구부리고 누워 창문쪽을 바라보자 이내 후두둑 거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진작에 외워버린 네모 무늬가 서른 여덟개인 천장은 숫자를 더 늘리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에 쥐가 우루루 다녔으면 좋으련만.
노인은 옛 초가집, 흙으로 고무를 대고 마분지로 대충 발라부쳤던 거무튀튀한 천장을 떠올렸다.
한밤중 쥐들이 몰려와 운동장처럼 뛰어 다녀도 자장가처럼 듣고 자던때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쥐를 한 번 만나서 따져보리라.
황토흙에 짚을 썰어넣고 척척 이겨서 물샐틈 없이 천장벽을 발랐는데 굳이나 그걸 뚫고 들어온 이유가 뭐냐.
먹을것도 없을텐데.
사람곁에 모질게 붙어 살면서 걔들도 그것이 천직인 걸 알았겠다.
지금이이라도 올 수 있으면 오려마.
벽에 구멍을 뚫어 놓으면 올지도 몰라.
노인은 아까부터 계속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눈이 아프진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인생 삽시다. 천년 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혜숙이 집을 나간지 넉달이 지나자 노인의 화장실출입이 줄어들었다.
김밥이나 만두 등을 들여밀고 방안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잠깐이었다.
문틈으로 고약한 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술에 쪄들어 들어오는 기석은 자신의 술기운 탓이라고 여겼다.
동생 기태와 기숙이가 찾아와 한바탕 삿대질에 멱살놀음을 하고나서 더 심해졌다.
"형수는 마트일을 종일 한답디까? 도데체 어디를 갔는데 코빼기도 안보여요? 형은 쉬는날도 없이 강의해요?"
"야, 네가 강사월급이 얼만줄이나 알고 지꺼리는거냐? 네 형수 욕할 거 없어. 그만큼이나 모셨으면 되는거지."
그럴거면 모시고 가라는 말에 남매는 씩씩대다가 돌아갔다.
기석이 아침 저녁으로 방문을 열고 짧게 들여다 보았지만 시장에서 사다 준 빵이나 김밥은 윗목에 그대로 있었다.
"왜 제 속을 썩여요.먹어야 살 거 아니예요. 정말 못 살겠어요.
젊은놈이 살아야 하잖아요. 아버지, 아버지."
기석이 이불을 걷어 제치고 노인을 일으켰지만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술기운이 역력한 기석이 방문을 닫고 나오자 이내 적막이 몰려왔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더니 아주 좋은 냄새가 풍겨나왔다.
굳이나 눈을 뜨지 않아도 좋았다.
아내가 차려온 밥상에는 양념을 벌겋게 발라 알맞게 구어낸 꾸둑한 명태가 놓여 있었다.
아내는 아주 신이 난 말투였다.
"재수가 엄청 좋네. 내 바느질 솜씨를 이제야 안거지. 내가 일감을 다 몰아 왔다니까.'
문중땅이 팔려 돈 푼 깨나 얻을수 있게 됐다며 말했을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명태구이를 한 입 베어물자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이놈을 떼어다가 봉긋한 손자입에 넣어주어야 되는건데 아무래도 조상 얼굴을 제대로 볼까 싶었다.
대신,내 오늘밤은 저 여편네의 펑퍼짐한 엉덩짝을 정성껏 문질러 주리라.
오늘따라 아내의 표정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밥상머리에 아내를 끌어 앉치고 슬며시 손목을 잡았다.
"아이, 왜그래 이양반이.."
손목을 빼고 일어서는 아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소나기가 올 것 같어. 빨리 비설겆이 해야지."
아내가 방문을 닫고 나가기 바쁘게 방안이 시커멓게 어두워지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졌다.
"여보, 여보...기석이 어머이요. 뭐가 그리도 급해서 나가는거요. 비 그치거든 나가라구."
희미하게 비치는 창가로 부드러운, 아주 나긋한 바람이 두손을 흔드는 노인의 머리를 깜싸안았다.
현관문을 열때만 해도 별스런 냄새는 나지 않았는데 거실문을 열자 이내 굽굽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기석이 일주일간 가방에 쑤셔넣었던 빨래감을 꺼내 세탁기에 넣고 거실로 나오자 한기가 밀려왔다.
거실바닥이 냉골인걸로 보아 보일러가 꺼져 있는 게 분명했다.
이웃 아주머니에게 나가있는 동안 몇 번 들여다 보라고 당부를 했건만.
"아버지, 춥지 않으셨어요? 아주머니한테 말을 좀 하시지.
노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김밥과 빵은 신문지로 덮인채 푸르덩덩하니 윗목에 놓여 있었다.
가슴에 두손을 모아서 얹은 노인이 천장을 똑바로 향한 체 두 무릎을 구부리고 누워 있었다.
텔레비젼은 소리가 나지않게 켜져 있었지만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가슴에 모은 손을 잡자 깍지 낀 손이 딱딱하게 굳어져 풀리지 않았다.
기석이 급하게 이불을 걷어 젖히자 축축하게 젖은 요 밑에서 악취가 풍겨나왔다.
* 2009년
저는 넘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열무김치선생님은 시도 쓰시고 단편소설도 쓰시고
수필도 쓰시고
완전 작가님이신걸요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읽어내려갔습니다
요즘세태의 노인문제화의 이슈처럼 ...
그리고 섬은 가까히 외롭게 차츰 더 많아질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습작을 하시느라 블로그도 쉬시고요
좋습니다
다 읽고 나니 한숨이 납니다.
추운 날씨 탓일 수도 있고
이야기 속의 내용이 우리 이웃들의 낮설지 않은 모습이어서겠지요.
다 읽고, 푸르니에의 '섬'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이 급변하는 것 같은데, 텔레비전을 보면 '아직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싶을 때가 있고, '이렇게 작은 나라에 별별 사람이 다 있구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수십 년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이런 소설을 읽어도 삶이란 게 뭔가 싶어집니다.
오늘 이생진 시인의 블로그에서 이런 시를 봤습니다.
섬사람들 1
-金大中과 金泳三
섬!
섬 아닌 사람이 있으랴 만
모든 사람은
섬에서 태어나 섬처럼 살다 섬으로 간다
그게 섬의 이치요 고독의 원리다
화성도 섬이고
금성도 섬이다
하의도도 섬이고
여의도도 섬이다
거제도도 섬이고
상도동도 섬이다
하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은 진짜 섬사람들이다
그들은 가고 섬만 남았다 (2015.11.16)
서글프고 우울한 생각이 듭니다.
불 켜진 현관을 들어서며 행복하단 생각을 가끔 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삶이 참으로 고마워 이젠 옆지기에게 자주 표현을 하게 됩니다.
나이든 탓이겠지요. ^^*
일기는 참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나의 재산 같은 생각이 새삼 드는군요.
첫겨울 추위에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보는 느낌이네요.
편안하고 좋은 날 되시고 늘 건필 하세요.
시간이 되시면 참석하셔서 문인들과 인사를
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카페의 공지글을 보시면 장소와 시간을 안내해
줄겁니다.
한번 뵙고 싶습니다.
예람 김미옥시인이 사무국장으로 잘 안내해
주실겁니다.
편안한 휴일 되세요.
집으로 귀가 하니 아무도 없는 적막 같은 그 많은 사람들중에 혼자인 듯 훈기라고 없는 방에 돌아 온듯 한 이야기입니다.
이 긴 글을 쓰실만큼 단단한 사고를 하시는 분이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밖에 나갔더니 바람도 불지 않고 포근한 날씨였습니다.
구름 사이로 해님도 보이고요.
열무김치 님의 가정에도 고운 햇살이 비치고
남은 주말도 편안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하게 안읽혀서 댓글을 못달고 ,한참 지나고 나서
다시 들어 왔는데,처음보다 덜하지 않고 여전히
나이가 들고 빈곤하다는것은 여전히 외롭고 두렵습니다.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소설 쓰시는 분들은 대단하신것 같아요.
경청하겠습니다.
제목처럼 줄거리가 고독하기도 하고
노인들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해 보게 되는 글이어서 생각이 깊어 지네요
그리고 꼭 가진것이 없어서가 아니더라도 하나의 고립된 섬으로 소외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의 노후가
느껴져서 쓸쓸한 생각이 젖어 드는것 같습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초겨울 추위에 건강 조심 하시구요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제가 감상적이 된 것인지
때로는 오디션에 나온 가수가 노래 부르는 것만 들어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문단에 데뷔를 하시라고 강권합니다
영화한편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