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2
*OO 유격장에서 1979년
모자를 손으로 잡고있는 사람이 필자다.
앞에 쭈그리고 있는 사람이 늘 고문관 소리를 들었는데 덕분에 유격훈련을 받으며 동료들은 적잖은 혜택(?)을 입었다..
넌 아니구?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하던 나는 갑작스런 부대교체로 OO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당시 부대 근처에 악명 높기로 유명한 유격장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포대는 옮겨오기 무섭게 곧바로 유격장에 투입되었다.
군 생활 내내 말로만 들었을 뿐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터라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포병이었던 우리에게 유격훈련은 다른 부대 사병이나 하는 걸로 여기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에이..재수 옴 붙었네. 말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참들은 입이 두 어 발은 나와 있었다.
더구나 그 유격장은 악랄하기로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어서 유격장으로 입소하던 날, 모두들 잔뜩 긴장을 한 탓인지 부대원들 대부분이 말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입소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연병장 근처의 시궁창을 낮은 포복으로 한바퀴씩 도는 환영(?)을 받았다.
모두들 냄새 풀풀 나는 시궁창 흙을 잔뜩 뒤집어 쓴 채 연병장에 도열 했는데 그때가 삼복 염천이어서 그 몰골들이 아주 가관이었다.
"에..OO 포대 여러분 환영한다.
여러분은 지금 영광스러운 훈련장에 와 있다. 어쩌구 저쩌구.."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는사이 갑자기 엎드려 뻗쳐 구호가 들리더니 우리들은 좌 우로 굴르기 시작했다.
붉은 모자를 쓴 교관들은 우리들 사이를 돌아 다니며 발길질을 해댔다.
열심히 따라 하느라고 했는데 난 한 조교에게 걸려 들었다.
"그렇게 밖에 못하겠습니까?
좌측으로 빠진다..실시."
난 어리버리하다가 미처 그말을 듣지 못했는데 그게 조교를 자극 했는지 갑자기 발길질이 날라왔다.
한쪽 구석으로 나동그라져 허둥대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처음 들어와서 벅벅 기던 시궁창으로 다시 들어갔다.
죽을힘을 다해서 기는데도 그 조교는 더 빨리 가지 않는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다시 대열에 합류했는데 아래를 보니 바지가 찢어져서 넙적다리가 훤하게 드러나고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날 오후를 보냈는지 모른다.
막사에 돌아와 바지를 꿰멨지만 너무 찢어져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건의를 했더니 저녁 늦게 바지 하나가 왔는데 입어보니 너무 끼어서 입을 수가 없었다.
바꿔 달랬더니 대충 맞으면 입으란다.
그 이튿날 날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혹시나 훈련을 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정 반대였다.
난 몸에 꼭 끼는 바지를 입는 바람에 아주 죽을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지는 얼마 못가서 궁둥이 부분이 쭉 찢어졌고 궁둥이가 삐죽이 나왔는데 차라리 그게 더 시원했다.
동료들은 땅바닥을 구르면서도 내 찢어진 궁둥이를 보고 킬킬댔다.
결국 나는 불려 나가서 앞 뒤로 취침을 열 댓 번을 한 뒤 바지 한 벌 을 지급 받았는데 그런대로 입을만 했지만 너무 낡은 옷이었다.
빌어먹을..
우리가 포병이어서 그랬을까 .
조교들은 유난하게도 우리들을 심하게 다루었다.
훈련이 끝나고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나면 모두들 녹초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훈련장 옆으로 거대한 계곡이 있었는데 장마로 인해 물이 엉청나게 불어 있었다.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모두들 계곡물에 뛰어 들어가 꼬랑내 나는 몸을 씻었다.
그때의 시원함이란..
지독한 훈련 보다는 연일 이어지는 더위가 사람을 잡았다.
땀이 비오 듯 쏟아져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그해 가을.
10,26 사태가 터지고 우리부대는 계엄군으로 태릉에 가 있었다.
밥만 먹으면 데모진압 훈련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걸 왜 그렇게 열심히 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사태가 어느정도 가라앉자 우리는 성남 문무대로 옮겨갔다.
3~4층으로 이루어진 학교같은 건물에 상당히 큰 연병장이 있었다.
뒷편으로 커다란 극장이 있었는데 강당 역할을 겸 한 곳이었다.
주말이면 가끔 영화를 보여 주었는데 그때 본 영화가 '영자의 전성시대,겨울여자' 등이었다.
그것 말고도 가끔 연예인 위문공연이 있었는데 연예인 공연도 좋았지만 난 관현악 단원들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선율을 듣는 게 더 좋았다.
박수를 칠 일도 별로 없는데다 입을 벌리고 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고, 졸면서 음악을 듣노라면 봄날 고향집 뒷동산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연예인 공연은 박수를 억지로라도 쳐야하고, 공연도중 뭐가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등, 위문을 하러 온건지 방송을 하러 온건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더구나 타 부대원들보다 함성소리가 작거나 박수 소리가 시원찮으면 공연이 끝난뒤 연병장에 집합을 당하거나 완전군장 구보를 했기 때문에 위문공연이 꼭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더 웃기는건 가수들이 노래를 할 때 앞에 뛰어나가 요란하게 춤을 춘 병사가 특박을 나가는 거였다.
그뒤로 공연이 오면 특별히 춤 출 상황이 아닌데도 너도나도 뛰쳐나가 아주 언바란스한 광경을 연출하는 일이 생겼는데 포크송 가수가 노래하다 말고 좀 들어가주면 안되겠느냐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궁둥이를 꼬아대며 얄궂은 춤을 추었다.
노래를 부른 가수들이 그 사정을 알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가끔 서울 모 부녀회원들이 단체로 몰려와 떡과 과일, 달걀등을 나누어 주곤 했다.
그것 말고도 매일 우유 한 팩과 빵 한 봉이 개인별로 지급 됐는데 어찌됐든 전 보다 잘 먹으니 우리들로선 앞 뒤 재지않고 좋기만 했다.
일과가 끝나면 총기를 손질하고 점호시 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부모님께나 애인에게 편지를 쓰라고 강조를 했는데 난 그때 아내에게 상당한 양의 편지를 보냈다.
주말엔 TV앞에 모여앉아 연속극을 보는일이 큰 낙이었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주말 연속극은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순재 씨와 최불암씨의 아내 되시는 김민자 씨가 주연한 "고독한 관계"라는 극이었다.
사병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는데 내무반이 조용한건 그때가 유일했다.
내용이 확실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이루어 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 뭐, 그런 거였다.
본인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당시의 이순재씨와 김민자씨는 선남 선녀였고 우리들 눈엔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너무도 변해버린 그분들에게 세월의 무상함을 보지만 시간은 누구나에게 공평하니 사실 서운하고 자시고 할것도 없다.
어느 날
식사를 하려고 식당앞에 줄 을 서 있는데 어디선가 본듯한 낮익은 얼굴이 보였다.
난 옆 동료에게 저녀석 어디서 본 듯 하지 않냐고 했더니 동료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다가 가 그녀석에게 물었다.
처음엔 대답을 하지 않던 그 녀석은 몇가지 정황을 들이대자 할수 없었는지 대답을 했다.
유격 훈련장에서 악랄하게 굴던 조교, 바로 그녀석 이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그의 계급장 이었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나는 일등병 계급을 달고있는 그녀석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야, 임마, 너 일등병이 제대 말년들을 그렇게 개고생을 시킨거냐?
히야, 요 놈 봐라."
우리들은 너무도 기가 차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석은 좀 당황하는가 싶더니 거수경례를 척하니 붙이더니
"죄송 합니다.
우리는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니 절 보고 뭐라고 하지 마십시요. 충성~"
추억은 요상한 마력이 있다.
지나간 모든 일들을 그럴듯한 포장지에 예쁘게 싸서 밉지않게 발아래 내려 놓으니..
유격훈련의 에피소드가 실화지만 실화로 재생되어 제가 다 힘들기도 했습니다.
유격훈련, 참 힘들지요.
저는 받아본적은 없지만 애기아빠가 수색대대 작전을 할때 듣고 보고 하여
글이 98%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ㅎㅎ
열무김치님 앞분이 고문관이라구요?
왼쪽 두사람은 행동이 일치하는데 두분은 불일치를...
지난 얘기라 우스개 소리도 할 수 있지만 당시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바지 때문에...
요즘은 입소부대에서 일주일간 대기하며 신체사이즈에 맞는 전투복, 모자, 군화, 벨트까지 지급되니 옛날과 많이 달라졌죠?
군대이야기 2 도 세번 째 읽고 댓글 씁니다.
역시 재밌습니다.
최고예요.
군화도 사진에서 보듯 외출이나 휴가 외에는 잘 신을 수도 없었지요.
이제는 맞춤으로 다 입고 신는다니 요즘 아이들 복이 많은거지요.
클로버님 앞에서는 절대로 뻥 을 칠 수 없겠지요?ㅎㅎ
허기야 몆년전 제대한 아들말이
처음 교회에서는 초코피이를주고 절에서는 국수를줘서 옮겼다는말을해서 한참을 웃은적이 있었지요.
원래 먹는것에는 관심이없어 밥한번 먹이려면 빌다시피 했었거든요
암튼 그 덕분인지 지금은 무엇이든 안 가리고 뭐든 잘 먹는답니다. ㅎ
남자들 군대얘기 빼 놓으면 시체라던데.
휴일의시간 쌈박하게 보내세요.
어쨋든 군대이야기는 재미있어요
남편은 편하게 해서 별로 추억이 없더라구요
키가 커서 그런지 자대배치를 편하고 좋은 곳으로 받아서
주말마다 외출 나오고 나중엔 집에서 너무 자주 나오니까 싫어했다고 하던데요 ㅎㅎㅎ
주말마다 외출을 하셨다면 아주 드문 경우지요.
전 휴가 말고는 특별하게 나온게 별로 없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자주 나와서 정말 싫어 하던데요.ㅎㅎ
포병치고는 참 운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사진이 여러장 되는데 올리기엔 좀 ..
당시 부사관이 필림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어주곤 했는데 칼같이 돈을 받았지요.
어찌됐든 그바람에 추억거리는 마련했습니다.
올빼미 사진을 보니 웃음이 절로나오내요.
다헤어지고 짲어진 올빼미 복 그리고 고문관 군대에만
고문관이 있는지 알았더니 사회에서 있더라고요.
대한민국남자라면 유격훈련 사진은 누구나 한장씩 가지고 있을것입니다.
지겨운 PT체조와 전우애 그당시는 달력에 매직으로 날자를 지우던 기억들
사회에 나오면 무엇이던 다할수 있을것 같던 첫마음.
내리는눈을 보니 GOP 전선의 초병의 마음이 간절해 지는 퇴근시간이
다가오내요.
엣추억의 글을 잘일고 갑니다.
참 열심히 면회를 다니곤 하였지요~ㅎ
같은 부산시내 부대에 배치 되어 주말이면
외박을 나오곤 하여던 기억이 얼마전 같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네요..
열무김치님의 글을 보니 그때 기억이 새록해 옵니다
님의 글을 읽어 내려가니 참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땐 왜 그렇게도 빡센훈련에 구타에 생각만 하여도
오싹해 옵니다..
우리네 아들들이 그랬다면 얼마나 가슴 조리는 시간 이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실감나게 잘 보았습니다..
행복한 성탄절 되세요~!
고문관 소대마다 다 있었죠.
처음에는 꾸중을 하다 나중에는 그냥 웃고 넘어가는 식으로 너그러웠죠.
마침 군대가 민주화되는 시기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강원도에서 근무 했는데 자대유격 한번으로 끝냈죠.
교관이 모두 자대 장교라 쉽게 끝났죠.
유격장까지 완전군장으로 한 행군이 더 힘들었던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