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김치 2013. 10. 6. 21:42

보온병을 보고 포탄이라고 했다가  망신살이 뻗친 모 당의 대표였던 사람이 한때 인터넷 공간에서 비아냥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그 끈질긴 비아냥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툭하면 튀어나와 일부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하긴 군대를 갔다왔다 하더라도 포병출신이 아닌이상 포탄을 종류별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게다.

 

고위직에 등용이 되려고만 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중엔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게 군 면제였다.

 

참으로 희한하기도 한것이 일부로 그렇게 짜맞추려 해도 힘든 이 단골메뉴는 아주 일사분란하게 어깨에 힘깨나 준다는 사람들만 쫓아 다녔다.

 

 

1975년 나무를 심기위해 깊은 산속에 들어간 일이 있다.

 

지금이야 강원도 웬만한 산골에도 아스팔트나 시멘트길이 번듯하게 나 있고 인터넷망이 대부분 깔려 있어서 특별히 어려운점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강원도 산골은 그야말로 흉악한 오지였다.

 

요즘,  TV 방송에 세계의 오지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있던데 그걸 보고 있자니 당시의 모습이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화전민들이 즐비했던 당시엔 부동산에 관한 경계의식이 희미해서 그냥 개간해서 내가 농사 짓다가 떠날땐 아무 미련도 없이 가버리면 그만인 아주 마음 편한 때였다.

 

하긴 그 험악한 산골에 공기관에서 나와 조사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먹고살기도 바쁜 때였으니 쫓아 낼 형편도 아니었다.

 

내가 나무를 심기위해 갔을때만 해도 골짝 골짝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오지의 산골마다 초등학교가 몇군데나 있었고 학생수가 1,000여명이 되는곳이 많았으니  학생이 없어 폐교를 당하거나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다. 

 

지금 가보면 그렇게 사람이 많이 살았던 골짝에는 어쩌다 발견되는 집터의 오랜 흔적만 남아있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어느 하늘아래 살고 있는지...이미 세상을 등진 사람도 있으리라.

 

 

나무를 심기위해 싸움 싸움 해가며 화전민들을 내보내야 했는데 그게 간단한게 아니었다.

 

아무리 몇 해 농사를 짓다가 다른곳으로 가버릴 사람들이지만 느닷없이 집을 비운다는게 쉬운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던집에 불을 지르는등의 강력한 저항을 하는 바람에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물론 전년도에 와서 미리 알리긴 했지만  그건 아무런 설득력도 얻지 못했다.

 

그 중, 고령의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이양반이 하도 사정을 하는 바람에 1년만 더 농사를 짓다가 나가기로 합의를 해 주었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나온 나무를 심지 않을 수는 없어서 곡식 씨앗을 넣은 밭에 나무를 함께 심었는데 여름에 비료를 줄 무렵에 가보니 그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옥수수와 콩이나 팥등의 곡물과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등이 함께 자라는 모습이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적과의 동침이었다.

 

그해 여름 비료를 주기위해 산에 갔을때 그 분 댁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주 희한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찌그러진 안방 뒷문을 열고 무심코 내다 본 뒤란엔 무슨 유리병 같은걸로 담을 쌓아 놓은게 보였는데  가만 들여다 보니 모두 소줏병이었다.

 

지금은 2홉 (약360ml)이 많지만 당시엔 4홉,그리고 됫병이 주종이었다.

 

가까이 다가 가 보니 거의 대부분이 1.8L에 해당하는 됫병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됫병은 그리 흔한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됫병으로 담장을 쌓아놓은 것이었다.

 

난 내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소주가 담겼던 됫병이었다.

 

그 이튿날 점심을 먹기위해 산에서 내려 왔는데 주인이 없었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대충 비우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산아래 저 멀리서 주인 인듯한 사람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가까이 오는 걸 자세히 보니 등에 무언가를 잔뜩 지고오고 있었다.

 

면 시장까지 족히 4~5십리는 되는데 이 염천에 저 무거운걸 지고 오다니..

 

"뭘 그렇게 지고 오세요? 날도 더운데.."

 

봉당을 내려서며 물었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던 주인양반은 얼근이 취한 얼굴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 해 줄 반찬도 시원찮고 해서 고등어 마리나 사고, 한동안 마실 술 좀 사가지고 오느라고...에이고, 이제 여길 뜨던가 해야지.."

 

"그럼, 지고 오신게 다 술이란 말이예요?"

 

"그렇다니께."

 

 

 

 

                                                       *(펌)

 

 

난 입을 쩍 벌렸다.

 

지고 온 됫병술이 자그마치 10병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말이지,포알이라고 하는데 이거 얼마 못먹어."

 

"포알이요? 대포에 장전해 쏘는 대포알이란 뜻인가요?"

 

"그와 비슷하게 생긴것도 그렇고 매섭다는 얘기지."

 

난 큰 됫병에 담긴 소주의 양도 겁이 났거니와 그걸 짧은 기간에 다 마신다는 말에 홍겁을 먹었다.

 

"그럼 ,집 뒤란에 병으로 쌓은 담이 다 아저씨가 마신 술병이란 말이예요?"

 

"그럼..여기 나말고 누가 또 있나?. 가끔 다른 사람들이 거들기는 했지만."

 

아니..저 됫병술들을 다 마시고도 멀쩡하단말인가?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세요?"

 

내가 묻자 주인 양반은 담배를 피워 물더니

 

"그럼 하늘만 빤히 보이는 이런 산골짝에서 무슨 낙으로 사나.쐐주나 한 잔 하면서 얼큰히 취하는 맛으로 사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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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골 처가에 갔을때다.

 

새신랑이었을때니 동네 사람들이 그냥두지 않았다.

 

술이 몹시 약한 나는 소주 두 잔 만 먹어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거기에 두 어잔만 더 걸치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의학적으로 보면 알콜 분해요소가 적어서 그렇다는데 그동안 영업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술자리가 많다보니 근간엔 술 양이 제법 늘어나서

 

 모임에 나가면 분위기를 맞추는 정도는 되었다.

 

새신랑 왔다고 술병을 내어 놓는데 술병을 보니 오래전 산골짝에서 만났던 됫병인 포알 이었다.

 

포알 두병을 꺼내 놓았는데 술잔을 보니 작은 유리컵이 아닌 사발이었다.

 

그리고 술안주란게 개울에서 잡아온 개구리 몇마리였다.

 

벌건 숯불에 석쇠를 얹고 개구리를 얹고 소금을 술술 뿌려 구웠다.

 

다른게 없나 싶어 두리번거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 이어 술잔이 돌았는데 사발에 소주를 콸콸 따르더니 내게 권했다.

 

난 소주 사발을 보고 기겁을 했다.

 

손사래를 치며 도망을 갔지만 이내 붙잡혀 왔는데 도저히 그 술을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인데다 분위기가 그게 아니어서 눈 질끈 감고 사발에 가득담긴 소주를 들이켰는데 ...

 

안먹겠다고 뒤로 빼다가 할 수없이 개구리 뒷다리 하나를 받아먹고 이야기 몇마디 나누다가 난 홍알홍알 곯아 떨어졌다.

 

얼마간을 잤는지 일어나 보니 술을 마시던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가고 몇사람이 내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바깥에 나가 토하기 시작 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어제먹은 음식까지 모조리 토해내자 그제서야 속이 좀 편해졌다.

 

방안으로 들어와 어젯밤 먹은 술상을 보니, 먹다남은 소줏병과 시커멓게 탄 개구리가 보였는데,  됫병소주 몇병을 그 알량한 개구리 몇마리를 안주로 모두 마셔버린것이다.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소주를 사발로 마시는 동네 사람들이 정말로 대단해 보였다.

 

아침을 먹으면서 내가 웃었더니 처남이 한다는 말이 그래가지고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느냐고 빈정댔다.

 

난 술 안 먹는 사람이 좋다고 아내가 내편을 들자

 

"술 안 먹는 사람은 좁쌀영감이야. 융통성도 없고.  거,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럼 오빠는 술 많이 마시는데 왜 융통성도 빵점이고 좁쌀 영감이야?"

 

아내가 내편을 들어 주느라 애를 썼다.

 

 

 

술 때문에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버린 사람들도 많다.

 

요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 나면서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술과 담배를 멀리 해야 할 젊은이들이 흡연과 음주를 많이 한다.

 

아침마다 마당과 골목을 청소하는데 술병과 담배꽁초가 보통이 아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젊은이들이 술과 담배를 소비하면서 국가의 세수를 보충해 주고 있는 셈이다.

 

포알이라고 불렸던 됫병은 이제 플라스틱 병으로 바뀌었다.

 

됫병은 담금주용으로 사용이 되고  모임이나 경조사에 가봐도 작은병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도 술 문화가 대인관계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영업전선에 오랜 간 있어보니 이는 떼어낼 수 없는 실과 바늘같은 존재다.

 

잘 풀리지 않는 일도 한 잔의 술로 해결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비록 알콜의 힘을 빌어 한 일이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한 잔의 문화는 국민성과도 연결이 되어 있어서 하루아침에 바뀌어질 문화가 아니다.

 

우리들은 습관처럼 말한다.

 

비 꾸죽꾸죽하게 내리고 바람 썰렁하면 기름내 나는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이나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턱 걸치고 싶다고.

 

우리의 술 소비량이 세계 15위안에 든다는 통계를 보았다.

 

2009년을 기준으로 보면, 20세 이상 80세 미만 성인남녀 인구 3800만명을 기준으로 1인당 약 280ml의 술을 마신걸로 나타 나는데, 이는 통상 200ml인 맥주잔으로 계산하면 하루 한 잔 반 꼴을 마신셈이다.

 

지나친 술소비로 인해 가정이 파탄나고 개인의 건강이 위협 받는건 심각한 일이다.

 

근래엔 술 소비도 현명해 져서 알콜도수가 낮은 과실주나 맥주, 청주등의 소비가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그만큼 술 소비가 현실적으로 바뀌어 간다는 반증이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 삶의 고달픔을 됫병술로 달랬던때가 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포알로 쌓았던 담장을 당시 쌀 두 가마 값으로 샀던 올림푸스 하프사이즈 카메라로 촬영을 했는데 아쉽게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됫병 포알로 쌓았던 담장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술에 관한 아련한 이야기,..
남자들에게 군대 다음으로 재미난
추억이 담겨있더군요...

지금도 술을 무척 즐기는 남편이
신혼여행후 친정집에 갔을때죠.
오빠와 형부들이 반겨 주시며 권한 술때문에
고생한 추억담을 가끔 꺼냅니다.

원래 담근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머리 아프다며)
형님들이 인삼주를 자꾸 주시니
거절 할 수 없어 마신후로
죽을뻔...했다며요^^

지금은 저런 큰소주병은 찾기 힘들더군요...
추억의 소주병을 보니 어릴적 기억도 더듬더듬 해지네요...
예전엔 새신랑 처가에 가면 혼쭐이 났었지요.
아마 지금 그러면 경찰에 신고 할겁니다. ㅎㅎ
담금술이 머리 아픈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그래도 요즘 별의 별 걸 다 넣고 담금주를 만들더군요.
담금주는 여전히 큰 병으로 나오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됫병 소주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술을 전혀 못해 우리집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술 좋아하는 동네 분들 댁엔 어김없이 그 됫병이 있었어요.

술을 아주 못해도, 과해도 안될 것 같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적당히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좋습니다. 결혼할 때 애아빠가 폭음하지 않는 점이 맘에 들었어요. ㅎㅎ

화전민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저 어릴 때만 해도 화전민이 많았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먹기 살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오늘처럼 운치있는 가을밤에 좋은 사람들과 선한 웃음 날리며 술한잔 나누고 싶어집니다. 순전히 열무김치님 글 솜씨 탓입니다.
적당하게 마셔야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문제가 되는군요.
사실 주당들에겐 적당히라는 말이 없다고 그럽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셔도 그게 적당하다고 믿으니까요.
전 술을 많이 못하다보니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면 뒤치닥거리를 많이하는 편입니다.
아까는 오지 않았는데 밖을 보니 비도 내리고,.글에서 소개하신 아이스와인 한 잔 하고싶은데요.
병아리 눈물만큼 든 아이스와인 한병으로 됫병소주 여러 병은 살 수 있을 듯.
소주를 돈 주고 산 적 없어 가격을 모르겠네요. ㅎㅎ
언젠가 축하할 일이 생기면 마실 기회가 생기겠지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열무김치님.
정치인들은 입을 벌리면 거짓말도 많고 사기극같은 일들을 하는 것 같아 실증이 납니다
당파싸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까운 길을 나두고 저 멀리 돌아서 오는 기분입니다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은 정치인들입니다. 자기 익속만 차리는, 아름다운 정치인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지 이야기는 열무김치님의 토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생활이 다르다 보니 소재를 찾아내는데는 주변에 겪었던 주위환경이 제일 좋은 것이지요
얼마전 추석전에 사촌형님이 술을 너무 즐기다 일찍 작고 하였지요
총각선생 때부터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니 많이도 드셨지요
됫병을 사놓고 먹는데 큰어머니와 먹기 시작하면 됫병이 하루저녁에 없어지지요
새신랑 때 달려도 보았겠습니다. 심하게 발바닥을 때리는 것을 어린시절에 처가에 와서 혼나고 간 신랑들이 많지요 ㅎ
글에 여러가지 일들을 조목조목 잘 쓰셨군요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합니다. 피해 없이 잘 나시기 바랍니다 ^^
가족과 마셔도 됫병으로 놓고 드셨네요.
술 좋아 하는 사람들은 잔치에 가서 다른거 다 시원찮아도 슬만 거나해지면 모든게 만사 오케이 입니다.
시골에서 술때문에 죽은 양반들 정말 많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술병으로 죽은사람 상가에 와서도 코가 비뚤어 지도록 마신다는겁니다.
하기는 천국과 지옥 중간에 술집을 차리면 떼돈을 번다는 우스개가 있어요.
천국가는 사람 기분좋아 한 잔, 지옥가는 사람 기분 드러워서 한 잔..
저희 할아버지도 술을 많이 드셔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헉~됫병으로 마시던 그분은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의 재미있는 소설같이 참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담장을 쌓을 정도로 마셨지만..이미 나이가 많으니 술 아니어도 돌아가셨지요.
저의 할아버지도 술을 너무 드셔서 결국 중풍으로 돌아 가셨는데 희한하게 전 술과 인연이 없네요.
아무래도 할아버지께서 제몫까지 다 드신게 아닌가...
글솜씨가 유별합니다.
수필집이라도 발강 하셧는지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하하..
수필가들이 들으면 저 혼납니다.
반아헌님도 술을 즐기시는지 모르겠네요.
바람도 쉬어가늘걸까?
너무도 고요한 시간에 님의 작품을 대하는
빛나는 눈동자 커다란 행복을 다른 님과 공유하는
마음으로 머물다 갑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지요.
피해없는 화요일 되시길 바랍니다.
찾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선생님!
글을 읽다 보니 옛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도 첩첩산골에 살았기에
그 분의 일상이 우리 외할아버지의 일상으로 다가오는군요
우리 외할아버지도 화전민이셨지요
유리 됫병 속의 회한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컸지요
또한 화전 밭에 나무를 심으셨다고 하는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농사 지었던 화전밭도
나라에서 그렇게 나무를 심어서 곡식과 리끼다 소나무가 함께 자랐지요
아련한 추억 속에 외할아버의 삶이 애틋한 추억으로 다가오는군요, 선생님!

선생님도 젊은 시절에 술을 많이 못드셨군요
저도 장가 갔을 때 술 한잔 먹고 그냥 뻗었던 기억이 나서 웃음지어 봅니다
물론 사회생활 하면서 많이 늘었지만~~~ㅎㅎㅎ

글을 읽는 내내 옛 추억 한가득 담아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내일은 한글날입니다
우리의 글이 이토록 아름답고 의미 가득한 글인데
요즘 제대로 쓰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움이 큽니다
한글날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는 고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아..그러셨구나.
당시 화전민들 정말 많았어요.
지금도 그때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경험이 있으시니 공감이 더 가실것 같습니다.
그때 밭에 심었던 곡식이래야 옥수수, 감자, 콩 ,팥 등이었지요.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게 아니라 그냥 먹고 지내기위한 방법이었지요.
요즘 살기 힘들다고 푸념을 하지만 모두 잘먹고 잘 지냅니다.

한글날 올해부터 공휴일인데 좋은 휴일 되세요.
윤선생님도 술을 조금만 하시는구요.
예전에 소주의 온도가 높았다고 하지요?

우리 할아버지도 집에서 먹걸리 한잔씩은 가끔합니다.
수술도 자주 하는 사람이라 제가 말리기도 하지만....
의사의 말도 먹지않고 받는 스트레스보다 가끔.....
그래서 그냥 둡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알콜 도수가 낮은 소주들이 많이 출시 되는데 당시는 보통 25~30도 였지요

막걸리 한 잔 정도 하시는건 도움이 될것 같군요.
소주나 담금주가 아니니 자주만 드시지 않는다면요.

남쪽은 온통 태풍으로 난리던데 큰 탈 없이 지나갔으면 합니다.
어릴적 사홉들이 술병은 많이 봤던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도 술 깨나 드셨거든요~
예전 어른들은 왜그리 술을 많이 드셨는지..
요즘은 그래도 많이 바뀌어서
억지로 술을 권하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
방문 감사합니다.
키위농사 하시네요.
올해도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하는 사회로 바뀌어 갑니다만 아직도 술문화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많이 바뀔것 같습니다.
열무김치님 저 제주 농부의아내에요^^
동명의 다른 농부의아내도 계시고
또, 농장의 특색도 살려보려고 대명을 바꿨지요
괜찮은가요?^^
에고...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어요.
이상하다고 생각 했지요.

농부의 아내라는 블로그가 또 있거등요.
아..그러셧구나
아직 이럴 나이는 아닌데 (ㅎㅎ)(ㅎ)
그걸 강원도에서 포알이라고 불렀군요.

고 2때 친구들과 해변으로 놀러갔다가 친구애가 됫병을 단칼에 마셨습니다.
양은대접으로 두개 나오더군요.
그놈은 그렇게 두대접을 쉬지않고 마시더니 안주삼아 조개를 쥐어주었는데
"조개가 두개로 보인다"하면서 그걸 자기손으로 까지 못하더군요.
그리고는 꼬박 48시간을 혼수상태로 자는 거에요.

이틀만에 일어난 녀석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왔는데
소집일날 보니 애가 아주 초췌해졌더군요.
됫병소주 그거 아주 무서운 겁니다.

하긴 저도 요즘 소줏병 귀찮고 해서 4홉자리 페트병 마십니다.
그게 편하더군요. ㅎㅎㅎ
하하..
그 친구분은 산속에서 만난분보다 한술 더 뜨는군요.
어찌보면 젊은날의 객기지요.
그런데 48시간을 잤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당사 학생들이라 철이 없기는 했나 봅니다.
됫병소주...무섭지요.
요즘 소주들은 도수가 많이 약해 졌습니다.
전에는 25도가 기본이었는데 주당들은 요즘 술 너무 미미하다고 안마시는 사람도 있더군요.
술에 장사 없다고 하니...
저희 친정집 아버지, 그리고 남동새들 다 술을 잘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마시긴 하지만 많이 먹질 못하지요
남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술취한 사람들 보는 게 많이 힘들더라구요
전 술 잘 못마시는 사람이 좋던걸요
유독 술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알콜을 분해하는 힘이 약한 사람들이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과도하게 술을 마시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가끔 대학생 새내기들이 무리하게 술을 마시고 사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의 음주량도 세계 탑안에 든다는 통계를 보았는데 어찌됐든 작은 나라가 다방면으로 대단하긴 합니다.
좋게 보면 추진력이 있는거고
다이내믹해서 심심치는 않지요
이곳은 지금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타서
축제분위기입니다
열무김치님도 술을 잘 못하시는군요.
우리신랑이 한잔만 마셔도 얼굴리 벌겋게 달아 오르는데 우리 장남이 그런 아빠를 닮았더라구요.
대학가더니 선배들이 술을 권하는게 가장 힘들다 하더군요.
요즘 대학문화가 술을 빼면 되는게 없기 때문에 술을 못마시는 아이들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술과 대인관계는 뗄래야 뗄수가 없으니 우리 큰애가 신입생때 무척 힘들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1학년 마치고 아빠 학원일을 도와주다가 군대엘 갔는데 다시 복학을 해도 힘든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에서 처음에 앙케이트 조사하는게 있었는데 부탁하고 싶은말을 쓰라길레 아이들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술문화가 차츰 변해가야 할텐데 자식을 셋이나 키우는 입장에서 걱정스럽습니다.
술 못먹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알콜 중독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숱한 정식적인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술이 원수처럼 보일겁니다.
말씀처럼 술과 직장생활 , 사업등의 대인관계는 실과 바늘같은 존재나 같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술의 힘을 빌려 평소 드러내지 못한 자신을 속내를 표현 한다는게 맞을겁니다.
평소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술 몇 잔이 들어가면 아나운서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심지어 울고불고 평소의 모습과는 180도로 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기회를 제공하는것이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사람속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학가에서 강제로 술을 권하는 문화는 많이 개선된걸로 알고 있는데 잘 지켜지지 않는 가 봅니다.
확실한 자기 의지를 밝히는게 중요할거 같은데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알맞은 음주는 생활을 매끄럽게 하는 윤활류라고 봅니다.
그게 잘 안되서 탈이지만요.
요즘은 술이 너무 흔해 권하면 사양할 명분을 찾아야 하지요.
70년대까지도 술이 보이기만 하면 술 좋아하는 사람은 막걸리는 바가지가 술잔이고
소주는 사발이 술잔이라도 되야 포식할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7~80년대가 참 좋은 세상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너무 개인주의화되어 각박한 세상이 되었지요.
한국 사람들의 술 권면은 세상이 알아 준다고 합니다.
술취해서 저지른 일은 웬만하면 이해를 해 주었지요.
말씀처럼 요즘은 자기 주장이 확실해서 술 권한다고 예전처럼 막 마시진 않습니다.
모든게 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사람들 마음은 그만큼 닫혔네요.
근데 아직도 사발에 소주를 따라먹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대단합니다.
논밭에서 일 할때 반주는 커피 종이컵이 소주잔이죠 ㅎㅎ
소주는 열량이 높아 소주 한컵 마시면 없던 힘도 막 나와 위험하지 않으면서 힘든 일
예컨데 삽질 즉 진짜 삽으로 흙을 퍼 비닐을 씌우는 작업 같은 데는 소주가 필수이죠.
마셔도 안 취합니다 노동강도가 워낙 세다보니까요.

이런 힘든 일을 트렉터가 대신하고 사람 손이 작업량 면에서는 트렉터보다 효율은 낮지만
작물에게는 사람 손이 더 효율적이라 종종 삽질을 하게 됩니다.

**기계를 다루면 술마시면 안되지요.

귀농하시면 아마 제 경험이 흔한 일상이 될 수도 있지요 ㅎㅎ
저도 술에는 약한 체질이라서 술을보면 먼저 겁이납니다.
됫병술 마시는 시골 사람들 많이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