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낙엽만 지는 게 아니다.
*경북 문경 팔영을 지나다가..
그의 사망소식을 들은 건 밤 10시가 가까워서였다.
늦은 시간이라 받지 않으려다 하도 오랜시간 벨이 울리기에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낯선 여자의 음성은 도무지 누군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잘못 건 거 같다고 하자 내 이름을 말하며 맞지 않느냐고 했다.
"네..제 이름이 맞기는 한데 누구신데 제 이름을 아십니까?"
수화기 너머의 그녀와 한동안 얘기를 나눈 후에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군대를 갔다온 후 난 한동안 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군 제대후 집을 떠나자고 아내와 약속을 했지만 그게 마음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는데다 혼자 계시는 어머님을 두고 덜렁 떠나 오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끝에 아이들이 크기전에 농사를 해 보기로 하고 아이들이 좀 자라면 도시로 진출하자고 아내와 약속을 했다.
철모르고 결혼이라는 걸 했지만 가정을 이끌어 갈 능력도 없는 참으로 한심한 처지였다.
당시 복합영농 바람이 불었고 축산 붐이 일었다.
그 바람에 편승하여 이것저것 손을 댔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그당시 정부에서는 축산을 장려 하면서 수입牛를 보급했는데 현지 적응을 고려하지 않고 급하게 일을 하는 바람에 수입우를 입식한 농가는 소를 키워보기도 전에 모두 폐사해 버리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도 같은일을 당해서 시작과 동시에 빚부터 덜컹 지는 꼴 이 되었다.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한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초보 농사꾼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당시 농촌에서는 맞보증을 서는 게 관행이었는데 이게 족쇄역할을 했다.
이웃과 친척이 돌아가며 맞보증을 서다보니 어느 한사람이 파산을 하거나 야반도주를 하면 줄줄이 쪽박을 차는 형국이었다.
*농사를 짓고 있을무렵(1983년) 장발이 낯설다.
이웃에 나보다 서너살 위인 사람이 이사를 왔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집에 이것 저것 빌리러 왔는데 초면에도 사람이 좋아 보여서 짧은 시간에 가까워 졌다.
넉살좋게 밥도 잘 얻어 먹었고 봄에는 영농자금이 없다면서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내게 돈도 빌려갔다.
아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난 이상하게 그에게 마음이 갔다.
순수한 미소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했다.
더군다나 그는 악기를 아주 잘 다루었는데 낡은 색스폰을 부는 그의 모습에 나는 뻑 가버렸다.
기타를 치는 솜씨도 초보인 내가 보기엔 딴세상 사람 같았다.
그러니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농사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같은 논에 벼를 심어도 가을에 추수을 하면 남들보다 월등한 수확량을 거두었다.
외지에서 굴러들어 왔다고 배척을 하던 토박이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의 월등한 농사비법 때문이었다.
"박형..도데체 어떻게 하는거야?
나한테도 좀 알려 줘."
그는 대단한게 아니라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가 군에서 다수확상을 타자 동네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가 농약을 칠때 이상한 걸 넣는다더라..거름을 칠때 이상한 걸 섞는다더라는 등등.
그 중 몇몇은 몰래 그의 논 근처로 가서 이것 저것 살펴보고 심지어는 농약병을 가지고 와서 농약병 상표가 벗겨진 걸 보니 이상한 약품을 섞는게 분명하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다.
근거없는 소문이 돌면 부아가 날만도 한데 그는 태평했다.
"박형, 괜찮아?"
걱정이 되어 물어보면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러다 말겠지.
그가 나에게 그만의 농사 바법을 알려준 건 소문이 돌던 이듬 해 봄이었다.
무슨 대단한 비법이 있을거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그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정확한 시비와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농약 살포였다.
당시 질소나 유안등의 성장위주의 비료만 중하게 여기고 인산이나 마그네슘 칼리비료를 거의 버리다시피 했는데 그는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농약은 최적기에 고압살포를 해서 그당시 골치거리였던 목도열병을 완벽에 가깝게 방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농약이 워낙 좋아져서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당시의 목도열병은 한 해 농사의 분수령이었다.
벼이삭이 나와 낟알에 양분이 들어 고개를 숙일무렵, 벼 이삭의 목 부분에 찾아오는 목도열병은 걸렸다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떤해에는 목도열병이 만연해 한 해 농사를 모두 망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관계기관에서도 목도열병을 방지하라고 방송을 해대고 논 여기저기 현수막을 거는 등 요란을 떨었다.
결국 그의 농사 비법은 원칙을 지키는거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해가을 그의 지도로 평년보다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자 동네에서는 두사람이 몰래 짝자꿍이 되어 이제 한통속이 되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 소문은 그와 나를 더욱 더 가깝게 만들었다.
몇년간 농사를 하면서 그와 난 논으로 밭으로 쏘다녔고 여름이면 개울가에서 천렵을 하면서 친 형제처럼 지냈다.
그가 살던곳을 떠나게 된 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였다.
오랜간 병원을 다니던 그가 봄이 되어도 농사를 할수없게 되자 나와의 만남도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난 그에게 평소대로 다가 갔지만 그는 방문을 걸어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별나게 굴더니 그런꼴이 되었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고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 해 여름 그가 나를 찾아와 돈을 빌려갔다.
초췌한 그의 모습에 난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돈거래를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의 형편으로서는 별 방법이 없는 터였다.
그 뒤로도 두어번 금전을 더 빌려갔고 몸이 좀 회복 되는 듯 보였다.
그러던 그가 이사를 간다면서 늦은밤에 나를 찾아 왔다.
"尹형..미안하게 됐지만 여기서 더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내 땅이 있는것도 아니니 농사를 더 할 수도 없고...
집사람이 남의 품이나 팔러 다니면서 벌어 먹는 걸 언제까지 할 수도 없어서..."
"어떡 하려고?"
"아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를 가려고 해."
"어딘데요?"
"그건, 이사를 간 뒤 내가 연락할께. 그리고 내가 빌려간 돈...지금은 갚을 수가 없어. 시간을 좀 줘."
"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박형 건강이 더 급하잖아요."
그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살림을 싣고 이사를 간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를 그렇게 떠나 보낸 뒤 아내는 빌려준 돈 을 한 푼도 받지못한 나를보고 숙맥이라고 했다.
자기도 형편이 골골 하면서 고양이 쥐 생각 한다면서.
하지만 난 그가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가 불어주던 섹스폰 소리와 기타 소리가 그리웠다.
"저래가지고야 어떻게 도시로 가서 돈을 벌고 살아가나."
아내는 딱한 눈으로 나를 바라다 보았다.
그가 연락을 해 온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다.
키우던 소와 농사를 접고 도시로 나오려고 준비하던 때였다.
살고있는곳을 묻자 처음엔 대답을 하지 않더니 나중에 연락하면 와 보라면서 주소를 알려 줬다.
그가 알려준 동네는 내가 살고있는곳과 그리 멀지 않은 횡계였다.
그렇게 가까이 살고 있었다니..
나중에 보자고 했지만 반가움에 연락을 받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허름한 집에 아이들만 있었는데 엄마는 일을 갔다고 했고 아빠는 몇달에 한번씩 집에 온다고 했다.
멍하니 있다가 아이들에게 과자 몇 봉지를 들려주고 집을 나왔다.
그의 사정이 별로 나아지지 않은 듯 해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후로도 그의 연락은 없었다.
다시 그곳에 찾아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입장이 난처해 질것만 같아서.
그 뒤로도 한동안 그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더이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1989년 난 아내와 시골을 떠나왔다.
도시로 나온 나는 살기에 바빴고 처음 마음과는 다르게 그에 대한 기억도 차츰 엷어져 갔다.
가끔 그가 생각나 혹시나 하여 시골에 전화번호를 남겼지만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직장생활이 어느정도 안정 될 무렵 난 시간을 내어 횡계를 찾았다.
그를 만나면 예전처럼 다시 왕래하며 지내자고 할 요량 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집 주인에게 물어 보았지만 떠난지 오래 되어서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아침 일찍 네비를 켜고 그의 부인이 알려준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가 사는 곳은 생각보다 멀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 든 뒤 시간반을 더 가서야 그가 산다는 동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두메산골 10월 하순의 날씨는 이미 초겨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그의 집을 물었다.
집 근처에 주차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그의 부인 인듯한 여인이 나왔다.
시골에서 가까이 지냈던터라 금방 알아볼 줄 알았는데 그의 부인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 저 알아 볼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의 손을 잡고 내가 물었다.
"예..그럼요. 많이 안늙으셨네요"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무엇에 들킨사람처럼 엉거주춤 방안으로 들어 섰는데 벽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시골에서 함께 지낼때 찍은 사진이었다.그것도 내가 찍어준.
조촐한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그의 생활이 어땠는지 대강 짐작이 되었다.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꽤 오랜시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건 9월이었고 내 연락처를 예전에 살던 시골에 가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왜, 그때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골에 살때 이미 20대 후반이었던 그녀의 모습은 27여년이 흐른 지금 딴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와서도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자신이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고 했다.
이곳에 친가가 있어 오기는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서.
집을 나섰다.
준비 해 간 봉투를 건넸지만 그녀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차에 올라 출발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차안으로 봉투를 들여 밀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집에 가서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차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녀는 다른곳으로 달아 나면서 얼른 가라고 손짓을 했다.
봉투를 마루에 놓고 나오는데 그녀가 다시 쫓아왔다.
얼른 차안으로 봉투를 던진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차안에 들어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얇은 봉투 겉면에 그가 쓴 듯한 내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풀로 봉해져 있었다.
이게 뭐지?
집에 가서 보라고 했지만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개봉을 했다.
봉투 안에는 편지 한장과 10만원짜리 자기앞 수표 3장이 들어 있었다.
윤형.
오랫만이야.그동안 잘 지냈는지, 그리고 아이들은 결혼을 했겠지.
무슨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그의 편지는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시골에서 함께 지내던 날들을 그리워했고 나에게 빌려간 금전에 대해 쓰여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상당한 부담감을 지니고 살아온 듯 했다.
나를 만나는 일도 그랬고 연락을 하지 못한것도 그 까닭이었던 것 같았다.
빌려간 돈을 다 갚지 못함을 미안해 했다.
난 한동안 차안에 앉아서 편지를 바라다 보았다.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그에게 이런 편지를 받는다는 게 도무지 현실같지 않았다.
몇 겹으로 접힌 수표와 편지가 든 봉투를 다시 그녀의 집안에 두고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것이 도리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 내게 보냈는데...
그동안 심적으로 얼마나 부담이 되었기에..
그곳을 얼른 떠나올 수 없었다.
인적드문 동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봉투를 안주머니 깊숙하게 넣고 그 마을을 떠나왔다.
귀가길은 썰렁한 늦가을 날씨만큼이나 허전하고 쓸쓸했다.
가을엔 낙엽만 지는게 아니라 사람도, 인연도,사랑했던 날 들도 진다.
.....
긴 글을 한 자도 빠짐없이 또박또박 읽다가 그만...
친형제 같던 정과 그런 사람에게 빚진자의 마음...
마음은 여전하고 그리웠는데 그는 너무 가난 했습니다.
용케 그분을 이해하고 믿어 주신 열무김치님이 존경스럽고 인간적으로 다가와 슬픔에 젖은 가슴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어요.
글이 아파서...참 아파서...
한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 pathfinder
- 2012.11.21 23:54 신고
- 수정/삭제 답글
화려한 인생을 산이도
초라한 인생을 산 이도
관속에 누우면 다 똑 같은 주검
무었을 위해 이리 하루를 발버둥하듯 살고있는지
다시 돌아보게되는 글입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마음에 가을의 스산함과 따뜻함이 같이 담아봅니다
긴세월 열무김치님에 대한 정과 미안함을 같이 간직하셨을그분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그리고 열무김치님의 마음도....
이제 마음의 짐 내려놓고 편하게 가셨기을 빕니다..
착한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받으면 전 가끔 화가 나곤해요
저 위에서는 편안한 사람을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다들 빚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에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처신이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돈 빌려주고 못받으면 원수가 되는 사람들도 있던데...
근데 글을 읽다보니 30년전의 저 사진속 청년 되게 착한 사람이네요 ^^*
바람이 많이 찹니다..건강 잘 챙기시고 멋진 하루 되시기를~~^^*
가신분도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열무김치님 생각으로 마음 아프게 사시다
가신것 같네요. 열무김치님의 따듯한 마음이 하늘나라로 가신분에게도
잘 전달 되었으라 생각합니다.
님의 아픈 마음이 빠른 시일내에 회복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추운 밤 편안히 쉬시고 건강하세요.(~)(~)
늘 건강한 가치관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시고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창출하시기를 바랍니다.
낙엽도 지고 사람도 지고
참으로 쓸쓸한 계절임은 분명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빚진 자의 마음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글을 읽어가는 내내
아려오는 명치에 눈물 고였습니다.
이별은 슬픈 것이기에
이별은 아픈 것이기에......
다녀가신 흔적 붙잡고 거닐다 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에 켜켜이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유 사장님 블로그에서 몇번 나오시던 분인데 . . . 정말 아쉬운 이별이군요.
글 덕분에 윤사장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뵌 것 같군요.
가슴 쌔애한 내용입니다.
- 청청수 -
담담하게 읽어 내려오다가...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아마도 오늘 날씨 탓이겠지예...눈물이 남은...
열무김치님의 그 마음에
주위가 많이도 따뜻해집니다...
휴일 남은 시간 행복하게 보내시고예....
글을 너무 잘 쓰시기에 수필집을 내시라고 언젠가 말씀드린 생각이 납니다.
열무김치님의 이런글을 몇편 읽은 기억이납니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착하게 사시기에 아이들이 잘 성장했네요,
무엇이든지 그냥 되는것은 없습니다.
베풀면 어디서든 반듯이 돌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참 글도 잘 쓰시네요.^^
제가 언젠가도 열무김치님 글을 보고
이런 똑같은 표현을 했던 것 같아요.
참 착하고 의리있는 열무김치님이십니다.
젊은 시절의 순박한 모습에서도 성품이 나타나네요.
열무김치님에게 감동받았습니다.^^