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산골 아가씨

*열무김치 2013. 5. 22. 00:44

 

 

 

 

 

 

 

1974년에서 1975년 나는 나무를 심기위해 강원도 아주 깊숙한 산골로 들어갔다.

목상이셨던 아버지는 당시 인기가 전혀 없었던 깊은 산골의 산을 취득 했는데 당시 그런 험악한 산을 왜 구입을 하셨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생각에는 받지못한 나뭇값이나 벌목대금을 대신하여 궁여지책으로 취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벌채사업을 하다가 엉뚱한 일을 당하거나 계산했던대로 일이 진행 되지 않는 경우였다.

벌채를 해서 목재를 판매를 하려면 나무가 좋아도 운반을 할 수있는 도로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도로확보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일을 벌리고도 적자를 보거나 망하는 경우가 잦아 그 대신으로 지상권 설정을 해 주거나  원치도 않는 산으로 빚을 갚는 일이 많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호랑이가 나올법한 깊은 산골의 산을 취득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야 산 가격이 평당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몇십만원이 나가지만 당시엔 10원에서 많아야 100원이었다.

지금의 화폐 가치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겠지만  당시의 평당 10원은 너무도 하찮은거였다.

논과 밭은 애시당초 산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논과 밭은 당장 가을에 먹을게 나왔지만 산은 땔감 말고는 특별할게 없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의 인식이 이렇다 보니 요즘 말하는 숲이 산소의 보고요, 자연의 허파 노릇을 한다는등의 산에 대한 관념은 산에 관한 지식이 있는 일부 사람들을 빼고는 무지에 가까웠다.

 

 

 

당시 정부에서 치산녹화 사업을 벌렸고 그바람에 우리도 지원을 받았다.

묘목을 지원받아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기로 했는데 목적한 산은 차가 다닐만한 길도 없었고  무엇보다 살고있는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긴 차가 다니는 길이 있었으면 뭐하나.

어차피 차가 없는데.

난 그곳을  한 번 다녀온 후 가고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않아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고 꾀를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산에서 일을 하시다 다리에 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아예 내 책임이 되고 말았다.

별수없이 지원받은 묘목을 수십리 나무를 심을 장소까지 등짐으로 져 날랐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엔 몇명이 하다가 도저히 될것같지 않아 인부를 몇 더 구해서 근 삼일간이나 묘묙을 운반했다.

묘목다발 한둥치를 걸머지고 20리가 넘는 산길을 가려니 하루에 두세번 나르기가 벅찼다.

나는 묘목을 나르면서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니..이런 흉악한 산골에 나무를 심어 항차 무슨 낙을 보겠다고.

당시 나무에 줄 비료가 나왔는데 지금처럼 둥글게 만든 구형의 나무용 복합비료가 아닌 농사에 쓰이는 질소질 비료였다.

그것까지 일일이 등짐을 져서 나르느라 경을 쳤다.

 

나무를 심는다는 소문을 냈다.

허..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산골 구석구석 어디서 나왔는지 수십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도무지 사람이라곤 살지 않을것 같은 이 깊은 산속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살고 있었다니...

나중엔 안 일이지만 당시 강원도 산속엔 화전민들이 많았다.

먹고 살기에 벅벅한 사람들이 도심을 떠돌다가 재산이라곤 자신의 몸뚱이 하나만 믿고 산골로 들어온 경우가 흔했다는 것이다.

산속으로 들어와 갈대집을 짓고 얕은 산지에 불을 놓아 태워서 농지를 만들었다.

화전을 개간한 첫해는 큰 거름을 하지 않아도 땅심이 좋아 비교적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면 한해 겨울 배곯지 않고 무사히 넘겼으니 없는 사람들에겐  화전이 삶의 터전이 될수밖에 없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아  먹고 자는 일은 커다란 짐이었다.

지금은 모두 폐교가 되어 쓸쓸한 모습이지만 내가 살았던 면 소재의 시골에도 자그마치 초등학교가 네군데나 있었다.

마을 규모가 커서 학생수가 천여명에 가까웠던 본교를 빼고도 본교에서 이삼십리 떨어진 산골에 분교가 세군데나 있었고 학생수도 일 이백명에 가까웠다.

그러니 산골마다 사람들이 엄마나 많이 살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당시 천여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이제 폐교를 걱정해야 할만큼 아이들이 줄어 들었다.

텅 빈 운동장에 일 이십명의 아이들이 오갈 뿐 아이들이 뛰어노는 떠들썩한 소리도, 수업 시작을 알리는 땡땡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걸까.

산골 분교에서 해맑게 자라던 아이들은 이제 베이비부머란 이상야릇한 집단에 들어 노후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화전을 일구어 근근이 먹고살던 시절에도 버티고 살았는데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풍족한 삶을 사는데도 우리의 가슴은 이렇게 닫혀만 간다.

옛날 산골짝 골골마다 살았던 화전민들의 자취는 전설로 남았다.

우리에게 과연 이런 사연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1980년대의 어느 산골의  버려진 농가모습

새마을 운동의 덕으로 짚이나 갈대지붕 대신 슬레트 지붕으로 바뀌었지만 생활은 달라진게 거의 없었다.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산골이나 농촌에 살던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서서히 도시로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싯점이엇다. 

 

 

나무를 심어 돈을 벌어 보겠다고 그 험준한 산골에서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난 그걸보고 기겁을 했다.

더 놀란건 머리를 길게 땋은 산골 아가씨들이 무척 많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허름한 옷차림에 가꾸지는 못했지만 순진한 산골 처녀들은 순수했고 아름다웠다.

집이 너무 먼탓에 그곳에 숙소를 정했는데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집은 너무 작았다.

방도 좁고 해 줄 반찬이 없다면서 주인은 거절을 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어 사정사정 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

내가 지낼 방은 방바닥에 짚으로 만든 자리가 깔려 있었다.

몸 하나 누이면 다른공간이 없을만큼 공간이 협소했지만 종일 일하다 집으로 돌아와 밥먹고 나면 눕기 바쁘게 잠이 들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내가 묵고있는 집에 나보다 두살 위인 아가씨가 있었다.

그 아가씨는 처음엔 모른척 하더니 몇 번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눈길이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나가곤 했는데 난 누나들 틈에서 커서 그런지 별 느낌이 없었다.

그녀가 갖다주는 밥상을 받으면 염치도 없이 밥그릇을 모두 비웠고 어떤날은 반찬도 모두 먹어 치우고 빈그릇만 덜렁 내어 놓았다.

부끄러움을 알았더면 아가씨 앞에서 체면도 차렸으련만 난 눈치 코치도 없는 숙맥이었다.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그녀가 밥상을 들고 나가며 말했다.

"참, 잘 드시네요."

 

일을 시작하고 삼 사일이 지나 주인 아저씨가 나를 부르더니 당신 딸도 일하러 가면 안되느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했는데 그 이튿날 그 아가씨는 내 도시락까지 싸서 나를 따라 나섰다.

나무를 심는 인부중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았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아가씨였다.

남자들은 묘목을 심는 장소까지 나르게 했고 여자들은 조를 나누어 나무를 심었다.

화전을 하던 곳이라 나무를 심기엔  아주 수월했다.

어떤곳은 논에 모내기를 하듯 반듯하게 심기도 했다.

하지만 심는 장소가 넓어지고 차츰 사람을 통솔하기에 힘에 부쳤다.

그러나 산골 사람들은 순수해서 꾀를 부리지 않고 보거나 말거나 열심히 나무를 심었다.

봄비가 내리고 진달래가 피어났다.

계곡 여기저기 물소리가 들리고 이름모를 산새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산골의 봄은 겉과 달라서 나무를 심으려 땅을 파면 얼음덩이가 쑥쑥 빠져 나왔다.

점심을 먹고나면 나른한 봄 햇살에 졸음이 밀려왔다.

내가 잠깐 잠이들어  일어나지 못해도 사람들은 알아서 일을 시작했다.

주인집 아가씨는 가끔 졸고있는 내게로 와서 내 등을 툭툭 치곤했다.

그리고 그녀는 뜻모를 미소를 지었는데 난 그게 이상하게 보였다.

그녀는 체격이 여느 아가씨보다 컸는데 특히 엉덩이가 유난해서 그녀를 보면 슬그머니 겁이 났다.

힘도 좋아서 남자들이 메고가는 묘목다발도 거뜬이 들고 산을 올랐다.

나무를 심다말고 아가씨들이 진달래 꽃잎을 땄다.

어떤 사람은 제법 많은 꽃을 땄다.

"그거 뭐 하려고 그래요?"

내가 물었지만 사람들은 웃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을 파하고 이름을 적고 헤여질 무렵이면 아가씨들은 내게 더덕을 내어 주었다.

일하는 중간중간 캤다면서 가져 가라고.

당시 산더덕은 지금처럼 귀한게 아니어서 심드렁 했지만 난 주는대로 모아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

주인집은 더덕을 까서 방망이로 두들겨 납작하게 만든다음 고추장을 발라 석쇠에 구어 주었는데 맛이 참 좋았다.

그녀는 날 보고 더 먹으라며 내 밥상에 더덕을 얹어주었다.

 

집으로 올라와 속옷 몇벌과 작업복을 준비해서 내려갔다.

그냥 가려다 기타를 들고 갔다.

비가 오는 날이나 심심할때 기타를 쳐 보려고.

일 끝나고 좁은 방안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주인 볼까봐 작게 불렀는데 언제 왔는지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 있었다.

난 창피하기도 하고 무얼 훔치다 들킨 사람 같아서 얼굴이 벌개졌다.

"잘 하시네요. 기타소리 듣기 좋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난 기타통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고 그녀도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소 못마땅한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처음 어색하던 사이는 기타를 치면서 어딘지 모르게 가까워 졌고 그녀 역시 여느 아가씨처럼 꿈 많고 발랄한 처녀였다.

난 일하는 현장으로 기타를 들고 갔다.

처음엔 이상한 눈길로 나를 보던 사람들은 며칠 기타를 들고 나가자 이내 시큰둥 해졌다.

난 산꼭대기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멀리서 나를 바라다보며 웃었다.

한마디로 빌어먹을 일이었다.

사람들은 가끔 힐끔거리며 올려다 보았지만  내가 노래를 부르고 벌렁 드러 누어도 꾀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 주었다.

일을 끝내고 이름을 적기위해 모였는데 누군가  나에게 노래 한곡 불러 보라고 말했다.

자기들은 일 시키는 감독이 베짱이처럼 노래 부르는거 처음 봤다면서.

좀 망설였지만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를 하는 나를 멍하니 바라다 보았다.

박수를 치던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무는 뭐하러 심어. 노래나 부르지. 별나긴 하네."

 

진달래를 자꾸 따기에 재차 물었다.

그러는 내가 우스웠는지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내가 내일 가르쳐 줄께요."

그 이튿날은  너무 피곤해서 하루 쉬기로 했다.

집으로 오기위해 보따리를 싸는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저기..나 좀 볼래요?"

그녀를 따라 뒤란으로 갔는데 그곳엔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상큼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뭐예요?"

" 맞춰 보세요."

"술인가?"

그녀는 웃으면서 작은 사발로 항아리속의 붉은 물을 떠서 나에게 마셔 보라고 했다.

달착지근 하면서 쓰고, 향기로우면서도 쌉싸레한 ,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맛이었다.

"뭐예요?"

"진달래 꽃술이예요."

그녀는 웃으면서 내게 다시 마셔 보라고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난 그녀의 권유에 큰 사발로 따라주는 꽃술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술에 약한 나는 그날 밤 즉방으로 곯아 떨어졌다.

그 이튿날 점심시간이었다.

그녀가 작은병에 담긴 붉은 꽃술을 내게 건넸다.

일하는데 무슨 술이냐며 손사레를 쳤더니 그녀가 웃으며

"괜찮아요. 이건 술이 아니라 약이거든요. 근데 술 한 잔 마시고 그렇게 금방 자요?"

난 사람들이 일하러 간 사이 그 꽃술을 야금야금 마셨다.

취기가 오르고 잠이 쏟아졌다.

나른한 햇살에 팔베게를 하고 눈을 감았다.

 

한기가 느껴져 눈을 떴는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그녀만 옆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거예요?"

'어떻게 되긴요. 그깟 술을 마시고 그렇게 깊게자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녀는 웃으며 그만 일어 나라고 했다. 사람들은 기다리다가 이름 적어놓고 갔다면서.

산등성이에 걸린 해가 이미 저녁이었다.

"깨우지 그랬어요."

"깨워도 안 일어 나던데 뭘..."

그녀와 난 산등성이에 멍하니 앉아  계곡 아래를 바라다 보았다.

이제 나무도 얼추 심었고 4월도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 막상 끝나가니 서운하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부침이를 해야해요."

"부침이?"

강냉이도 심어야 하고 쫌 있다가 콩도 심어야 하고..."

"서울 같은데  안가요?"

"배운게 있어야지..겁도 나고.."

그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어깨위로 봄날 저녁은 그렇게 저물었다.

 

하루 쉬기로 한 날

그녀가 더덕을 캐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집에 가져다 놓은것도 제법 있어서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도라지도 있고 잘 하면 토끼도 만날 수 있으니 가자고 했다.

일도 거의 끝나가던 터라 망설였지만 날씨도 좋고하여 따라 나섰다.

나무를 심던 근처를 지나 산등성이를 넘었는데 길이 전혀 없어서 산을 오르기에 너무도 힘이 들었지만 그녀는 날쌘 다람쥐처럼 잘도 빠져 나갔다.

그리곤 여기저기 땅을 파고 더덕을 잘도 캤다.

난 아무리 보아도 더덕을 발견할 수 없었다.

더덕을 캐보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아직 싹도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뒤를 따라가며 신기해 하자 그녀는 더덕을 캐며 나를 불렀다.

"요기..이렇게 죽은 더덕 줄기가  보이잖아요. 가까이 가면 냄새도 나고.."

나는 그녀가 가르키는 곳을 호미로 팠다.

씨알이 제법 굵은 더덕이 나왔다.

내가 좋다고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자기 다래끼에 담겼던 더덕을 내 다래끼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굵기가 실한 더덕을 골라 손으로 껍질을 벗기더니 먹어 보라고 했다.

끈적한 진액이 나오는 더덕은 몹시 썼다.

내가 더덕을 뱉어내자 그녀는 내게 준 더덕을 얼른 빼앗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이건 약이에요.산삼과도 같은."

얼마만큼 올라 왔는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멀리온게 아니예요?"

"왜, 겁나요? 여기 놔두고 혼자 내려 갈까보다."

"그럼 안되지요.난 못찾아 가요."

내가 정색을 하자 그녀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농담으로 한건데...진짜루 놔두고 가야겠네."

 

한나절 캔 더덕과 도라지가 제법 되었다.

봄이라곤 하지만 깊은 산골의 날씨는 추위를 겨우 면한 정도여서 점심을 먹는 내내 한기가 몰려왔다.

"그만 내려가요."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캔 더덕을 보자기에 싸서 망태에 넣어 질머졌다.

내가 지고 갈테니 달라고 하자

"여기선 내가 나을걸요.넘어 지지나 말고 잘 따라오기나 해요."

난 머쓱하니 그녀를 따라 내려 왔는데 정말 그녀를 뒤따라 오기도 벅찼다.

날씨가 서늘했지만 험한 숲길을 헤치고 나오느라 땀이 흘렀다.

물줄기가 제법 실한 계곡 개울가에서 땀을 씻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찬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내가 멀뚱이 서있자 한번 해보라고 했다.

발이 시려울것 같아 망설이다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우리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저..집으로 가면 뭐 할거예요?"

그녀가 도라지를 물에 씻으며 물었다.

"글쎄요. 좀 있다가 서울로 가려구요."

" 학교를 쉬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우연하게 알게 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여기서 농사짓고 살건가요?"

내가 묻자 그녀는 한동안 하늘을 보았다.

"글쎄요..싫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도 없어요.

아버지도 보내 주실것 같지 않고.. "

뭔가 더 이야기를 할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녀는 그만 일어 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 할말이 있었던것 같다.

바람과 물소리..그리고 이름모를 산새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산속에서 그녀와 난 하루를 보냈다.

 

일을 끝냈으니 집으로 올라가 돈을 가져와야 했다.

중간에 한번쯤 정산을 해야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녀의 집에서 나와 얼마쯤 오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조금 오다가 말겠지 했는데 마치 여름 장맛비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우산도 없이 나왔기에 할수없이 어느 농가 처마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처마밑이 너무 낮아서 비를 피하기에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어  웅크리고 앉았다.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멀리서 그녀가 쫒아 오는게 보였다.

그녀는 뛰어 왔는지 가쁜숨을 몰아  쉬었다.

"저기요..우산 가지고 가세요. 비가 너무 내려서.."

그녀는 내게  비닐 우산을  건넸다.

"아니 우산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거예요?"

" 비가 너무 많이 와서...아버지두 걱정을 하시고..

그녀는 우산대신 모자가  달린 커다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자 그녀는 조심해서 가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얼른 그녀를 쫒아갔다.

"왜 오세요?'

"그냥 ..내일 갈래요. 옷도 다 젖었고."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혼자 쓰세요. 난 됐어요."

다시 우산을 들이밀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 우산 작년에 장에 갔다가 산건데  오늘 써먹네."

좁은 산골길을 한 우산을 쓰고 걸었다.

그녀의 몸에서 허연 수증기가 피어났다.

" 그런데 이런 심심산골에 나무는 뭐하러 심어요?"

" 나도 몰라요. 그냥 시키는대로 한거예요."

" 이곳에 언제 왔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 오자 그녀는 잰 걸음으로 앞서 갔다.

그리곤 내가 자는 방에 장작불을 지폈다.

난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그동안 일 한 품삯을 정리해 주고 집으로 오기위해 보따리를 쌌다.

여름쯤 비료를 주고 풀베기를 하러 오겠다며 그때 며칠간 더 묵게 해달라고 주인께 부탁을 했다.

집을 나와 아래로 내려 오는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이거 가지고 가요."

그녀는 허겁지겁 오더니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그냥...집에 가지고 가서 풀러 보세요."

그녀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난 생각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렇게 그곳을 떠나왔고 이내 그곳일을 잊었다.

그녀가 들려준 작은 보따리에는 더덕과 진달래 꽃술이 들어 있었다.

 

그해 8월, 비료를 주고 풀을 깎기위해 그곳에 다시 들렀다.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물어 보기도 그렇고 해서 눈치만 살피다가 그녀 남동생에게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누나는 어디 갔니?"

"몰라요.."

"것두 몰라? 너 동생 맞어?"

하지만 남동생은 너무 어려서 자꾸 물어보기도 그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시집을 갔단다. 그해 6월에.

난 공연히 가슴이 메어져 왔다.

여름에 오면 또 만날줄 알았는데 .

그녀에게 주려고 가지고 온 가요책을 다시 베낭에 넣었다.

 

군대를 다녀오기 바쁘게  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농삿일을 하면서 당시 새마을 지도자를 했는데 면 새마을지도자들의 모임이 마을 하류의 개울가에서 있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둘러 앉았는데 누군가 내 그릇에 닭고기를 가득 담아 주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그녀였다.

많이 먹으라며 내 그릇에 고기를 담아주곤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니...어떻게 된거예요?"

그녀는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얼른 자리를 피했다.

모임 시간 내내 마음이 쓰였다.

모임이 끝나고 몇번을 망설이다가 그녀가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았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그녀가 나를 보자 얼른 나왔다.

꼬맹이 둘을 데리고.

몸빼바지를 입은 그녀는 나무를 심던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난 멀리 간줄 알았는데 여기 사셨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서있기도 뭐해서 꼬맹이에게 돈을 쥐어 주었다.

하지만 꼬맹이들은 받은 돈을 땅바닥에 버리곤  그녀 뒤로 숨었다.

"애들이 많이 컸네요."

......................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난 어색한 발걸음으로 그녀의 집을 빠져 나왔다.

소문을 들으니 그녀는 산골 초등학교 분교의 소사 (학교 잡무를 보는사람)에게 시집을 갔고 남편되는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했다.

그날 우리들의 모임을 위해 일을 거들러 나온 모양이었다.

모르겠다.

난 그녀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에 대해 금방 잊었다.

큰 그릇에 닭고기를 가득 퍼주던 그녀..

아련하게 피어 오르던  젊은날의 풋풋한 감정을 야속하리만치 몰랐던 바보천치가  바로 나였다.

왜 그리도 숙맥이었던걸까.

 

그동안 그곳을 지나는 일이 많았다.

그녀가 살고있는 집앞을 지날때마다 어떤때는 차를 세우고, 사람의 인기척이 있으면 천천히 차를 몰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두어 번 얼굴이 마주 쳤을뿐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늦가을

평창을 다녀 오다가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오는 그녀와 마주쳤다.

차에서 내릴까 망설이다가 그냥 목례만 했다.

그녀도 나를 보고 웃기만 했을뿐 이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동안 그곳에 있었지만 그녀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 오면서 내가 참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던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고 그녀와 마주 앉는다고 해도 딱히 할말도 없으면서.

그런데 희한하게도 깊은 산속에서 더덕을 캐주던 그녀의 얼굴이 얼른 떠나지 않았다.

그 후 한동안 그 근처를 지나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 무슨 말을 할건데..

그리고 몇년 뒤 그곳을 찾았을때 그녀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이웃에 물어보니 남편이 많이 다치는 바람에 병원 생활을 오래 했고, 학교도 폐교가 되는 바람에 농삿거리도 없는 집이라 도시로 벌어 먹으러 나갔다고 했다.

분명 내가 살고있는 곳으로 왔다는데 이제까지 한번도 마주친적이 없다.

나무 심고 더덕과 도라지를 캐주던 수줍던 산골 아가씨는 얼마나 늙었을까..

지금 너무도 변해버린 나를 보면 기억이나 할까?

그때 심었던 나무는 하늘을 찌르게 자랐는데 나무를 심었던 사람들은 땅 아래로 작아졌다.

꾀 부리지 않고 열심으로 나무를 심던 순박했던 산골 아가씨들이 5월 녹음위에 오버랩된다.

가끔 " 둘 다섯"이란 가수가 부른 긴머리 소녀란 가요가 생각난다.

생머리 길게 땋고 순진한 미소를 짓던.

 

 

 

 

 

 

 

무슨 단편소설을 읽은 느낌이예요.
열무김치님 젊은날의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이야기군요.
산골처녀의 짝사랑이야기가 조금은 슬프게 다가옵니다.
그 힘들게 심은 나무들이 나중엔 큰 돈이 되었을까요?

제가 자란 시골도 옛날엔 천오백명정도 되던 학교였는데
지금은 한 학년에 서너명씩 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시골에 노인네들만 살고 젊은 사람이라곤 어쩌다 한가구정도이니..
불과 몇십년전인데 그렇게 변한걸 보면 정말 신기해요.
이 복잡한 도시도 몇십년 흐른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수도 있겠지요?

열무 김치님 글을 읽으면서 참 대단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깡촌에서 살았답니다
그래서 님의 글에 짙은 공감을 하는거 같아요~
성인이 되어서 한번 들렸었는데 그 넓디넓은
냇가와 들녁이 좁게만 보이고 옛친구는 하나도 없고
늙고 낯선 노인네들만 남아 있는 모습들을 보니
서글픔만 남더군요...ㅠ.ㅠ
그 시절에 기타를 치셨다면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그때 그 시절의 추억록을 저리도 꼼꼼하게 마치 소설책을
읽어내려가는듯 합니다..
추억록 잘 보았습니다^^
단편 하나를 읽었습니다
산판 사업
갱판 사업 이라고도 하였지요

어릴적 많이 보았습니다

고은글 잘보았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고 안부만 남기고 갑니다.
천천히, 마음에 담으며 열무김치님 글은 읽을 생각입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글들이라서.....

요즘 제가 5월과 연애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자주 뵙지 못하지만 잘 있다는 증거지요 ㅎㅎ

반갑게 안부 드리고 갑니다.
깔끔한 단편습작 같은데 열무님의 젊은시절 이야기라니
저까지도 괜시리 아련해지네요
폐교된 학교를 지날때 마다
비어가는 시골마을의 슬픈 이별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던 이웃을 떠나보내는 사람들,
자식들은 다 도회지로 떠나가고 노구를 이끌고 농사일을 하는 그 분들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좋은 추억을 가지셨군요
건강하세요
열무김치님 산골 아가씨 잘 읽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산을 취득 하셔서 나무를 심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지 싶습니다.
목상을 하셨다니 나무의 가치를 알고 계셨겠지요.
열무김치님께서 골절상을 당하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산에 나무심기 감독 하시며 좋은 인연을 만나셨었던것 같네요.
그 아가씨가 열무김치님을 좋아 하셨는데 열무김치님
마음을 알수가 없고 집안의 종용으로 결혼을 하신것 같네요.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다음에 만나실수 있을 겁니다.
늘 건강 하세요.
봄이면 떠오르는 기억 단편 잘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요.
아름다운 고장에서 사셨기에 추억이 많으시고, 또한 감성이 풍부하시기에 아름다운 글을 쓰시네요.
감성이 풍부하지 않으면 추억이 있어도 표현을 못하는것이지요.

열무김치님의 아름다운 추억 잘 읽었습니다.
이글을 읽고 잊었던 추억이 살며시 살아나네요.
감사합니다.
소설을 쓰셨네요
조금 밋밋한 감정을 보여 별이 더 서운하네요
사랑은 아니더라도 아니 조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사는군요 ㅎ
누구 한 사람이 끌었다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스토리.
좋은 감정으로 남아 있으니 더 좋은 일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아주 좋은 산으로 변했으리라 믿습니다
더 좀 강하게 마음을 드러내놓고 표현을 한던면 좋은 글이 되겠습니다 ^^
와~~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은듯~~
넘 감동적으로 잔잔하게 다가오는데요!!
넘 멋진 이야기, 아무래도 실제로 경험한추억이라
더 짠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열무김치님 지금 그 산은 나무들이 잘 자라서
아주 멋진 산이 되어 있을것 같네요.
그나무를 심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요.
체험장 만들어서 운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늘 편안한날 되시고 늘 건강 하세요.
글읽으면서 어린시절 생각이 나네요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요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즐거운 주말 되시며

화목하고 행복한

보람찬 자리되세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주말입니다
고은 주말 되세요
 
 
 
 
 
 
글을 읽지 못하고 안부만 남기고 갑니다.
천천히, 마음에 담으며 열무김치님 글은 읽을 생각입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글들이라서.....

요즘 제가 5월과 연애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자주 뵙지 못하지만 잘 있다는 증거지요 ㅎㅎ

반갑게 안부 드리고 갑니다.
깔끔한 단편습작 같은데 열무님의 젊은시절 이야기라니
저까지도 괜시리 아련해지네요
폐교된 학교를 지날때 마다
비어가는 시골마을의 슬픈 이별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던 이웃을 떠나보내는 사람들,
자식들은 다 도회지로 떠나가고 노구를 이끌고 농사일을 하는 그 분들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좋은 추억을 가지셨군요
건강하세요
열무김치님 산골 아가씨 잘 읽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산을 취득 하셔서 나무를 심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지 싶습니다.
목상을 하셨다니 나무의 가치를 알고 계셨겠지요.
열무김치님께서 골절상을 당하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산에 나무심기 감독 하시며 좋은 인연을 만나셨었던것 같네요.
그 아가씨가 열무김치님을 좋아 하셨는데 열무김치님
마음을 알수가 없고 집안의 종용으로 결혼을 하신것 같네요.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다음에 만나실수 있을 겁니다.
늘 건강 하세요.
봄이면 떠오르는 기억 단편 잘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요.
아름다운 고장에서 사셨기에 추억이 많으시고, 또한 감성이 풍부하시기에 아름다운 글을 쓰시네요.
감성이 풍부하지 않으면 추억이 있어도 표현을 못하는것이지요.

열무김치님의 아름다운 추억 잘 읽었습니다.
이글을 읽고 잊었던 추억이 살며시 살아나네요.
감사합니다.
소설을 쓰셨네요
조금 밋밋한 감정을 보여 별이 더 서운하네요
사랑은 아니더라도 아니 조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사는군요 ㅎ
누구 한 사람이 끌었다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스토리.
좋은 감정으로 남아 있으니 더 좋은 일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아주 좋은 산으로 변했으리라 믿습니다
더 좀 강하게 마음을 드러내놓고 표현을 한던면 좋은 글이 되겠습니다 ^^
와~~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은듯~~
넘 감동적으로 잔잔하게 다가오는데요!!
넘 멋진 이야기, 아무래도 실제로 경험한추억이라
더 짠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열무김치님 지금 그 산은 나무들이 잘 자라서
아주 멋진 산이 되어 있을것 같네요.
그나무를 심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요.
체험장 만들어서 운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늘 편안한날 되시고 늘 건강 하세요.
글읽으면서 어린시절 생각이 나네요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요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즐거운 주말 되시며

화목하고 행복한

보람찬 자리되세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주말입니다
고은 주말 되세요
단편소설 한 편을 읽은 느낌입니다.
글을 참 잘 엮으셔서 읽는 이의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바보, 소나기의 소녀가 소년에게 개울가에 앉아 외치던 그 말을 열무김치님께 산골 아가씨가, 제가 던집니다.
ㅎㅎ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100%ㅋㅋ
글 속에 착한심성의 열무김치님과 함께 그녀를 향한 은근한 끌림이 가득 들어있거든요.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ㅎㅎ
인연이군요. 결혼 후 우연히 그렇게 또 만다다니...
산골아가씨가 열무김치님을 참 많이 좋아했네요. 얼마나 혼자서 속을 태웠을까?

닭고기를 수북하게 올려주던 그녀가 왠지 짠하게 다가왔어요.그녀의 사랑법 같아서...

오후, 틈을 내 좋은 글 알뜰히 읽었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저도 월요일까지 애기아빠가 휴기라서 즐겁게 보낼겁니다.^^
아름다운 어린시절의 순박한 사랑이야기가
봄이면 생각나게 하여 추억속의 꿈이되었네요.
어린시절의 추억은 오랫동안 머리속에서
생각이나지요.(ㅋ)(ㅋ).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을 염두고 두고 시행해야 했었는데 도시의 산업시설에만 치중하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농촌 공동화현상이 나타난거죠.
폐가로 방치된 농가가 을씨년스럽다 못해 섬뜩하군요,
등골이 오싹하도록.
찬란한 생명을 잉태했던 주말 하루가 초록꽃 향기로 저물어갑니다.
생애 최고의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 님이여, 오월의 끝자락이여.
봄바다의 여름바람이여.
한편의 단편 소설을 보는 마음으로
찬찬히 아주 찬찬히 열무김치님의 추억이 담긴 글을 읽었습니다.
겉으론 무뚝뚝하고 감정 이입이 안 되었다고 해도
깊은 마음속엔 그 아가씨와의 이끌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가씨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구요.

지척에서 살아가다 우연인 듯 마주치게 되면
어떤 마음일까 글을 읽어가는 제 가슴이 콩콩거립니다.
순진하고 아름다웠던 추억 한 자락 꺼내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으로 여기시고 그 추억 오래 간직하며 즐거운 삶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봄 떠나고 다가온 여름도 건강,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주말도 이제 토요일 밤이내요
무지덥다고 하는 말를 라디오로 들었습니다
계절의 그다움을 잊고 지내는 것이 우리의 오염 문재라고 하니
우리의 잘못이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 오는듯 합니다

고은 하루 평안 하소서
위엣 분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단편을 읽으며 순정남 순정녀의 이야기에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
한 글귀를 읽으며 다음 글귀를 궁금해 하도록 만드는 글 솜씨가 소설가 수준입니다 ㅋ
나무 심는 이야기를 읽으며 당시 농촌에서 녹화사업이라하여 산에 나무 심으러 가던일과
산이 허물어진 곳에 사방사업이라하여 돌담을 쌓고 잔디를 심던일이 생각납니다 ^^*
5월의 끝자락에서서 눈앞에 다가온 여름 건강히 맞으시기 바랍니다 ^^*
이거 20대 버젼 "소나기"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최근 제가 읽은 책을 베껴서 블로그에 "25년만의 깨달음"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딱 그생각이 드는군요.

근데 한편으로 이악스러운 현대인은 어절 수 없는지

그때 그 나무 잘 보살폈으면 지금쯤 엄청난 거금이란 생각도 드는군요. ㅜㅜ

우린 이미 낭만을 잊은 세대입니다.

- 청청수 -
젊은 날의 애뜻함이고스란히 베어있는 글이네요
너무 순수했던 시절이라서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고 그냥 세월을 보냈네요
분명 열무김치님 마음엔 산골 아기씨의 순수한
하얀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던듯 하네요...
물론 산골 아가씨 마음에두요..ㅎ
애뜻한 추억을 애뜻하게 맞닦쳤는데도 그냥....
서로의 다른 삶으로 각자 그렇게 사는거네요
빛바랜 오랜 사진 보듯 그렇게 마음으로 잘 읽고 갑니다^^
아주 훌륭한 작품을 읽고 감동했습니다.
감성이 아주 풍부하신 분이신가봐요. 조금 예사롭지 않으신 분 같으네요.
마음에 담고 있는 계획이 있으시다면 오는 팔월에는 꼭 이루시기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