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어떻게 해야 둥글게 될까.
필자는 교육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교육분야에 몸을 담아 오랜세월 경험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경험이 있다면 시골에서 오랜간 교회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 가깝게 지낸게 유일하다.
학교 교육과 교회학교 교육의 차이라면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는 차이일 뿐 다른것은 대동소이했다는 생각이다.
음악이나 미술,체육,글 쓰기 등 방과후 활동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고 본인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전문 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이 보는 입장에서 어땠을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주로 아이들을 야외로 데리고 다녔고, 산과 들의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글을 쓰게 했다.
체육활동 역시, 뒷동산을 오르거나 신작로에서 공을 차거나 달리기등을 하는 아주 초보적인 것이었다.
성탄절무렵이면 아이들을 불러모아 한 달 가까이 연극과 합창 연습을 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발표회를 열곤 했는데, 아이들도 참으로 열성적이었고, 부모님들 역시 발표회를 보기위해 평소 교회를 다니지 않았음에도 그날 만큼은 많이 참석해 주었다.
그때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과 글들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어 어쩌다 그들을 만나면 건네 주는데, 이를 받아 든 본인은 마치 무슨 보물을 얻은 양 기뻐하는 모습에 감회가 새롭다.
세월이 적잖이 흘렀으니 전만큼은 아니지만 전화를 걸어오거나 요즘 유행하는 카톡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다.
그들을 만나면 얘깃거리가 많다.
그것은 그들에게 어린날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추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고 서먹했던 세월의 공백을 단시간에 메워준다.
그리고 제일 고마운 건,그들이 평범하지만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점이다.
특별한 사람이 되었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거나 , 사회적으로 출세하여 보란듯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아직까지 큰 잡음없이 살아가고 있음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1977년 여름, 아이들과 함께.(필자: 맨 윗쪽의 팔을 목에 댄 사람)
이제 시골엔 초등학교가 폐교를 염려할 만큼 아이들이 없다.
불과 30여 년이 흐르면서 시골의 풍경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동안 결혼을 한다고 하여 찾아가 보기도 했고, 반갑게 연락을 해오는 아이들도 있어서 그럴때마다 정말 기쁘다.
눈망울 초롱하던 저 아이들은 지금도 어느 하늘아래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것이다.
이 사진을 보기나 하려는지 모르겠다.
산골에서 농사를 지을때 남매와 함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여러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을것이다.
먹고,자고, 입는등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원만한 대인관계,사회인으로서의 책무나 권리,가치있는 삶의 바탕을 이루기 위한 직업활동을 통한 행복 구권 등,
우리의 의지만으로론 해결되지 않는,사람으로 태어나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날때까지 끊임없는 生의 요구를 받아 들여야 한다.
인간 스스로 사회적 동물이 된 이 후, 默示的 으로 정해놓은 일정의 上限線에 가기위해 우리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라는 틀을 선택했다.
敎育의 최후 목표는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며, 결국 사람으로 인해 음 양의 열매가 맺어지는 세월과의 鬪爭이다.
가치있는 삶의 지침을 습득했다고 해도 후일 개개인의 결과가 일정하지 않음은, 명쾌하게 설명되어지지 않는 宿命의 함수관계가 어느정도 끼여 있음을 우리들은 경험으로 안다.교육의 추 를 달아야 하는 우리들 시선이 출세와 부,입신양명쪽만 달다보니 개인의 타고난 운명적인 기질조차도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음에도 오늘의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쉼 없는 반복에도 불구하고 기차 레일처럼 평행을 이루어가야 하는 양면성을 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평행을 이루지 못한 바 탈선을 거듭하고, 소 잃고 외양간을 수없이 고쳤어도 여전히 외양간에는 튼실한 소가 살지 못한다.
가을 들판에서
시골에서 농사를 하며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다.
좋게 얘기하면, 젊은 나이에 가정을 이루어 일찌기 아이를 낳아 기르고 교육 시켰으니 남들보다 앞서간 셈이어서 매도 먼저맞은 놈이 나은꼴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한 가정을 책임지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덜컥 장가를 가고 아이들을 낳은 용감함은 무책임과 무지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흉악한 산골생활은 선택권이 거의 없어서 아이들을 가진 부모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실상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산과 들판으로 뛰어 다니며 제멋대로 자랐다.
나와 아내 역시 어른이라는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돌아 다녔다.
당시 농사 짬짬이 아이들과 함께 다니며 한 일들을 더듬어 보니 대충 이랬다.
시냇가에 나가 물고기 잡기, 매미나 잠자리 잡으로 다니기, 산이나 들에서 숨바꼭질 하기, 가을 논에서 메뚜기 잡기,감자나 고구마 캐기,겨울철 눈사람 만들기...
특히 아이들이 매일같이 하는게 있었는데, 개울가에 나가 작대기에 짧은 낚시줄을 매달아 바위밑에 넣고 고기를 잡는 일이었다.
두엄터미에서 잡은 지렁이를 낚시바늘에 미끼로 매달아 바위밑에 넣고 남매는 끈지질기게 기다렸다.
해가 어둑해지면 아이들은 바가지에 송사리나, 꺽지, 퉁가리 몇마리를 잡아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곤 했다.
잡아온 물고기를 세숫대야에 담아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고양이들이 대부분 훔쳐가고 한 두마리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눈물을 짜며 울다가 그날 오후에 다시 물고기를 잡아오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아이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과후면 여전히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제멋대로 뛰어 놀았다.
미련한 엄마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또다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설령 그런생각을 했다고 해도 주변엔 과외공부를 시키거나 재능교육을 시킬만한 사설기관이나 개인지도자가 없었기에 부모 머리가 좀 트였다고 해도 별 방법은 없었다.
실컷 놀다가 어둑해서야 들어와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를 할때 옆에서 거들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건 아니어서, 학교 공부만 하고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않고 학년 수 올라가는것만 지켜 보아도 되는가 하는 걱정은 있었다.
농사를 접고 도회지로 나올때까지 아이들의 생활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사실 도회지로 나온것도 아이들 교육을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가 아니라 농사를 지어서 미래를 담보 할 수 없다는 미숙한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축산과 복합영농을 시도 했지만 정부정책으로 시행된 축산에서 큰 손해를 보았고, 고랭지 야채농사도 해를 걸러가며 가격파동이 이는 바람에
도무지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한 해 농사재미를 보면 그 이듬해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왕왕한 널뛰기 농사는 그때라고 다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고 부치던 전답을 뒤로하고 무작정 도회지로 나왔다.
도회지로 나와 먹고사는일에 매달리면서도 가장 걱정이 되었던것은 아이들이 도회지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고 잘 어울리며 공부를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학교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들판을 뛰어 다니며 놀다가 초등과정을 거의 마친 상황이어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였다.
하지만 남매는 우리의 염려와는 다르게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했고 모나지 않게 친구들과 어울렸다.
가장 고마운 건, 부모님을 모시고 도회지 생활에 정착 하느라 나와 아내가 아이들에게 큰 신경을 쓰지 못했음에도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충실 했다는점이다.
고등학교에 진학 후, 대학진학을 위해 고된 방과후 학습을 하면서도 아이들은 큰 동요없이 학업에 매진했고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무난하게 들어갔다.
그동안 나와 아내가 해준 건, 부지런히 도시락을 싸다가 주고, 밤늦게 귀가하는 아이들을 학교앞에서 기다렸다가 데리고오는 일이었다.
내가 특별하게 해준게 있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차안에서 음악을 들려 주었다는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좋아서 한 일이라 아이들이 그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위로가 됐는지,음악을 틀어주니 마지못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하라든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던것은 아이들에게 해준게 별로 없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그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 요즘 부모들의 입장에서 보면 앞뒤가 꽉 막힌 숙맥이었다.
아내와 나는 직장일이 끝나면 부모님 상 차려 드리기 바쁘게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로 갔고, 아이들의 수업이 끝날때까지 차안에서 졸며 기다렸다.
당시엔 빡빡하기만 했던 다람쥐 쳇바퀴 같은 4년여 생활은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행복했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을 픽업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뭔가 부모노릇을 하고 있다는것을 어렴풋이라도 느끼는 때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아이들이 집을 떠나면서 사실상 아이들과의 동거생활은 막을 내렸다.
나와 아내는 시원찮은 수입에 아이들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느라 오랜세월을 허덕여야했다.
아이들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바쁘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방학때면 집으로 돌아와 내가 하는 일을 거들었다.
음료 도매업을 하면서 행복했던것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함께 일도 하고 밥을 먹는 즐거움이었다.
아이들은 나의 처지를 잘 아는지라 아무 말없이 일을 거들었고 방학기간은 생각보다 짧게 지나갔다.
수화기 너머로 아이들의 음성을 듣는날이 많아졌다. 여전하게 아이들은 사회생활에 바쁘고 나는 점점 일이 줄어져 간다.
잠자리 잡고 물고기를 쫓던 아이들은 이제 부모곁을 떠나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제맡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덧 나는 남매의 전화를 기다리거나 가끔씩 아이들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 처지가 되었다.
시골에서 뛰어놀던 철없던 어린시절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추억을 남겨주었다는 자화자찬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 산과 들, 마을앞을 흐르는 개울, 물고기, 잠자리,야생화, 하늘, 구름은 부모보다 더 좋은 가정교사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모나지 않게 자라 어느정도 바라는대로 갔으니 해보는 말이 아니다.
딱히 꼬집어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도 수십년 세월이 흐르면서 은연중 우러나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보란듯이 살아야 성공한 삶은 아니잖는가.
그런데 우리들은 사회적인 신분상승이나 경제적인 사다리가 놓이지 않으면 말은 그럴듯 하게 하면서도 성공한 삶으로 쳐주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 주지않고, 사회인으로서 상식적인 삶을 살아 간다면, 욕심을 조금 내어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만한 위치가 되어 있다면,
위 아래를 알아보는 마음과 눈을 가지고 있어서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성공한 삶인데도 말이다.
이런 것 따위는 좋은 직장을 갖거나 경제적으로 성공하는데 별 소용이 없는, 그저 하기좋고 듣기좋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이런 감성적인 마인드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면 이런 논조의 말은 한쪽귀로 듣고 다른귀로 흘려버릴 하찮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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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콩나물 시루 같았던 초등학교 교실은 한 학급에 대여섯명이 앉아서 공부를 할 만큼 학생수가 줄었고
웬만한 시골 학교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서 폐교를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교육 현실은 편하지 못하다. 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고, 그 과정을 뚫고 사회에 나와도 시원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 한 번, 꽃 한 번 제대로 보지않고 공부에만 매달리다 닫힌 가슴으로 내딯은 사회의 첫발은 시작부터 곤고하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어른이 되기까지 짧지않은 세월이 걸린다. 과거 밥을 제대로 먹는게 큰 과제였다면 먹는게 어느정도 해결 된 작금엔
자신을 가꾸고 상품화 해야 살아갈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을 맞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 옹아리를 벗어 날 나이가 되기 무섭게 자신의 키만한 가방을 지고 학원으로 가야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은 과연
무엇일까, 한편 안타까워 하면서도 시류를 거부하지 못하는 이땅의 부모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맑고 날카로운 음을 내는 디지털 문명이 맺고 끊음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어릴때부터 경쟁을 키워 온 아이들의 머리는 명석하고 영리하지만 주변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은 CD음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음처럼 차고 냉정하다.
이시대가 낳은 수많은 교육의 시행착오를 보고 겪으면서도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하게 닫혀있다.
아이들은 마음에 커다란 납덩이를 달고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다 스스로 생을 포기 하기도 하고 부모와 사회에 거침없는 반항의 흔적들을 쏟아낸다.
교육에 관한 임기응변식의 처방을 내리고 서로 다투는 동안 너무도 많은것들을 잃어 버렸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돈 많이 버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곁가지들을 잘라버렸다.
그 복판에는 자기 자식에게만은 자기처럼 살지않게 하겠다고 욕심을 부린 부모들이 버티고 있다.
지친 아이들이 손길을 내밀어도 주변을 의식해 쉬 잡아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여간해서는 마음을 열지않는 차고 냉정한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엄청난 사회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작금의 교육의 부작용은 우리 스스로 초래한 일이다.
가르치는 일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고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자위하며 요란한 파열음만 낸다.
지금 우리들의 교육 현실이다.
초등학교 시절만이라도 마음껏 뛰어놀게 하자.
꽃, 하늘 ,바람, 시냇가, 들판의 곡식들, 나무, 산새들의 지저귐,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심고 캐는 즐거움 등..
적어도 이때만이라도 내버려 두자.
분명 현실성 없는 꿈같은 이야기라고 단박에 질책이 올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수많은 문제들을 풀 시원한 해답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우리들을 옭아매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부담스러운 무거운 책가방만 들려주어서 지금 얻어진게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의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만 아는 차고 냉정한, 마치 기계같은 인간이라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성과 감정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시대를 잘 못 만나서 그리 됐다고 둘러댈 수 있을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무감각하거나 태연한것은 반드시 아이들의 책임만은 아니다.
우리들의 가정과 우리들의 교육이 그렇게 만들었다.
높은 교육열 때문에 그나마 밥술이라도 먹고 산다는 이야기는 앞으로 다시 치루어야 할 사회적 기회비용에 견주어 너무 가볍다.
너무 멀리 와버렸지만 지금이라도 기본으로 가는게 숙제를 풀 수 있는 키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복잡한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적어도 가슴이 있는 아이들이 경쟁을 한다면 이렇게 암울하고 힘들진 않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높낮이를 잴 줄 아는 폭넓은 사고를 하게 될테니 말이다.
타인을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사고력을 담는 가슴은 인위적인 교육으로는 절대로 채워줄 수 없다.
부모와 교사가 아닌, 하늘 , 꽃, 바람, 나무, 산새들이 가르쳐 줄 몫이다.
교육에 관한 숱한 문제 제기와 처방이 나왔음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곤고하고 청소년의 사회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니 해보는 소리다.
짠-하고 외치면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짠-하고 외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짠-하고 외쳐보자.
하루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하루가 밝게 다가올 것이다.
언제나 좋은 시간 속에 님이되시고 기쁘고
뜻깊은 하루 되시기를 빕니다.-불변의흙-
입춘(立春)이여 그 소박한 소원을 담아 /서리꽃피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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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붙이는 기원문은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은 입춘(立春)을 맞이하여 올해의 길운(吉運)을 기원하는 의미를, 건양다경(建陽多慶)은 좋은일,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춘시(立春時)에 맞춰 대문에 붙여야만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올해 24절기에 의하면 2015년의 입춘시는 4일 낮 12시 58분이다. (24절기 가운데 첫번째 절기인 년 중 봄이 시작하는 날로서 입춘굿, 입춘첩, 맥근점)
예부터 입춘날에는 다양한 세시풍속이 전해져 오는데, 그 중에서도 ‘입춘축’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일이 중요시된다.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번 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부터 입춘이면 가정의 화목을 위해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과 같은 입춘축을 붙였다.
이 글귀 말고도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라는 글귀를 붙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입춘축이 존재한다. 정조대부터 순조대까지 입춘축을 모은 책으로 알려진『춘첩자』는 그 분량이 세 권에 달할 정도다.
자주 쓰이는 입춘축은 글자 수가 같은 두개의 문구로 이어진 ‘대구(對句)’ 형식의 것들로, ‘입춘대길 건양다경’도 이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요지일월 순지건곤(요순시대처럼 태평하길 바란다)’, ‘국태민안 가급인족(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해 모든 집이 넉넉하다)’과 같은 대구형 입춘축이 전해오곤 한다.
옛 조상들에게는 추위를 견디며 돋아난 햇나물을 이용해 전통음식을 챙겨 먹는 풍습이 존재했다.
조상들은 주로 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인 ‘오신채’와 ‘명태 순대’를 즐겨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입춘에 먹는 오신채는 자극성이 강하고 매운맛이 나는 움파·산갓·승검초·미나리싹·무싹 총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새봄의 생채 요리다. 오신채는 겨울을 지낸 후 인체의 부족한 비타민C를 공급해준다.
명태 순대는 내장을 빼낸 명태 뱃속에 소를 채워 만든 순대다. 일명 ‘동태 순대’라고도 불린다. 명태 순대에는 비타민A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눈 건강과 피로회복에 도움을 준다. 명태(동태)의 배를 가르지 않고 생선머리를 따서 아가미 쪽으로 손을 넣어 창자를 깨끗이 비워낸다. 이 안에 명태내장·고기·채소·두부 등을 다져 양념한 소를 채워 넣고 입을 오므려 묶은 후 찌거나 구워 먹는다. 돼지 순대와는 달리 선지를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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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에 붙여, 아 정책이여 ! /서리꽃피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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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의 경제정책에 엄청난 실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동산 정상화 대책이 오히려 가계부채를 기하급수적으로 급증시키고 있고 국민들 대다수를 빚의 수렁에 빠져들게 하여 새로운 사회문제를 만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슬픕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계부채를 조장하는 정책을 국토부의 정책행정관료들이 중앙부처에서 초저금리 모기지 정책이나 꺼내들어 부동산정책 전체가 물거품이 되고 전세가격과 월세가역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정부정책이 거꾸로 가는 현실에 각부 장관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국회는 또한 무엇을 하는 자들이며, 부처간 칸막이와 정책 컨트롤 난맥상을 더욱 심층분석하여 정부를 가르켜야 하는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근간을 뒤흔드는 순간의 잘못을 그대로 두고 어떻게 행복국가 소득분배정책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국가조직 사령탑들은 대오각성하여 국민의 생계를 위협하는 모든 분야의 사회안전망을 시급히 서들러야 할 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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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알아서 자라게 어떤 작위도 가하지 말자는 논리였지요.
그 말이 맞는지 어쩐지 모르나 작금의 혼선보다는
그래도 그것이 좀 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볼 때도 있습니다.
위의 두 분의 댓글...
블로그를 몇 년 했기에 어떤 분들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전라도 표현 중에서 '징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참으로 징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열무김치님 부부께서 보여주신 그 생활상입니다.
특히 교회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신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전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와서 보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옮겨다니신 것도 참 다행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그렇게 생활하다가 도시로 나가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 근본을 잃지 않게 되고 잃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그 경험일 것입니다.
차 안에서 음악을 들려주셨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는 평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되돌아보게 되면 그것이, 그 팍팍한 일상이 행복으로 떠오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좀 주제넘고, 직접적이어서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열무김치님께서 실천하신 그 집단교육, 그 가정교육을 그대로 실천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복잡한 사회여서 치열한 경쟁은 숙명"이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지금 진보교육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저도 그 진보진영의 진영논리, 보수진영의 손가락질은 어느 쪽도 결코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보수 쪽의 경쟁 조장은 받아들이기가 정말로 싫고, 진보진영의 경쟁 탈피 경향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경쟁까지 그만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을 조장하는 교육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임기응변식 대처는, 지적하신 바와 같이 결국은 독소가 됩니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리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은 그 잘못된 방향의 대표적인 요소입니다.
정말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냥 감동적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좋은 글을 읽은 값을 치르고 싶어서 몇 자 적었습니다.
늘 건강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참 교육이구나 하늘 걸 느꼈습니다.
그 어떤 교육자 보다 더 열심히 가르치셨고 산교육을 시키신 것 같습니다.
자녀교육을 위해 도회지로 나오시기까지 소신 있는 교육철학에
자녀들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가르침으로 기억을 할 것입니다.
남매의 유년 사진을 보니 제 눈에는 부럽기만 합니다.
저도 교회학교 교사와 사립고 교단에 서본 경험도 있습니다만
살아가는 환경이 다르다 보니 제가 맡았던 학생들을 자유롭게 교육하지는 못했습니다.
제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결코 공부하라고 채근을 한다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늘 꿈꿔왔던 건 열무김치님처럼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듯 하나 질서가 있고
방종인 듯싶으나 엄격한 규율이 있는 그런 지도를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답니다.
이 시대 교육방침도 분명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도 덩달아 바뀌니 걱정 아닌 걱정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이 무언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을 해보게 하는
참 좋은 글에 머물다 갑니다.
편안한 저녁 되십시오^^* [비밀댓글]
- ★ 미다스 kan7ry
- 2015.02.27 12:34 신고
- 수정/삭제 답글
어떤 것도 어떤 장소에서 이뤄지는 것 역시 교육이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 있는 교육에는 조금의 차이가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도 어려서 많이 다녔던 교회를 지금은 안가고 있기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인성교육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수도 없고 가정교육마져도 무너져 내린것 같은
요즘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예전에 포항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3남매를 서울대와 연대를 보내신 분께 아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시켰느냐고 물으니 교육을 따로 시킨적이 없고 아이들 스스로 책을
볼 수 있도록 아이들이 눈길 닿는 곳마다 책을 놓아주고 아이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자주 놀아 준것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얼마전에 어느 교포의 글 속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한국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는 실력이 세계에서 우수하지만 미국의 어느
대학이든 진학을 하면은 보통이거나 아니면 실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도 입시위주의 교육을 개혁해야하고 과외나 방가후 학습 같은 걸 없애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가정교육의 중요성과 인성교육을
제대로 교육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날 되세요.
애들은 놀 방법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 둘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더니 계모가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자매가 같이 공동으로 의견을 내서 창의적으로 잘 놀아서 그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공부 잘한다고 다 행복해지는 것은 아님을 진즉에 깨달았으니 다행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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